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화학·통신 ‘3각 편대’로 ‘글로벌 LG’ 키워낸 구본무 회장 지다
입력 2018-05-21 19:01:35
수정 2018-05-21 19:01:35
-20년 ‘정도 경영’ 실천... 취임후 경영 청사진 ‘도약 2005’ 한경비즈니스 단독 보도도
(사진) 고 구본무 회장이 2011년 글로벌 CEO 전략회의에서 최고경영진과 대화하고 있다. /LG그룹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5월 20일 별세한 고 구본무 LG 회장은 과감한 결단력이 돋보이는 승부사였다.
1945년 2월 1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난 구본무 회장은 LG그룹의 3대 경영자다. 고 구인회 LG 창업 회장의 장손이자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2대 그룹회장)의 장남이다.
구본무 회장은 서울 남선고 졸업 후 미국 애슐랜드대 경영학 학사, 클리블블랜드주립대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1975년 럭키(현 LG화학)의 심사과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금성사(현 LG전자) 이사,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 기획조정실 전무, 부사장 등을 거쳤다. 1989년 그룹 부회장직에 올랐으며 1995년에는 회장직에 취임했다.
(사진) 1995년 2월 22일 구본무 LG그룹 신임 회장이 이취임식에서 깃발을 흔들고 있다. /LG그룹
‘한경비즈니스’는 구본무 회장이 회장직에 오른 이듬해인 1996년 LG그룹의 ‘도약 2005’ 시나리오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한경비즈니스 1996년 3월 12일 발간 14호 커버스토리 ‘LG, 현대·삼성 한 판 붙자’)
당시 구 회장이 그린 ‘도약 2005’ 시나리오에 따르면, LG그룹은 2005년 매출액 300조원을 달성, 현대와 삼성을 제치고 국내는 물론 세계적 초우량 기업으로 발돋움한다는 내용의 골자를 세웠다. 연평균 20%의 급신장을 통해 전자, 화학, 상사, 정유 등 주요 부문에서 1위를 하겠다는 공격적인 계획이다. 취임 초 구본무 회장의 승부사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진) 한경비즈니스는 1996년 당시 구본무 신임 회장의 '도약 2005' 시나리오를 단독 입수해 보도하기도 했다. 사진은 당시 한경비즈니스 지면.
◆세계 1등으로 키워낸 2차 전지·디스플레이
이후 구본무 회장은 20년간 전자-화학-통신 서비스의 3각 편대를 통해 LG그룹을 성장시켰다. 이러한 구 회장의 판단력에 힘입어 1994년말 30조원이었던 LG그룹의 매출액은 지난해 160조원대로 5배 이상 성장했다.
1992년 영국 전자력연구원(AEA)에서 충전으로 반복해 사용할 수 있는 2차 전지를 접한 구 회장은 적극적 투자를 지시했다. 2차전지 샘플을 입수해 럭키금속에서 이를 연구하도록 했고 1996년에는 전지 연구조직을 LG화학으로 이전했다.
2차 전지 사업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2차 전지 사업이 2000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낸 것이다. 당시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며 우리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고 임직원을 격려했다.
구 회장의 신임에 힘입어 LG화학은 2차 전지 분야에서 세계 1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LG화학은 국내 최초로 리튬이온배터리를 개발했으며 전기차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중대형 배터리 분야에서도 세계적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대·기아차를 포함해 GM, 르노, 르노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 30여곳에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LG디스플레이다. 1999년 당시 정부가 ‘빅딜’을 추진하며 반도체 사업을 넘기게 되자, LG전자와 LG반도체에서 LCD(액정표시장치) 사업을 떼어내 디스플레이사업을 유지했다. 그 후 구 회장은 네덜란드 필립스로부터 16억달러를 유치해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라는 사명으로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20년간 디스플레이에만 40조원 이상을 투자했다. LG디스플레이는 2006년 세계 최초로 100인치 풀 GD LCD 개발에 성공했으며 대형 올레드(OLED) 사업은 세계 시장 1위로 거듭났다.
