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실적만으로 평가 받겠다’는 경영학 이론일 뿐…미디어 등 이용해 ‘관계 자본’ 쌓아야
[한경비즈니스 칼럼=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과감한 결단으로 성공 신화를 만들어 내는 최고경영자(CEO)…. 경영학 사례나 교과서에 흔히 등장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현실의 경영자는 생각보다 그리 현명하지 못한 이가 많고 막상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얼치기 경영학’은 이런 신화를 외우고 CEO는 불세출의 리더로 포장해 숭배한다. 기업과 경영자가 존경과 신뢰를 얻는 효과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사람들은 이런 슈퍼맨들이 마음대로 세상을 쥐고 흔드는 줄 알고 오히려 경계하고 그 힘을 빼앗으려고 든다. 자기 돈을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 기업을 쥐고 흔들려는 이들에게 분노와 선동의 소재를 상납하는 꼴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경영의 현실
현실의 경영자는 제한된 능력에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세상에서 힘겹게 문제를 풀어가는, 그러다가 결국 더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밀려서 도태되는 인물이다. 몇 번의 성공 경험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시절 좋을 때 만든 사업적 관계와 신뢰를 아슬아슬하게 지켜가며 자본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남다른 성공을 영원히 기억해 주지 않는다. 성공의 경험을 안정된 사업 밑천으로 만들려면 세상 사람에게 쉽고 빠르게 기억되는 상징성을 확보해야 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브랜드 마케팅과 비슷한데, 경영자의 정체성을 조성해 알리는 ‘PI(President Identity)’가 대표적이다.
월스트리트의 유명인을 앞세운 투자 펀드는 사실 해당 유명 인사의 지분과 영향력이 제한적일 때가 많다. 요란한 언론 보도와 함께 등장하는 경영자 역시 그의 상징적 가치를 내세웠을 뿐 실제 권한은 크지 않은 사례가 대부분이다. 한때의 성공으로 얻은 상징적 가치와 사업적 관계를 임대하거나 출자한 셈이다.
다양한 이해관계 집단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경영자의 자율성은 더욱 제약된다. 기업의 주인인 투자자들은 언제든지 이사회를 통해 감독하고 주주총회에서 경영권을 뺏을 수 있다. 손쉽게 주식을 사고팔면 그 평가와 결정이 실시간으로 기업 가치에 반영된다.
채권자 역시 경영자의 자율성을 제약한다. 은행은 계약을 통해 주요 투자안에 대해 동의를 요구하고 부도가 나면 다른 채권자들과 함께 경영권을 접수한다. 기업 지배구조를 복잡하게 얘기하지만 사실은 대차대조표의 오른쪽(투자자와 채권자 구성)이 왼쪽(투자 행위와 자산 구성)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노조 역시 파업은 물론이고 다양한 수단을 통해 경영자의 선택을 제약할 수 있다. 소비자단체의 집단적 영향력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지만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이제 특정 개인도 ‘특종 고발 기사’로 기업과 경영자를 흔들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정치적 과정과 결부되면 이런 집단적 영향력은 훨씬 커질 수 있고 경영권 분쟁을 비롯한 경영자에 대한 압력에 동원될 수도 있다.
제프리 페퍼 스탠퍼드대 석좌교수는 다양한 이해관계 집단의 압력 속에서 조직의 구조와 운영을 모색하는 경영자의 현실을 ‘외부적 통제(external control)’와 ‘자원 의존(resource dependency)’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해관계 집단에 대응해 자율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구체적 실행의 여지가 제약된 경영자에게는 조직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함축하는 상징적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경영자’라는 상징적 역할
기업의 전략과 성과, 변화의 방향에 대해 다양한 이해관계인에게 설명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복잡한 회사 사정을 정성껏 들어줄 리도 없거니와 무한한 인과관계의 가설들이 가능한데 특정 주장이 맞다고 설명한들 납득할 리가 없다. 나름의 이해관계가 작동하면 편파적 해석과 주장이 시작되니 더욱 어려워진다.
어떤 경영진을 선임하느냐는 이미 구축된 그들의 상징적 가치 혹은 정체성에 힘입어 변화의 방향을 보여준다. 방송 프로그램에 일정한 정체성을 가진 출연자를 배치해 시청자에게 내용의 방향성을 알리고 시청의 동의를 구하는 일이나 개각, 공천 영입 등을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념과 정책 방향을 장황하게 설명하기보다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나 집단을 내세워 상징적 가치를 선점하는 것이다.
