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의 대안으로 부상하는 ‘STO’

[비트코인 A to Z]
-신뢰받는 애플·삼성전자 주식의 가치…증권의 블록체인화는 시간문제일 뿐


(사진) 스마트 콘트랙트의 개념을 정립한 암호학자 닉 사보

[오태민 마이지놈박스 블록체인 연구소장] 사토시 나카모토가 만든 비트코인은 시루떡을 연상시킨다. 층층 쌓아 올리고 가열해 시루떡을 만든다. 새로운 층을 쌓는 권한을 놓고 여러 참가자가 경쟁하는 것이나 10년 동안 만들어 올린 떡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서대로 이어진다는 점이 색다르다.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팥고물을 변경하려면 시루떡 전체를 파괴해야 하므로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다면 내용물을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떡이 짓누르는 압력 때문에 아래층일수록 형태를 변경하기 어려운데 비트코인은 6개 층만 위로 올리면 그 사이에 있는 고물들은 변경할 수 없다고 여겼다. 대략 한 시간이면 영원히 변경할 수 없는 시루떡을 쪄낼 수 있다. 게다가 동일한 시루떡을 지구 곳곳에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압류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이 시루떡 구조를 파악한 일군의 개발자들은 정수형으로 표현되는 비트코인 거래 데이터 외에 텍스트나 이미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를 사이사이 넣어 떡과 함께 찌려고 했다. 변경 불가능한 데이터를 원할 때 어디에서나 조회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어디까지 바뀔 수 있는지를 놓고 몽상과도 같은 논쟁을 즐겼다. 아무튼 블록체인과 관련해 새로운 개념이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변하면 안 되는 데이터를 사이에 넣고 떡과 함께 쪄낸다는 원형은 블록체인 상상력의 근간이다.

마스터코인은 다양한 정보를 비트코인 블록체인에 삽입하는 프로젝트로 시작했다. 하지만 암호화폐 공개(ICO)의 시초로 더 유명하다. 2013년 1개의 비트코인을 100개의 마스터코인(MSC)과 교환해 줬다. 비트코인은 당시 의미 있는 시장가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스터코인은 사실상 달러로 투자를 받은 셈이었다. 이 과정을 유심히 지켜본 18세의 비탈릭 부테린은 비트코인을 통해 개발 자금을 그러모을 수 있다고 확신했고 결국 ICO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이더리움이라는 플랫폼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마스터코인은 옴니레이어로 이름을 바꿨다. 달러 연동 토큰인 테더가 옴니레이어에서 발행된다. 테더를 시작으로 다양한 주체들이 달러 연동 토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일본은 최근 엔화 고정 코인을 비트코인과 연계해 발행하는 시험 프로젝트도 허용했다.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을 만회하기 위해 달러 연동 토큰이 고안됐다면 ICO 토큰이 보장하는 실물 권리가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증권형 토큰 발행(STO)이 부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최초의 ICO’ 기록 세운 마스터코인

달러에 가치가 고정된 토큰이나 기업의 지분을 보장하는 토큰이나 블록체인의 초창기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비트코인은 암호학자 닉 사보가 주창한 스마트 콘트랙트를 실현하는 도구로서 개발됐다. 스마트 콘트랙트는 제삼자 보증 없이 자동으로 이행되는 계약이다. 제삼자는 주로 법원이나 금융회사를 의미한다. 닉 사보는 렌터카의 전자키를 예로 들었다. 계약 기간이 완료되거나 계약 조건을 위배했을 때 하나밖에 없는 전자키가 자동 이전됨으로써 더 이상 렌터카의 시동을 걸 수 없는 식이다.

블록체인 자체로는 토큰의 가격을 달러나 실물 가치에 고정할 수 없다. 달러 청구를 감당해 낼 금융회사가 필요하고 회사의 잔여 청구권인 것을 확인해 줄 사법 당국이 필요하다. 분쟁이 발생하면 권위를 가진 제삼자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보장형 토큰이다. 따라서 비트코인 이상론자들일수록 보장형 토큰에 시큰둥하다. 그렇다고 해서 증권을 블록체인 기반으로 발행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블록체인의 속성 때문에 달러나 증권을 넣어 시루떡을 만들면 생각하기 어려운 변화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쩌면 비트코인의 확산을 우려했던 정부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일 수 있다.

