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탄생시킨 ‘변하지 않는 기록’의 가치

[비트코인 A to Z]
-‘비트코인’은 기존의 권위 흔들 것…엘리트를 믿느냐·미래를 내다보느냐 선택해야




[오태민 크립토비트코인 연구소장, '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비관적인 경제 전망을 자주 내놓아 ‘닥터 둠’이라고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암호화폐의 탈중앙화는 신화에 불과하며 이더리움 개발자인 비탈릭 부테린은 ‘독재자’라고 조롱했다. 그는 블록체인은 과대평가된 스프레드시트일 뿐 실제로는 쓸모없는 기술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암호화폐를 북한의 정치 시스템과 비교하기도 했다. 이것만 놓고 보면 루비니 교수는 블록체인이나 북한 둘 중 하나에 대해서는 오해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타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의 본질적인 속성을 파고들었다는 점에서만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비트코인은 전 세계 1만 개의 노드에서 동일한 데이터를 기록하고 저장하는 분산 시스템이다. 이 때문에 기록이 원본이라는 사실은 심판자의 개입 없이 확인된다. 블록체인의 모든 가능성은 바로 어떤 기록이 원본 그대로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데서 출발한다.

기록이 처음에 만들어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문명의 본질적인 능력이다. 인류가 국가를 만든 이유도 이 일과 관련이 있다. 소유물을 증명하는 방법은 실제로 점유하고 있거나 아니면 공인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이 점유하는 방식으로는 값나가는 소유물을 확정하기 어려웠다. 마지막 거래에 대한 기록이 원본이라는 것은 확인하는 방식, 즉 등기제도가 해결책이다. 강의 범람으로 농토의 경계가 흐려졌을 때 이집트의 농민들은 국가 공인 서기를 찾았다. 소유권 기록이 원본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은 정부가 고용한 관료만이 할 수 있었다. 고대로부터 국가 서기는 군인과 함께 공무원의 원형이다. 이들은 중요한 기록물에 대한 접근권을 독점했다. 국가가 보증하는 기록은 재산권에서 생명권까지 망라했다. 현대 국가의 종이 화폐는 국가만이 창출하고 고칠 수 있는 특수한 회계장부상에 존재하는 수치의 물화(物化)일 뿐이다.

‘군인과 서기’ 는 국가의 근간

서기 교육은 엄격했고 오래 걸렸다. 엄격한 규율 아래 텍스트를 그대로 암기하는 능력을 요구받았다. 서기의 수를 제한하는 것이 이 직능에 대한 국가 독점의 내적 장치였다면 방대한 텍스트를 암기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독점의 외적 장치였다. 외적 장치는 국가 독점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 능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유소년기를 반복 학습에 매진해야 했으므로 누군가 전적으로 지원해 줘야 했다. 평민에게 문호를 개방해도 어쩔 수 없이 귀족 자제들의 등용문으로 기능했다. 형식적으로나마 개방된 시스템이라면 간혹 돌연변이들이 좁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도 일어났다. 이런 예외는 시스템의 개방성을 부각하므로 흔하지만 않다면 반길 만한 일이기도 했다.

소수만이 기록하거나 첨언할 수 있도록 해 기록의 원본을 유지하고자 하는 선의가 독점의 본질이다. 따라서 문자는 난해할수록 좋았다. 평민도 문자를 쓰게 하고 싶었던 세종대왕은 이단아였다. 쉬운 문자는 기록에 대한 국가 독점의 정당성을 허물고 장부의 현물 가치에 대해 불신을 조장한다.

한글 창제 이후에도 조선은 문자를 독점한 서기 계급에 의해 정보가 통제됐다. 목판 인쇄에 비해 유연성이 뛰어난 금속활자를 가지고 있는 정부였지만 실제로는 책을 최소한의 부수만 찍는 용도로 사용했다. 한 번 만들면 목판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여러 권 찍거나 그냥 버려야 했던 목판과 달리 금속활자는 몇 권만 찍고 다른 책을 찍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기록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 국가의 근간이 무너진다는 논리에서만 따지면 문자 독점에 대한 서기 계급의 집착은 합리적이다.

