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에서 배우는 경영 이야기 ②]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경영인으로서 첫째 원칙으로 삼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인재 경영’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이다.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은 기업 발전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동시에 경영인들의 가장 큰 보람이기도 하다.
기업 경영에서 ‘인재’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은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충무공 이순신으로부터 배운 교훈 때문이다. 이순신은 우리 역사 속 최고의 리더였다. 그리고 인재를 그 누구보다 중요시한 지도자였다. 그는 이 시대 모든 리더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재 경영’의 진수를 보여줬다. 이순신의 인재 경영을 세 가지로 나눠 살펴보자.
첫째, 이순신은 부하들과 진실한 마음을 나눈 소통의 리더였다. ‘난중일기’를 포함한 각종 기록에는 유독 부하들과 함께한 기록이 많이 등장한다. ‘난중일기’에는 그의 휘하에 있는 1000여 명의 이름이 등장할 정도다. 그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상세하게 기록했다. 주변 사람들과 부하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얼마나 세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부하나 동료들과 바둑과 장기, 활쏘기 등을 함께했다. 어려운 전쟁 중에도 휴식을 취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며 이들을 격려했다. 군막 안 자신의 회의실을 일반 병사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때때로 권위와 격식을 버리고 병사들의 애로 사항과 애환을 경청했다. 부하들이 각종 오해로 파직됐을 때 그들을 위해 호소하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수행하며 고생하는 사람들과 심부름꾼·노비들에게 먹을 것과 빚어 놓은 술을 나눠 주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몸을 던지는 희생도 주저하지 않았다. 학문과 무예에 능한 부하 이의온이 왜적이 쏜 독화살에 맞아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화살을 뽑아낸 다음 직접 입을 대고 독을 빨아냈다고 전해진다. 그 덕분에 이의온은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이의온은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제가 재주는 없으나 외람되이 원수 이순신에게 발탁됐으니 어찌 죽음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이순신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진실한 소통이 ‘승리’의 원동력
이처럼 이순신은 그의 사람들과 진실하게 소통했다.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약점보다 장점과 능력을 우선시했고 칭찬과 포상도 아끼지 않았다. 이 같은 이순신의 소통은 제대로 된 조정의 지원도 없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왜군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됐다. 또 이순신이 하옥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었을 때도 그의 부하들은 그를 외면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그의 무죄를 변론하며 충정을 지켰다. 리더들은 진실한 소통을 기반으로 인재들과 함께해야 한다.
둘째, 그는 신뢰를 바탕으로 주변 인재들을 불러 모은 인물이었다. 1597년 음력 8월 3일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조선 수군이 경남 거제도 앞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된 지 보름여 만의 일이다. 당시 그의 곁에는 군관 10여 명이 전부였다. 함선도 없고 군사도 없는 초라한 신세였다. 이대로 전투를 치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평소 이순신의 인품과 애민정신, 리더십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군관들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이순신의 사람들’이 됐다. 또 손인필·이원춘·정사준 등 이순신이 관직을 잃기 전에 그를 모시던 부하들도 다시 그를 따라나섰다. 그 결과 장군은 경남 진주에서 시작해 구례·압록·곡성·순천·보성·장흥 회령포 등을 거쳐 전선 12척을 인수하고 2000여 명의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린 것도 이때의 일이다. 불과 한 달 후 장군은 수군을 재정비해 진도 울돌목에서 일본 수군과 전투를 벌여 기적 같이 승리를 만들었다. 이후 이순신과 그를 믿는 사람들은 힘을 모아 수군 재건에 성공했다. 조선 수군은 단 1년 만에 판옥선 60~70척, 병력 7300여 명의 강군으로 성장했다. 그가 평소 쌓아 둔 신뢰와 리더십을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숨겨진 ‘야전의 멘토’ 정걸 장군
셋째, 이순신은 차별 없이 인재를 등용했고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그는 친분이나 가족 관계, 신분의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사람을 배치했다. 그의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이완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 신분으로 참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순신은 배움의 자세를 갖추고 인재를 대했다. 나이가 무려 서른한 살이나 많은 정걸(丁傑) 장군을 ‘멘토’로 모셨다. 정걸은 이순신이 태어나기 1년 전에 무과에 급제한 그야말로 ‘백전노장의 베테랑’이다. 그는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고 평생을 왜구와 여진족과 싸운 인물이다. 이순신은 해전에 대한 이해가 높고 전라도 지역 문화와 정서에 익숙한 정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순신의 멘토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은 류성룡이지만 전쟁 중 야전에서 실전의 도움을 준 멘토는 정걸 장군이다.
당시 여든이 가까운 나이의 정걸 장군은 이순신의 참모 격인 조방장으로서 부산포 해전 등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배움의 자세로 꼭 필요한 자리에 적합한 인재를 배치해 성과를 올린 이순신 장군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의 인재 경영 리더십은 오늘날의 치열한 기업 환경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경영 여건이 힘들수록 기본을 더 돌봐야 한다. 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인재들과 소통하고 차별 없이 뽑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이순신의 인재 경영을 지금 다시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약력 : 한국 화장품과 제약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은 농협중앙회를 거쳐 1974년 대웅제약에 입사해 부사장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창업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90년 한국콜마를 설립하고 국내 화장품업계 최초로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시스템을 도입해 매출 1조원의 기업으로 키워 냈다. 2017년엔 이순신 리더십을 전파하는 사단법인 서울여해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2호(2019.02.18 ~ 2019.02.24) 기사입니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경영인으로서 첫째 원칙으로 삼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인재 경영’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이다.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은 기업 발전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동시에 경영인들의 가장 큰 보람이기도 하다.
