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성장의 견인차?…초반부터 발목 잡힌 ‘초대형 IB’

[커버스토리=자본시장법 10년…다시 그리는 ‘한국판 골드만삭스’의 꿈]
-자기자본 4조원 넘는 5개 증권사 지정…‘발행어음 인가’는 단 2곳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자동차 공유 업체 우버에 초기 자본 투자자로 3700만 달러를 투자해 우버가 세계적인 스타트업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밖에 스포티파이·브록박스 등의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기업에 투자하고 있다. 이처럼 혁신적이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한 뒤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투자 수익 회수뿐만 아니라 기업공개(IPO) 지원, 경영 컨설팅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국내에 ‘초대형 IB’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무렵이다. 당시 금융 당국은 국내 초대형 IB 육성을 통해 골드만삭스와 같은 ‘혁신 성장의 주역’으로 역할해 주기를 기대했다. 국내 증권사들에도 초대형 IB는 신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이듬해인 2017년 11월 금융위원회는 자기자본 4조원을 충족한 미래에셋대우·한국투자증권·NH투자증권·KB증권·삼성증권 등 5개 증권사를 초대형 IB로 지정했다. 이제 막 초대형 IB 출범 1년을 넘긴 이들의 도전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저마다 강력한 체질 개선을 통해 사업 영역을 넓혀 가며 ‘한국형 골드만삭스’의 꿈을 쫓아가고 있다.


◆초대형 IB 1년, 자본 확충 등 체질 개선 노력


초대형 IB 육성 방안은 대규모 자본 확충을 전제로 증권사에 다양한 신규 업무를 허용하는 것이 골자다. 자기자본 규모 4조원을 충족한 증권사에는 기업 환전 등 외국환 업무 범위가 확대되고 영업용순자본비율(NCR)과 레버리지 규제가 완화된다. 증권업과 연관된 외환 업무만 할 수 있었던 증권사들이 ‘초대형 IB’ 타이틀을 달고 일반 기업을 대상으로 한 환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증권사의 건전성을 측정하는 지표인 NCR 규제 완화도 의미가 크다. 투자 여력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기자본 8조원을 넘어서면 고객 자산을 기업금융에 투자하는 종합투자계좌(IMA)와 부동산담보 신탁 업무를 다룰 수 있다.


인수·합병(M&A)·IPO·부동산금융·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 주선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는 IB 업무는 ‘자본력’이 곧 힘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18년 3분기를 기준으로 국내 초대형 IB 5곳의 자기자본 규모는 미래에셋대우 8조2162억원, NH투자증권이 4조9767억원, 삼성증권 4조5959억원, KB증권 4조4556억원, 한국투자증권 4조4439억원이다.





덩치 싸움만 놓고 보면 미래에셋대우의 압도적인 우위다. 미래에셋대우는 지난해 초 대규모 유상증자를 통해 자기자본 규모를 8조원 이상으로 확충하고 글로벌 인프라와 대체 투자는 물론 글로벌 유니콘 기업에 이르기까지 투자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NH투자증권 또한 자기자본 규모 5조원대로 2위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특히 NH투자증권은 국내 IB 1세대인 정영채 사장 취임 2년 차를 맞아 IB 사업 강화에 더욱 드라이브를 걸 예정이다.


하지만 ‘덩치를 키운’ 초대형 IB들의 본격적인 경쟁은 아직 제대로 첫발도 떼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초대형 IB의 핵심 업무인 단기금융업(발행어음) 인가를 받은 곳이 단 두 곳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17년 11월 한국투자증권이 1호로 인가를 받았고 지난해 5월 NH투자증권이 둘째로 인가를 획득했다.


발행어음은 증권사나 종합 금융회사가 영업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회사 자체 신용을 바탕으로 일반 투자자들에게 발행하는 만기 1년 이내 단기금융 상품을 말한다. 단기금융업 인가를 받은 증권사는 자기자본의 200%까지 어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고 조달 자금의 운용 자산 중 50% 이상을 기업금융에 투자해야 한다.