통신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취임 이듬해인 1996년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해 2000년 유선사업을 인수 후 통신 사업을 강화했다. 2010년에는 LG텔레콤, LG데이콤, LG파워콤을 합병해 ‘LG유플러스’를 탄생시켜 통신을 그룹의 주축 사업으로 안착시켰다.
(사진) 구본무 회장은 매년 연구개발성과보고회에서 열고 연구과제를 점검하고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2011년 3월 연구개발성과보고회에서 구 회장이 미래 신사업 연구과제를 현미경으로 살펴보고 있다. /LG그룹
구본무 회장은 기업 지배구조 개편의 ‘모범사례’를 제시한 경영자로도 언급된다. 2003년 LG그룹은 국내 대기업 중에서는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지배구조를 지주회사와 자회사 간 수직적 출자구조로 단순화했다. 이후 LG는 자회사는 사업에, 지주회사는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에 전념하는 지배구조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외신 또한 구 회장의 지배구조 재편을 업적으로 평가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부고 기사를 통해 구 회장이 투명한 소유지배구조를 국내 재벌들 중 가장 먼저 도입했고, 분사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크게 성장시켰다는 점을 소개했다.
여기에 구본무 회장은 ‘LG’라는 CI를 도입한 인물이다. 1995년 2월 22일 LG그룹 회장에 취임한 후 ‘럭키금성’ 대신 ‘LG’라는 새로운 CI를 앞세웠다. ‘럭키금성’이라는 명칭이 이미 너무 익숙해졌다는 주변의 반대도 있었지만, 구 회장은 글로벌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전략으로 LG로의 CI 변경을 추진했다.
장자 승계 원칙을 따르고 있는 LG가는 구본무 회장의 타계로 4세대로의 승계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구광모 LG전자 상무를 중심으로 하현회 (주)LG 부회장, 박진수 LG화학 부회장,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 권영수 LG유플러스 부회장, 조성진 LG전자 부회장,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등 6인의 각 계열사 전문경영인들이 경영 일선에 나선다.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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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전면에 나선 LG그룹 4세…구광모 상무는 누구?
(사진) 고 구본무 회장이 2011년 글로벌 CEO 전략회의에서 최고경영진과 대화하고 있다. /LG그룹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5월 20일 별세한 고 구본무 LG 회장은 과감한 결단력이 돋보이는 승부사였다.
1945년 2월 1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난 구본무 회장은 LG그룹의 3대 경영자다. 고 구인회 LG 창업 회장의 장손이자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2대 그룹회장)의 장남이다.
구본무 회장은 서울 남선고 졸업 후 미국 애슐랜드대 경영학 학사, 클리블블랜드주립대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1975년 럭키(현 LG화학)의 심사과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금성사(현 LG전자) 이사,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 기획조정실 전무, 부사장 등을 거쳤다. 1989년 그룹 부회장직에 올랐으며 1995년에는 회장직에 취임했다.
(사진) 1995년 2월 22일 구본무 LG그룹 신임 회장이 이취임식에서 깃발을 흔들고 있다. /LG그룹
‘한경비즈니스’는 구본무 회장이 회장직에 오른 이듬해인 1996년 LG그룹의 ‘도약 2005’ 시나리오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한경비즈니스 1996년 3월 12일 발간 14호 커버스토리 ‘LG, 현대·삼성 한 판 붙자’)
당시 구 회장이 그린 ‘도약 2005’ 시나리오에 따르면, LG그룹은 2005년 매출액 300조원을 달성, 현대와 삼성을 제치고 국내는 물론 세계적 초우량 기업으로 발돋움한다는 내용의 골자를 세웠다. 연평균 20%의 급신장을 통해 전자, 화학, 상사, 정유 등 주요 부문에서 1위를 하겠다는 공격적인 계획이다. 취임 초 구본무 회장의 승부사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진) 한경비즈니스는 1996년 당시 구본무 신임 회장의 '도약 2005' 시나리오를 단독 입수해 보도하기도 했다. 사진은 당시 한경비즈니스 지면.