기업 경영에서 ‘인재’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은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충무공 이순신으로부터 배운 교훈 때문이다. 이순신은 우리 역사 속 최고의 리더였다. 그리고 인재를 그 누구보다 중요시한 지도자였다. 그는 이 시대 모든 리더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재 경영’의 진수를 보여줬다. 이순신의 인재 경영을 세 가지로 나눠 살펴보자.
첫째, 이순신은 부하들과 진실한 마음을 나눈 소통의 리더였다. ‘난중일기’를 포함한 각종 기록에는 유독 부하들과 함께한 기록이 많이 등장한다. ‘난중일기’에는 그의 휘하에 있는 1000여 명의 이름이 등장할 정도다. 그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상세하게 기록했다. 주변 사람들과 부하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얼마나 세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부하나 동료들과 바둑과 장기, 활쏘기 등을 함께했다. 어려운 전쟁 중에도 휴식을 취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며 이들을 격려했다. 군막 안 자신의 회의실을 일반 병사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때때로 권위와 격식을 버리고 병사들의 애로 사항과 애환을 경청했다. 부하들이 각종 오해로 파직됐을 때 그들을 위해 호소하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수행하며 고생하는 사람들과 심부름꾼·노비들에게 먹을 것과 빚어 놓은 술을 나눠 주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몸을 던지는 희생도 주저하지 않았다. 학문과 무예에 능한 부하 이의온이 왜적이 쏜 독화살에 맞아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화살을 뽑아낸 다음 직접 입을 대고 독을 빨아냈다고 전해진다. 그 덕분에 이의온은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이의온은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제가 재주는 없으나 외람되이 원수 이순신에게 발탁됐으니 어찌 죽음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이순신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진실한 소통이 ‘승리’의 원동력
이처럼 이순신은 그의 사람들과 진실하게 소통했다.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약점보다 장점과 능력을 우선시했고 칭찬과 포상도 아끼지 않았다. 이 같은 이순신의 소통은 제대로 된 조정의 지원도 없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왜군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됐다. 또 이순신이 하옥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었을 때도 그의 부하들은 그를 외면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그의 무죄를 변론하며 충정을 지켰다. 리더들은 진실한 소통을 기반으로 인재들과 함께해야 한다.
둘째, 그는 신뢰를 바탕으로 주변 인재들을 불러 모은 인물이었다. 1597년 음력 8월 3일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조선 수군이 경남 거제도 앞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된 지 보름여 만의 일이다. 당시 그의 곁에는 군관 10여 명이 전부였다. 함선도 없고 군사도 없는 초라한 신세였다. 이대로 전투를 치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평소 이순신의 인품과 애민정신, 리더십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군관들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이순신의 사람들’이 됐다. 또 손인필·이원춘·정사준 등 이순신이 관직을 잃기 전에 그를 모시던 부하들도 다시 그를 따라나섰다. 그 결과 장군은 경남 진주에서 시작해 구례·압록·곡성·순천·보성·장흥 회령포 등을 거쳐 전선 12척을 인수하고 2000여 명의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린 것도 이때의 일이다. 불과 한 달 후 장군은 수군을 재정비해 진도 울돌목에서 일본 수군과 전투를 벌여 기적 같이 승리를 만들었다. 이후 이순신과 그를 믿는 사람들은 힘을 모아 수군 재건에 성공했다. 조선 수군은 단 1년 만에 판옥선 60~70척, 병력 7300여 명의 강군으로 성장했다. 그가 평소 쌓아 둔 신뢰와 리더십을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숨겨진 ‘야전의 멘토’ 정걸 장군
셋째, 이순신은 차별 없이 인재를 등용했고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그는 친분이나 가족 관계, 신분의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사람을 배치했다. 그의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이완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 신분으로 참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순신은 배움의 자세를 갖추고 인재를 대했다. 나이가 무려 서른한 살이나 많은 정걸(丁傑) 장군을 ‘멘토’로 모셨다. 정걸은 이순신이 태어나기 1년 전에 무과에 급제한 그야말로 ‘백전노장의 베테랑’이다. 그는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고 평생을 왜구와 여진족과 싸운 인물이다. 이순신은 해전에 대한 이해가 높고 전라도 지역 문화와 정서에 익숙한 정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순신의 멘토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은 류성룡이지만 전쟁 중 야전에서 실전의 도움을 준 멘토는 정걸 장군이다.
당시 여든이 가까운 나이의 정걸 장군은 이순신의 참모 격인 조방장으로서 부산포 해전 등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배움의 자세로 꼭 필요한 자리에 적합한 인재를 배치해 성과를 올린 이순신 장군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의 인재 경영 리더십은 오늘날의 치열한 기업 환경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경영 여건이 힘들수록 기본을 더 돌봐야 한다. 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인재들과 소통하고 차별 없이 뽑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이순신의 인재 경영을 지금 다시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약력 : 한국 화장품과 제약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은 농협중앙회를 거쳐 1974년 대웅제약에 입사해 부사장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창업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90년 한국콜마를 설립하고 국내 화장품업계 최초로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시스템을 도입해 매출 1조원의 기업으로 키워 냈다. 2017년엔 이순신 리더십을 전파하는 사단법인 서울여해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2호(2019.02.18 ~ 2019.02.2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