김상조와 ‘닮은꼴’ 역대 공정거래위원장은?

[커버 스토리=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개혁 플랜]
-‘재벌 개혁 전도사’ 강철규 전 위원장…‘내부 통솔 한계’ 지적도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 위주의 성장 전략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와 함께 탄생했다. 1980년 12월 31일 공정거래법이 도입되고 이듬해인 1981년 4월 본격 출범했다. 정부 주도의 성장 우선 정책이 민간 자율의 경제 운영 방식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공정위는 출범 이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까지 총 19명의 위원장을 배출했다. 그중 김 위원장과 가장 비슷한 인물로 제12대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낸 강철규(73)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꼽힌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진보 성향 학자 출신에 ‘재벌 개혁 전도사’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점, 공정위원장 취임 직후 이례적으로 4대 그룹 대표자들과 회동한 부분 등 두 사람은 여러 모로 닮았다. 김 위원장이 ‘제2의 강철규’로도 불리는 이유다.

강 전 위원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민간인 최초로 공정거래위원장을 맡아 시장 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외환위기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당시 기업 구조조정의 혼란 속에서 참여정부 기업 개혁 정책의 중심에 늘 자리했다.


(사진)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2006년 2월 10일 은행회관에서 30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오찬을 함께하고 있다.

◆임기 내내 강경한 대기업 정책 고수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3월 9일 강철규 부패방지위원장을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청와대는 당시 강 전 위원장의 임명 배경에 대해 “경제 정의와 반부패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가져 온 대표적인 개혁적 인사로서 경제 이론과 법규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현실적 감각도 겸비했다”고 설명했다.

충남 공주 출신인 강 전 위원장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립 멤버로, 경실련 정책연구위원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김대중 정부 들어선 반부패특별위원회 위원, 규제개혁위원장, 부패방지위원장을 맡아 현실 개혁에 참여했다.

강 전 위원장은 민간 시절 부패 차단을 위해 ‘재벌 해체’와 ‘전경련 해체’, 부동산실명제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덕분에 노 전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 1순위로 거론됐었다.

강 전 위원장은 기업 개혁과 규제 등에 대한 시장의 부담을 의식해 취임 직후 ‘개혁 속도 조절’을 강조했다. ‘예측 가능한 개혁’, ‘중·장기 개혁 일정 공표’, ‘대화를 통한 개혁’, ‘정치적 목적에 의한 조사 활동 배제’를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강 전 위원장은 취임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대기업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그는 2003년 4월 열린 4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경제 단체가 집단 대국민 성명으로 정부 정책에 시비를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경고했다.

간담회 전날 전경련 등 경제5단체가 고용허가제 유보와 출자 총액 규제 완화 등을 주장하는 등 정부 정책에 반발한 것을 겨냥한 작심 발언이었다.

강 전 위원장은 그해 10월부터 시장 개혁 방안을 실천에 옮겼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손질한 것을 비롯해 재벌 총수의 과도한 지배력 행사 방지와 소액주주의 권리 향상 등 기업의 내·외부 견제 장치 마련에 앞장섰다. 2004년에는 대기업 금융보험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의 의결권 행사 범위를 축소하도록 공정거래법을 개정했다.

강 전 위원장의 정책에 대기업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외국 투기자본의 공격을 막아낼 방도가 없다고 푸념했다.

전문가들은 출자총액제한제도 등 기업가 정신을 옥죄는 정책이 기업의 설비투자를 위축시키는 원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주회사 지상주의’에 빠져 기업의 지배구조를 획일적으로 재단하고 구조조정본부 등을 끊임없이 압박한다는 비판도 많았다.

강 전 위원장은 그러나 재임 기간 내내 대기업에 대한 강경 정책을 유지했다. 그는 기업들의 담합(카르텔) 관행을 깨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아파트 분양가·굴삭기·시멘트·밀가루·유선통신 등 각 업계에 만연해 있던 담합을 ‘시장경제의 제1 적’으로 규정하고 강력히 대응했다.

강 전 위원장은 2006년 3월 “재벌이 시장의 자유경쟁을 가로막는 한 재벌 정책이 필요하다”며 “공정위가 ‘시장경제의 파수꾼’이 아니라 ‘기업의 발목을 잡는 곳’으로 비쳐지는 게 안타깝다”는 발언과 함께 3년간의 임기를 모두 마쳤다.

강 전 위원장은 2008년부터 4년간 경실련 공동대표를 역임하는 등 공정거래위원장 퇴임 이후에도 시장 개혁에 힘을 보탰다. 지난해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장차관을 지낸 전직 관료 출신 자문그룹 ‘10년의 힘 위원회’ 일원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지난해 6월 6일에는 야당의 ‘낙마’ 공세를 받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지지하는 성명을 정운찬 총리 등과 함께 내기도 했다.

한편 강 전 위원장이 공정위 내부 인사와 조직 관리 측면에서 민간 출신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도 있었다.

공정위 노조는 강 전 위원장 퇴임 전 논평을 통해 “정책과 제도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인사와 조직 관리 측면에서는 직원들의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을 듯하다”고 평가했다.

그가 재임 기간 ‘재벌 정책’을 오히려 후퇴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정부 출자 기관이 지분을 보유한 구조조정 대상 기업에 대한 출자를 출자총액제한제도에서 예외로 인정했다는 이유에서다.

▶공정위의 역사
경제기획원 산하 기관에서 ‘경제 검찰’ 되기까지

공정거래위원회의 모태는 1981년 출범한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산하 공정거래실이다. 공정거래실은 출범 초기 단순한 규제 기관 정도로 인식되는 데 그쳤고 정원도 75명에 불과했다. 인력 600명 이상의 주요 경제 부처로 도약한 현 상황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공정위의 위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들어서다. 상호출자제한과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을 도입한 이후 1988년 6개 정유사의 부당 공동행위를 적발, 출범 7년 만에 21억원의 첫 과징금을 부과하면서부터다.

공정위는 1990년대 본격적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1990년 경제기획원으로부터 분리돼 부산·광주·대전 등에 지방사무소를 세우는 등 전국 단위 부처의 기틀을 마련했다. 1994년 국무총리 산하 독립 기관으로 거듭났고 1996년 공정거래위원장의 지위가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됐다. 2000년대 들어선 ‘경제 검찰’의 역할을 더욱 공고히 했다. 수백억원대 과징금이 부과되는 사건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2010년 대기업에 쏠린 부의 편중 현상을 해소해야 한다는 ‘경제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공정위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공정위가 추진하는 각종 활동이 기업의 경영 활동을 제한하는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주장도 더욱 거세졌다. 반대로 공정위가 대기업 고발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꾸준하다. 지난해에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다는 의혹이 일면서 경제 검찰의 위상이 순식간에 추락하기도 했다.

공정위는 김상조 위원장 취임 이후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난해 11월 조직 개편을 통해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 사안을 전담하는 기업집단국을 출범한 것이 단적인 예다. ‘대기업 저승사자’로 불리던 ‘조사국’을 12년 만에 부활시킴으로써 공정위가 대기업에 대해 관대하다는 지적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공정위 기업집단국은 대기업 공익 법인 운영에 대한 실태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공익 법인 소유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제한하는 등 대기업 총수 일가의 편법적 지배력 남용을 막기 위해서다. 기업집단국은 2019년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인 만큼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기업 대상의 강도 높은 조사가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choie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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