◆세계 1등으로 키워낸 2차 전지·디스플레이
이후 구본무 회장은 20년간 전자-화학-통신 서비스의 3각 편대를 통해 LG그룹을 성장시켰다. 이러한 구 회장의 판단력에 힘입어 1994년말 30조원이었던 LG그룹의 매출액은 지난해 160조원대로 5배 이상 성장했다.
1992년 영국 전자력연구원(AEA)에서 충전으로 반복해 사용할 수 있는 2차 전지를 접한 구 회장은 적극적 투자를 지시했다. 2차전지 샘플을 입수해 럭키금속에서 이를 연구하도록 했고 1996년에는 전지 연구조직을 LG화학으로 이전했다.
2차 전지 사업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2차 전지 사업이 2000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낸 것이다. 당시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며 우리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고 임직원을 격려했다.
구 회장의 신임에 힘입어 LG화학은 2차 전지 분야에서 세계 1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LG화학은 국내 최초로 리튬이온배터리를 개발했으며 전기차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중대형 배터리 분야에서도 세계적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대·기아차를 포함해 GM, 르노, 르노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 30여곳에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LG디스플레이다. 1999년 당시 정부가 ‘빅딜’을 추진하며 반도체 사업을 넘기게 되자, LG전자와 LG반도체에서 LCD(액정표시장치) 사업을 떼어내 디스플레이사업을 유지했다. 그 후 구 회장은 네덜란드 필립스로부터 16억달러를 유치해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라는 사명으로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20년간 디스플레이에만 40조원 이상을 투자했다. LG디스플레이는 2006년 세계 최초로 100인치 풀 GD LCD 개발에 성공했으며 대형 올레드(OLED) 사업은 세계 시장 1위로 거듭났다.
통신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취임 이듬해인 1996년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해 2000년 유선사업을 인수 후 통신 사업을 강화했다. 2010년에는 LG텔레콤, LG데이콤, LG파워콤을 합병해 ‘LG유플러스’를 탄생시켜 통신을 그룹의 주축 사업으로 안착시켰다.
(사진) 구본무 회장은 매년 연구개발성과보고회에서 열고 연구과제를 점검하고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2011년 3월 연구개발성과보고회에서 구 회장이 미래 신사업 연구과제를 현미경으로 살펴보고 있다. /LG그룹
구본무 회장은 기업 지배구조 개편의 ‘모범사례’를 제시한 경영자로도 언급된다. 2003년 LG그룹은 국내 대기업 중에서는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지배구조를 지주회사와 자회사 간 수직적 출자구조로 단순화했다. 이후 LG는 자회사는 사업에, 지주회사는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에 전념하는 지배구조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외신 또한 구 회장의 지배구조 재편을 업적으로 평가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부고 기사를 통해 구 회장이 투명한 소유지배구조를 국내 재벌들 중 가장 먼저 도입했고, 분사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크게 성장시켰다는 점을 소개했다.
여기에 구본무 회장은 ‘LG’라는 CI를 도입한 인물이다. 1995년 2월 22일 LG그룹 회장에 취임한 후 ‘럭키금성’ 대신 ‘LG’라는 새로운 CI를 앞세웠다. ‘럭키금성’이라는 명칭이 이미 너무 익숙해졌다는 주변의 반대도 있었지만, 구 회장은 글로벌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전략으로 LG로의 CI 변경을 추진했다.
장자 승계 원칙을 따르고 있는 LG가는 구본무 회장의 타계로 4세대로의 승계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구광모 LG전자 상무를 중심으로 하현회 (주)LG 부회장, 박진수 LG화학 부회장,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 권영수 LG유플러스 부회장, 조성진 LG전자 부회장,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등 6인의 각 계열사 전문경영인들이 경영 일선에 나선다.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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