경영학 수업에서는 유능한 경영자가 돼 스스로 변신하고 나아가 변화를 이끌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해관계로 꽉 짜인 데다 남의 사정을 길게 생각해 줄 여력이 없는 세상이다. 경영자가 자신을 알리고 정체성을 얻기도 어려운데 “나 이제 다른 사람”이라며 변화를 인정받기는 정말 어렵다. 사람의 능력은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많고 솔직히 큰 차이가 없을 때도 있지만 ‘상징 가치’가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선입견이 대세를 좌우하기도 한다.
역사를 보면 전쟁터를 누빈 무인이 훌륭한 재상이 되고 책 읽던 서생이 역전의 용사를 지휘해 건국의 영웅이 된 사례가 제법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은 천신만고의 사연들 속에서 진화한 사례이고 대부분은 백면서생을 전쟁터의 지휘관으로 보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믿고 따라야 하는 무인들의 불안감과 소외감이 우선 걱정이고 전쟁 물자 조달과 병력 운용에 관련되는 수많은 이해관계인과의 안정된 관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백발의 김유신 장군이 나당전쟁에서 한겨울에 맨살을 드러내며 적진 깊숙이 쌀을 수송한 것은 자신이 나서야 장졸들이 그나마 믿고 따르기 때문이었다. 머리에 철퇴를 맞아 전투력이 없고 상징성만 남은 김종서 대감이 머리를 싸매고 다시 쿠데타 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도 북방을 지킨 고명대신이라는 상징성과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적·군사적 관계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엔지니어 출신의 경영자가 숨은 능력을 발휘해 구조조정을 잘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물린 돈을 받아내야 하는 금융권의 투자자나 채권자는 재무 출신의 가급적 구조조정 경력이 있는 인물을 선호한다. 해본 일이니 잘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형성된 금융·법률·노무 등 관계자와의 인적 관계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신뢰를 자본으로 삼아야
경영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상징적 가치와 관계 자본을 만들어 간다. 구체적 성과가 중요하지만 속사정은 심란하다. 주가나 이익 등의 경영 실적은 복잡한 사연이 가득 담긴 함부로 믿지 못할 정보지만 ‘객관적 숫자’가 필요한 현실에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갖는다. 운도 실력이다. 운이 있는 경영자가 가장 안심이 되는, 웃을 수만 없는 세상의 이치가 작용하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면 복잡한 속사정을 알아보거나 다시 생각해 보기 어렵다. 그러다 보면 언론 보도나 증권사 보고서 등의 정리된 내용을 참고하게 된다. 심지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한 심층 보고서가 ‘대중적 인식’과 달라 의심받는 경우도 있다. 정보의 선택이나 편집에서 주관과 편견, 혹은 이해관계가 들어가고 경영자의 적극적 정보 투입과 다양한 영향력 수단이 작용한다면 정리된 내용은 소설이 돼가지만 불행히도 세상의 평가와 경영자의 정체성은 이렇게 만들어져 간다.
이런 정보 전달과 해독의 시그널링 과정은 거품처럼 부풀려진 엉터리 경영자를 만들고 수많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 사정은 정치판도 비슷해 미디어가 만든 허상이 실제를 압도하기도 하고 거품 이미지를 이용해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 데 쓰이기도 한다. ‘삼국지’에서 촉을 접수한 유비와 제갈량은 명성만 그럴듯한 무능한 인물을 내세워 현지민의 불만을 무마했다.
하지만 훌륭한 경영자라도 세상이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면 아무 일도 못하는 세상에서 이런 거품과 허상의 구조를 탓할 수만은 없다. 돋보여야 할 성과가 있다면 신화를 만들어서라도 알려야 하고 억울한 음해의 기록이 있다면 방어 수단을 찾아야 한다. 미디어의 속성을 탓하기 전에 대중의 구경거리가 되더라도 경영자 스스로의 생각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 엉터리 혹은 뻥튀기 가짜를 몰아낼 수 있다. 무능한 명망가의 거품 자본을 활용하는 영악함이 필요할 수도 있다. 제갈량의 신화에는 과연 이런 ‘홍보 전략’이 없었을까.
경영자의 전략적 자율성이 제약되고 상징적 역할이 더 중요해진 세상에서 묵묵히 실적으로만 승부하겠다는 생각은 정직함이 아니라 미련함에 불과하다. 세상의 신뢰는 알리고 설득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재미와 감동이 더해지면 더 쉽게 알릴 수 있다.
온 세상이 조미료 듬뿍 들어간 미디어 플레이로 거품을 만들수록 정직하고 지혜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관계 자본을 다져 가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 싫다면 집에 틀어박혀 세상 쓸데없는 경영학 책이나 외우든지….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83호(2018.07.30 ~ 2018.08.0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