더욱이 단기금융업 인가를 받지 못한 증권사들은 기업 대상 외국환 업무도 보류된 상태다. 초대형 IB가 출범하던 2017년 11월까지만 해도 금융위원회는 단기금융업 인가 없이 초대형 IB로 지정되면 기업 환전 업무가 가능하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가 그해 12월 초대형 IB 지정 증권사가 기업 환전 등 일반 외국환 업무를 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리며 발목을 잡았다. 다시 말해 발행어음 업무를 인가받지 못한다면 실질적으로 IB 사업을 확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발행어음 1호’ 한투 제재 심위, 업계 촉각


현재 미래에셋대우·KB증권·삼성증권의 발행어음 진출은 요원해 보인다. KB증권은 2017년 7월 인가 신청을 했지만 승인이 보류됐다. 구 현대증권의 59조원 규모 불법 자전거래에 대한 징계가 발목을 잡았다. KB증권은 지난해 1월 ‘사업성 재검토’를 이유로 인가 신청을 철회했다. 지난해 6월 말 불법 자전거래에 대한 징계가 마무리되면서 재신청을 준비했지만 그 과정에서 직원의 횡령 사건까지 불거지며 한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이후 지난해 12월 금융위원회에 발행어음 인가 신청서를 제출한 뒤 현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자기자본 1위인 미래에셋대우는 발행어음 사업을 시작하면 가장 큰 시너지가 기대되지만 공정거래위원회의 ‘내부 거래’ 의혹으로 현재 인가 심사가 보류된 상태다. 2017년 7월 인가 신청서를 제출한 미래에셋대우는 그해 12월 “공정위의 일감 몰아주기 조사로 금융 당국으로부터 발행어음 인가 심사가 보류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공시했다. 이후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공정위 조사가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 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되고 있다.






삼성증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삼성증권은 지난해 8월 발행어음 사업 인가 신청을 자진 철회했다. 삼성증권은 2017년 7월 인가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금감원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대주주 적격성을 이유로 삼성증권의 발행어음 인가 심사를 무기한 보류했다. 지난해 2월 이 부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면서 단기금융업 인가를 다시 노려볼 기회를 맞았지만 얼마 뒤인 4월 ‘배당 오류’ 사고가 터졌다. 이에 따라 금융 당국으로부터 6개월 영업정지 징계를 받으며 향후 2년간 신사업을 하지 못하게 돼 발행어음 사업 진출은 더욱 요원해졌다.


그렇다고 ‘발행어음 1호’ 사업자로 프리미엄 효과를 누려온 한국투자증권도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말부터 한국투자증권이 발행어음 사업으로 조달한 금액을 부정 사용했다며 제재심의위원회를 열고 징계 수위를 정하고 있지만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투자증권은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을 기업이 아닌 SK그룹 최태원 회장에게 대출해 준 혐의를 받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해 12월 20일과 올해 1월 10일 두 차례 제재심에서 이 사안을 심의했지만 좀처럼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다. 한국투자증권 측의 소명이 길어진 영향도 있지만 제재심 위원 간에서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발행어음 잔액은 2017년 말 8527억원에서 2018년 9월 말 기준 4조8055억원으로 급증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4조원에 육박하는 잔액이 늘어났다. 당시 잔액을 기준으로 점유율을 추산해 보면 한국투자증권이 71.73%, NH투자증권이 28.26%다. ‘발행어음 1호’ 사업자로서 국내 발행어음 시장을 주도해 온 한국투자증권의 금융감독원 징계 수위에 다른 증권사들 역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다. 금감원은 이번 사안과 관련해 한국투자증권에 기관 경고, 임원 제재, 일부 영업정지 등을 사전 통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악의 경우는 일부 영업정지까지 받을 수 있고 단기금융업 인가 취소도 가능하다.


현재로선 이와 같은 과도한 조치가 내려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게 업계의 전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초대형 IB가 이제 막 출범한 뒤 자리 잡고 있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징계 결과에 따른 파장이 적지는 않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투자증권의 제재 논의 이후 나머지 증권사들의 ‘발행어음 인가’ 사업에 대한 노력도 시들해진 상태다. 금융 당국이 각종 이유로 심사 자체를 미루고 있는데다 발행어음 사업 인가를 받은 증권사들도 규제로 인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초대형 IB 출범 이후 지난 1년 동안 브로커리지 중심 업무에서 벗어나 IB 부문의 비율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는 과정”이라며 “하지만 초대형 IB가 정착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초대형 IB 육성의 취지인 기업금융 활성화를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과 규제 완화 노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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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9호(2019.01.28 ~ 2019.02.0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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