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에서 현실로’ 지구촌에 확산되는 기본소득 논의

[커버스토리=AI·로봇 시대의 새 화두 ‘기본소득’이 뭐길래]
-이탈리아 등 선거 핵심 공약으로 등장…미국은 기업가들이 주도

편집자주 = 인공지능(AI)과 로봇으로 인한 일자리의 변화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엘론 머스크 테슬라모터스 CEO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의 리더들이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한목소리로 강조하고 있다. 캐나다·핀란드·네덜란드에서는 기본소득 도입을 실험 중이며 이탈리아·프랑스에서는 기본소득 도입이 선거전의 핵심 공약으로 등장했다. 한국도 기본소득과 관련한 논의가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기본소득이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대담한 상상과 실행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사진) 2016년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 당시 제네바 광장에 기본소득 슬로건이 크게 붙어 있다.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지난해 9월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에 흥미로운 칼럼이 하나 실렸다. 혁신담당 편집자인 존 손힐이 작성한 이 칼럼의 제목은 ‘페이스북은 왜 우리에게 기본소득을 지불해야 하는가’였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가 제안한 ‘기본소득 모델’에 대한 일종의 화답 형식으로 쓰인 글이었다.

저커버그 CEO는 지난해 5월 하버드대 졸업 연설에서 ‘우리 세대 나름의 사회계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기술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만큼 사람들의 직장이나 직업도 하나에 그치지 않고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새로운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완충장치를 주기 위해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 아이디어를 탐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페이스북이 기본소득 지급하라?

손힐 편집자는 저커버그 CEO의 제안에 대해 다른 누구도 아닌 페이스북이 기본소득을 지불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페이스북은 전 세계 20억 명이 끊임없이 교류하며 자신의 데이터를 제공한다. 바로 이 데이터가 페이스북의 가장 중요한 수익원이다. 그러니 불특정 다수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데이터’로부터 수입을 얻는 페이스북이야말로 기본소득의 재원을 책임질 당사자라는 것이다.

최근 빠르게 확산되는 기본소득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인공지능(AI) 쇼크와도 연관이 있다. 미래의 AI는 단순히 인간의 육체노동만 대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운전·번역과 같은 ‘지극히 인간적’으로 여겨지던 영역까지 침범 당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가 극대화됐다. 이에 따라 ‘인간의 노동’이라는 개념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사회복지 시스템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됐다. 새로운 사회에는 그에 맞춘 ‘새로운 사회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기본소득은 국가가 감당해야 하는 ‘과도한 복지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노력과도 연결된다. 이미 지구촌 대부분의 국가들은 고령화로 사회·복지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고 있는 처지다. 이런 상황에서 빠른 기술 변화로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낙오자가 늘어난다면 그에 따른 복지비용은 국가 경제를 위협할 만큼의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기본소득과 같은 ‘통합적 복지 시스템’이 복지 시스템을 개선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기본소득’ 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캐나다는 1970년대 매니토바 주 위니펙과 도핀에서 5년 동안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하기도 했다. 스위스는 2016년 매월 2500프랑(약 270만원)을 국민들에게 지급하는 기본소득 제도 도입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부결됐다. 기본소득 도입 시의 재정 부담과 기존 복지제도 축소에 대한 우려가 그 이유였다.

그러나 2017년을 기점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한단계 진화한 모습이다. 과거 논의가 이론적 공방에 머물렀다며 최근에는 실질적인 도입과 개선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캐나다는 온타리오 주 주민들을 대상으로 2017년부터 3년간 기본소득의 효과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온타리오 주에서 1년 이상 거주한 18~65세 주민 중 자발적 참가 의사를 밝힌 사람들 가운데 무작위로 선택해 매월 1320달러(약 108만원) 정도의 소득을 보장한다. 캐나다의 목표는 ‘빈곤 감소’다. 캐나다 인구의 약 38%가 거주하고 있는 온타리오 주는 주민의 약 13%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사진) 이탈리아의 신생 정당 오성운동의 창립자인 코미디언 출신 베페 그릴로 대표가 취재진에 둘러싸여 있다.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건 오성운동은 올해 3월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당이 됐다.

◆소규모 정책 실험 넘어 공약으로

네덜란드는 2017년부터 중부 대도시 위트레흐트시 주민 250명을 대상으로 2년간 개인당 월 972유로(약 12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실험에 돌입했다. 네덜란드가 해결하려는 문제는 ‘인센티브의 함정’이다. 실업수당 등 인센티브를 유지하기 위해 구직 활동을 포기하는 실업자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핀란드도 네덜란드와 같은 목적으로 2017년부터 2년간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적 차원의 기본소득을 실험 중이다.

미국은 글로벌 기업의 CEO 등 경제 리더들이 적극적으로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와이콤비네이터가 진행 중인 기본소득 실험이 대표적이다.

최근 유럽에서는 기본소득이 주요 정당의 핵심 공약으로 등장하고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유력 차기 지도자로 거론되는 미하엘 뮐러 베를린 시장은 3월 하르츠 개혁의 폐기를 요구하며 ‘연대 기본소득’ 도입을 제안했다. 실업자들에게 매달 416유로(약 55만원)씩 주고 있는 실업수당을 대신해 국가에서 기본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고 이들에게 매달 1500유로(약 198만원)에 달하는 기본소득을 주자는 아이디어다.

이탈리아에서는 올해 3월 총선에서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이 기본소득 지급을 공약으로 내걸며 화제를 모았다. 실업자나 저소득자에게 매달 780유로(약 103만원)를 지급하겠다는 내용으로, 특히 이와 같은 공약은 실업률이 높은 이탈리아 남부의 표심을 얻는 데 위력을 발휘했다.

프랑스는 지난해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인 브누아 아몽 전 교육부 장관이 ‘기본소득 보장제’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전면에 내세우며 기본소득이 대선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매달 600~750유로(77만~96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구상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당선 이후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기본소득 논쟁은 최근 재점화하고 있다. 파리 북부 교외 지역인 센생드니 등 프랑스 8개 지방자치단체장들이 기본소득 보장 제도의 시범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유럽생태녹색당도 기본소득 보장 실험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용어설명= ‘기본소득(Basic Income)’이란
Basic Income Guarantee, Universal Basic Income(UBI) 등으로도 불린다. 소득과 자산 수준, 직업 유무에 관계없이 전 국민에게 개별적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보편성·무조건성·개별성이 핵심이다. 1988년 프랑스 경제 철학자 앙드레 고로가 자신의 저서 ‘경제이성비판’에서 현대적 의미의 기본소득을 제안했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취지다. 제주도 지역에서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기본소득 지급’이 선거공약으로 제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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