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4세 ‘구광모 체제’ 출범…3일장 치르자마자 여의도 출근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정도의 경영자.’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5월 20일 별세했다. 구 회장은 조용히 떠났지만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긴 울림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1945년 2월 1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난 고 구본무 회장은 LG그룹의 3대 경영자다.
1975년 (주)럭키(현 LG화학)의 심사과장으로 입사해 금성사(현 LG전자) 이사,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 기획조정실 전무, 부사장 등을 거쳤다. 1989년 그룹 부회장직에 올랐고 1995년 회장에 취임했다.
◆‘삼각편대’로 키워낸 글로벌 LG
이후 구본무 회장은 20년간 전자·화학·통신 서비스의 삼각편대를 통해 LG그룹을 성장시켰다. 이러한 구 회장의 판단력에 힘입어 1994년 말 30조원이었던 LG그룹의 매출액은 지난해 160조원대로 5배 이상 성장했다.
1992년 영국 원자력공사(AEA)에서 충전해 반복 사용할 수 있는 2차전지를 접한 구 회장은 적극적 투자를 지시했다. 2차전지 샘플을 입수해 럭키금속에서 이를 연구하도록 했고 1996년 전지 연구 조직을 LG화학으로 이전했다.
2차전지 사업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2차전지 사업이 2000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낸 것이다. 당시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고 우리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고 임직원을 격려했다.
구 회장의 신임에 힘입어 LG화학은 2차전지 분야에서 세계 1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LG화학은 국내 최초로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했고 전기차 배터리, 에너지 저장 장치(ESS) 등 중대형 배터리 분야에서도 세계적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대차·기아차를 포함해 제너럴모터스(GM)·르노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 30여 곳에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LG디스플레이다. 1999년 당시 정부가 ‘빅딜’을 추진하며 반도체 사업을 넘기게 되자 LG전자와 LG반도체에서 액정표시장치(LCD) 사업을 떼어내 디스플레이 사업을 유지했다.
그 후 구 회장은 네덜란드 필립스로부터 16억 달러를 유치해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라는 사명으로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20년간 디스플레이에만 40조원 이상을 투자했다. LG디스플레이는 2006년 세계 최초로 100인치 풀 GD LCD 개발에 성공했고 대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사업은 세계시장 1위로 거듭났다.
통신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취임 이듬해인 1996년 이동통신 사업에 진출해 2000년 유선 사업을 인수한 후 통신 사업을 강화했다. 2010년에는 LG텔레콤·LG데이콤·LG파워콤을 합병해 ‘LG유플러스’를 탄생시켜 통신을 그룹의 주축 사업으로 안착시켰다.
구 회장은 기업 지배구조 개편의 ‘모범 사례’를 제시한 경영자로도 언급된다. 2003년 LG그룹은 국내 대기업 중에서는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지배구조를 지주회사와 자회사 간 수직적 출자 구조로 단순화했다.
이후 LG는 자회사는 사업에, 지주회사는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에 전념하는 지배구조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블룸버그통신은 부고 기사를 통해 구 회장이 투명한 소유 지배구조를 국내 재벌들 중 가장 먼저 도입했고 분사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크게 성장시켰다고 소개했다.
◆‘가족장’으로 곤지암 화담숲에 영면
구 회장은 생전 본인이 아꼈던 ‘숲과 나무’ 아래 잠들었다.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고인의 유지를 따라 발인제 또한 가족과 지인 100여 명만 참석해 비공개로 치러졌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추모사를 통해 ‘자신에겐 엄격했지만 남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던 경영인’으로 구 회장을 애도했다.
구 회장의 유해는 경기 곤지암의 ‘화담숲’ 인근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생전 수년에 걸쳐 조성한 생태 수목원이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의 화담(和談)은 구 회장의 아호다.
여기에 기업 오너 최초로 수목장을 택한 점도 큰 감동을 전했다. 화장한 뼛가루를 나무뿌리 주위에 묻는 자연 친화적 장례 방식인 수목장은 생전 구 회장 뜻인 ‘한국의 장례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뜻에 따라 이뤄졌다.
구본무 회장의 타계로 LG가는 ‘4세 경영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구 회장의 외아들인 구광모 LG전자 상무는 3일장을 마친 다음 날 LG트윈타워 서관으로 출근했다.
구 상무는 당분간 대규모의 신규 투자를 집행하기보다 주력 계열사 최고재무책임자(CFO)들의 의견을 들으며 기존 투자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LG전자는 4월 오스트리아의 차량 헤드라이트 제조업체 ZKW를 1조원에 인수했다. 여기에 LG그룹의 각 계열사들도 이미 중·장기적 사업 계획을 통해 각자 투자를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직책 또한 당장 회장이나 부회장을 달기보다 사장급 승진이 유력하다. 구 상무의 등기이사 선임은 6월 29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확정된다.
mjlee@hankyung.com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정도의 경영자.’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5월 20일 별세했다. 구 회장은 조용히 떠났지만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긴 울림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1945년 2월 1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난 고 구본무 회장은 LG그룹의 3대 경영자다.