국가가 승인하는 기록이더라도 완벽한 원본일 리는 없다. 서기들도 실수투성이의 인간이다.
하지만 오류가 있는 기록이라도 국가가 인정하고 나면 무오성(無誤性· infallibility)을 인정받았다. 그 자체는 비합리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합리적이다. 국가의 결정에 무오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심판과 사사건건 드잡이해 가며 치러야 하는 축구 경기와 같이 난장판이 돼버린다.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의 권위는 결국 종교적 신성을 빌려야만 비로소 성립했다.

처음 등장했을 때 소수의 사람들은 기록의 원본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비트코인이 단순히 디지털 화폐의 의미를 뛰어넘는 문명사적인 전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컬러드 코인(colored coin)에 주목했다.

컬러드 코인은 쉽게 말해 기념주화다. 얼마의 비트코인에 주식이나 채권, 은행 잔액을 기록해 휴대하고 전송할 수 있다. 컬러드 코인은 내재 가치가 없는 비트코인과 달리 현실의 재산을 등록해 토큰화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기대를 모았다. 부동산 등기나 자동차 키와 같은 현실의 재산권을 입증할 수도 있지만 졸업증명서나 학점증명서, 개인의 신원 기록도 등록할 수 있다. 바다를 건너온 난민이 제시한 신분증 기록을 믿게 하는 것은 블록체인 기술밖에 없다는 것을 유엔도 인정했다.

기록의 원본 때문에 국가가 존재했고 그 판단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권력은 종교화됐다. 기록의 원본성을 권위 있는 제삼자가 아니라 분산화한 시스템이 확인해 준다면 국가의 권위는 많은 부분 정당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국가의 화폐 독점에 대한 도전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 도전이 어디까지 확장할지에 관해 한계를 아는 사람들은 없지만 비트코인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이후 최대의 발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미친 게 아니라는 것은 믿어도 좋다. 권위자의 개입 없이 기록이 원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문명의 근간이 바뀐다. 이를 부정한다면 둘 중 하나다. 근본이 바뀌는 격변을 걱정하는 선의의 거짓말이든가 아니면 엘리트들의 선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든가.

[돋보기] 비트코인 캐시에서 주목받고 있는 컬러드 코인
컬러드 코인에 대한 열정은 3, 4년 전부터 급격하게 식었다. 이더리움 때문이었다. 적대적 환경에 살아남기 위해 최적화된 비트코인 시스템의 특성 때문에 용량에 한계가 있었고 수수료도 비쌌다.

비트코인 시스템에서 돌아가는 컬러드 코인의 기술적인 제약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부터 이더리움과 다양한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갈라져 나왔다. 이더리움은 하나의 분산 컴퓨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하고 많은 텍스트를 심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비트코인 캐시 진영에서 컬러드 코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더리움이 지향하는 것은 스마트 콘트랙트이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것은 토큰 제조 플랫폼일 뿐이라는 논리에서 출발한다.

컬러드 코인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비트코인 언리미티드의 개발자 앤드루 스톤이 제시한 프로토콜을 활용하면 스마트폰 앱에서도 구동할 수 있다. 컬러드 코인 기능을 확장하면 비트코인 캐시는 단순한 분산 결제 시스템을 넘어 분산된 거래소가 될 수 있다.

분산된 거래소는 중앙 거래소처럼 엄청난 자산들을 서버에 보관하지 않기 때문에 해킹의 위험이 없다. 또한 국가가 임의로 폐쇄하거나 압수 수색할 수 없다. 비트코인 캐시와 컬러드 코인이 플랫폼으로 자리 잡는다면 유연성이 적은 비트코인이나 스마트 콘트랙트라는 이상에 묶인 이더리움 사이에서 현실적인 솔루션이라는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4호(2018.10.15 ~ 2018.10.2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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