‘증권형 토큰’에 매력 느끼는 월가

증권을 블록체인에 올리는 것은 주식을 인터넷에서 거래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증권을 종이 형태로 소유하고 거래하는 경우는 드물다. 실물은 예탁원에 맡겨 놓고 정수형 전자 데이터를 거래하는 것에 투자자들은 이미 익숙하다.

다만 전자화됐다고는 하지만 주식이나 채권은 종이 증서의 자취가 강하게 남아 있어 규제 기관이 관할하는 중앙화된 플랫폼 위에서만 보관되고 거래될 수 있다. 규제 기관은 전자 데이터와 실물 증서를 연계해 준다는 명분으로 통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증권이 블록체인으로 발행되면 종이 증서에 대한 전자적 권리물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블록체인 토큰은 무한히 나눠진다. 전자 서명을 이용해 토큰을 동결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권리를 분할할 수 있다. 증권형 토큰은 실물 증권을 자신의 스마트폰에 직접 보관하는 것과 유사하다. 금융회사가 모든 서버를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사용자 간의 직거래를 막을 수 없다. 사실상 다국적기업들에 대한 잔여 청구권이 유력한 글로벌 화폐로 쓰이게 된다는 의미다.

어떤 나라에서는 자국의 화폐보다 삼성전자나 애플의 주식이 더 신뢰를 얻을 수도 있다. 오늘날 가장 취약한 증서는 자제력 없는 정부들이 발행한 종이돈이다. 하지만 망가진 정부의 국민에게도 삼성이나 애플은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이라는 실체로 다가온다. 이를 감지했는지 중국 정부는 STO를 엄격하게 금지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물론 한 기업의 증권형 토큰이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의 지위를 위협한다고 느끼면 미국 정부는 그 토큰의 태환을 막아 하루아침에 무의미한 코드로 추락시킬 수 있다. 규제 기관이 비트코인에 대해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애플이나 아마존의 증권형 토큰에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의 금융 관료들은 비트코인보다 증권형 토큰에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자국의 문란한 통화를 국민에게 강요해 온 많은 정부들은 곤란에 처한다. 비트코인은 튤립을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행위로 호도라도 할 수 있었지만 토큰화된 애플 증권을 암암리에 화폐처럼 쓰는 것을 막는 합리적인 논리를 개발하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돋보기] ICO와 STO
정부들의 강력한 대응과 사기성 프로젝트의 만연 때문에 2018년 말부터 암호화폐 공개(ICO) 시장이 급격하게 둔화되고 있다. 2018년 ICO 모금액은 215억 달러로 2017년 65억 달러 대비 330%나 증가했었다. 하지만 2019년 1월 한 달 동안 3억 달러를 넘지 못했는데 월별 추산으로 2017년 5월 이후 가장 낮았다. 또한 2018년 집행된 ICO 중 58%가 모금에 실패했거나 그나마도 투자금을 돌려줬다.

증권형 토큰 발행(STO) 시장에 대한 유의미한 통계치는 없다. 하지만 증권형 토큰을 선도하는 폴리매스는 2년 안에 10조 달러 시장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런 낙관적인 시장 전망의 근거는 미국을 비롯한 규제 당국들이 ICO와 달리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STO는 규제 기관과의 협력을 전제로 진행된다. 미국에서는 모금액이나 자금 모금 대상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번거로운 허가 절차를 생략할 수도 있다. 다만 토큰도 증권이기 때문에 회사 장부의 감사와 공개·보유가 의무이고 증권 관련 세법의 적용을 받는다. 또한 토큰 발행과 유통 과정에서 자금 세탁 방지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

신규 증권을 블록체인 토큰으로 발행해 자금을 모금하는 STO에 대해서는 정부들마다 각기 다르게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존의 증권이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거래되는 흐름은 가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점의 문제일 뿐이다. 특히 나스닥을 비롯한 주요 기관들의 대비 태세로 볼 때 그 시점도 예상보다 이를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4호(2019.03.04 ~ 2019.03.1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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