1975년 (주)럭키(현 LG화학)의 심사과장으로 입사해 금성사(현 LG전자) 이사,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 기획조정실 전무, 부사장 등을 거쳤다. 1989년 그룹 부회장직에 올랐고 1995년 회장에 취임했다.
◆‘삼각편대’로 키워낸 글로벌 LG
이후 구본무 회장은 20년간 전자·화학·통신 서비스의 삼각편대를 통해 LG그룹을 성장시켰다. 이러한 구 회장의 판단력에 힘입어 1994년 말 30조원이었던 LG그룹의 매출액은 지난해 160조원대로 5배 이상 성장했다.
1992년 영국 원자력공사(AEA)에서 충전해 반복 사용할 수 있는 2차전지를 접한 구 회장은 적극적 투자를 지시했다. 2차전지 샘플을 입수해 럭키금속에서 이를 연구하도록 했고 1996년 전지 연구 조직을 LG화학으로 이전했다.
2차전지 사업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2차전지 사업이 2000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낸 것이다. 당시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고 우리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고 임직원을 격려했다.
구 회장의 신임에 힘입어 LG화학은 2차전지 분야에서 세계 1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LG화학은 국내 최초로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했고 전기차 배터리, 에너지 저장 장치(ESS) 등 중대형 배터리 분야에서도 세계적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대차·기아차를 포함해 제너럴모터스(GM)·르노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 30여 곳에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LG디스플레이다. 1999년 당시 정부가 ‘빅딜’을 추진하며 반도체 사업을 넘기게 되자 LG전자와 LG반도체에서 액정표시장치(LCD) 사업을 떼어내 디스플레이 사업을 유지했다.
그 후 구 회장은 네덜란드 필립스로부터 16억 달러를 유치해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라는 사명으로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20년간 디스플레이에만 40조원 이상을 투자했다. LG디스플레이는 2006년 세계 최초로 100인치 풀 GD LCD 개발에 성공했고 대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사업은 세계시장 1위로 거듭났다.
통신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취임 이듬해인 1996년 이동통신 사업에 진출해 2000년 유선 사업을 인수한 후 통신 사업을 강화했다. 2010년에는 LG텔레콤·LG데이콤·LG파워콤을 합병해 ‘LG유플러스’를 탄생시켜 통신을 그룹의 주축 사업으로 안착시켰다.
구 회장은 기업 지배구조 개편의 ‘모범 사례’를 제시한 경영자로도 언급된다. 2003년 LG그룹은 국내 대기업 중에서는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지배구조를 지주회사와 자회사 간 수직적 출자 구조로 단순화했다.
이후 LG는 자회사는 사업에, 지주회사는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에 전념하는 지배구조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블룸버그통신은 부고 기사를 통해 구 회장이 투명한 소유 지배구조를 국내 재벌들 중 가장 먼저 도입했고 분사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크게 성장시켰다고 소개했다.
◆‘가족장’으로 곤지암 화담숲에 영면
구 회장은 생전 본인이 아꼈던 ‘숲과 나무’ 아래 잠들었다.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고인의 유지를 따라 발인제 또한 가족과 지인 100여 명만 참석해 비공개로 치러졌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추모사를 통해 ‘자신에겐 엄격했지만 남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던 경영인’으로 구 회장을 애도했다.
구 회장의 유해는 경기 곤지암의 ‘화담숲’ 인근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생전 수년에 걸쳐 조성한 생태 수목원이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의 화담(和談)은 구 회장의 아호다.
여기에 기업 오너 최초로 수목장을 택한 점도 큰 감동을 전했다. 화장한 뼛가루를 나무뿌리 주위에 묻는 자연 친화적 장례 방식인 수목장은 생전 구 회장 뜻인 ‘한국의 장례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뜻에 따라 이뤄졌다.
구본무 회장의 타계로 LG가는 ‘4세 경영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구 회장의 외아들인 구광모 LG전자 상무는 3일장을 마친 다음 날 LG트윈타워 서관으로 출근했다.
구 상무는 당분간 대규모의 신규 투자를 집행하기보다 주력 계열사 최고재무책임자(CFO)들의 의견을 들으며 기존 투자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LG전자는 4월 오스트리아의 차량 헤드라이트 제조업체 ZKW를 1조원에 인수했다. 여기에 LG그룹의 각 계열사들도 이미 중·장기적 사업 계획을 통해 각자 투자를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직책 또한 당장 회장이나 부회장을 달기보다 사장급 승진이 유력하다. 구 상무의 등기이사 선임은 6월 29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확정된다.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