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 장사’는 옛말…입김 세진 신용평가사들

[비즈니스 포커스]
-엄격해진 등급 판정에 기업들 노심초사…4~6월 정기 평정 결과에 촉각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아시아나항공의 ‘회계 쇼크’를 계기로 국내 자본시장에서 신용 평가사들의 역할이 주목 받고 있다. 회사채와 자산유동화증권(ABS) 등 시장성 차입이 증가함에 따라 신용 등급을 평가하는 신평사들의 입김 또한 덩달아 세지는 분위기다.


신용을 평가하는 ‘신평사’는 평판을 먹고산다고 할 수 있다. 신평사가 제공하는 ‘신용 등급’은 자본시장의 주요 인프라로서의 역할이 크다. 기업이나 공공 기관이 자금 조달 방법으로 채권을 발행하기로 결정하면 신평사는 ‘신용 등급’을 통해 그 채권의 발행 주체가 채권 만기일까지 원리금을 갚을 수 있을지 평가하는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는 한국기업평가·한국신용평가·나이스신용평가 등 3사가 전체 시장의 약 99% 정도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중 한국신용평가는 글로벌 3대 신용 평가사 중 하나인 무디스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고 한국기업평가 또한 글로벌 3대 신평가인 피치의 지분율이 73.55%다. 나이스신용평가는 나이스홀딩스의 100% 자회사다.

◆ 회사채 등 시장성 차입 증가, 신평사들 영향력도 UP


국내 신용 평가 제도는 ‘B’ 등급 이상의 신용 등급을 받은 기업만 기업어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행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무보증 사채를 인수하기 위해서는 금융위원회의 허가를 받은 2개 이상의 평가 기관으로부터 신용 평가를 받은 유가증권만 인수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기업이나 공공 기관에서 회사채와 ABS 등을 공모로 발행하려면 무조건 신평사에 의뢰해 채권 등급을 받아야 한다. 대부분은 평가된 신용 등급에 맞춰 채권 발행 금리가 정해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최근 아시아나항공의 사례다. 지난해 11월 시행된 ‘신 외부감사법’으로 외부감사인의 기업회계 감사가 한층 더 까다로워진 상황에서 아시아나항공이 감사 보고서 한정 의견을 받아들며 촉발된 ‘회계 쇼크’가 그룹 전체 위기로 번졌다. 아시아나항공은 재감사를 통해 감사 의견을 적정으로 정정한다고 공시했지만 외부감사인이 지적한 수정 사항을 반영하면서 회계상 재무 수치가 더욱 악화됐다.


신평사들은 회계 정보에 대한 신뢰도 하락, 재무제표 악화, 유동성 위험 등을 고려해 아시아나항공의 신용 등급 하향 조정을 검토하고 나섰다. 문제는 현재 ‘BBB-’인 아시아나항공의 신용 등급이 떨어지면 1조원이 넘는 ABS를 조기 상환해야 하는 트리거 조항(일정 차입 상환에 문제가 생기면 리스 채무 투자자들이 조기 상환을 요청할 수 있는 조항)이 발동한다는 것이다. 회계 쇼크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유동성 위기로 확대된 것이다. 아시아나항공으로서는 어떻게든 ‘BBB-’ 등급 이상의 회사채를 추가로 발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최근 기업들의 눈은 신평사의 4~6월 정기 평정에 쏠리고 있다. 신평사들의 판정이 예년보다 까다로워지면서 ‘등급 하향 조정 기업’이 예전보다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최근 신평사들의 리포트만 보더라도 등급 하향 조정 요인을 많이 두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추세다.


최근 신평사들이 온라인 경쟁 격화에 대해 부정적인 시그널을 계속 주고 있는 롯데쇼핑은 현재 신용 등급이 ‘AA+’지만 등급 하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2012년 이후 줄곧 ‘AAA’ 등급을 받아왔던 현대차도 지난 2월 국내 신평사 모두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꾸며 등급이 내려갈 가능성이 높게 거론된다. 이 밖에 LG전자는 한국기업평가로부터 ‘AA’ 등급을 받았지만 등급 하향 요인이 여러 개 추가돼 눈길을 끌었다. 국내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당장 신용 등급이 하락한다고 해서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는 곳은 드물 것으로 보이지만 자본시장에서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기업들로서는 신평사들의 등급 판정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불과 4~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평사는 기업의 돈을 받고 ‘등급 장사’를 한다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평가사들이 제공하는 이슈 리포트나 산업 전망 등 각종 분석 자료는 신용 등급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국내 채권시장에서 신평사 보고서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내 한 신평사 관계자는 “예전에 비해 신평사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시장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신평사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점에서 고무적이고 책임감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관심이 높아진 만큼 과거와 비교해 신평사 보고서를 발표하는 횟수도 늘고 내부 인력들의 역량 또한 높아졌다. 인력도 꾸준히 늘려가는 분위기다. 애널리스트의 경우 4~5년에 비해 2배 정도 인력이 늘었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오히려 최근에는 시장이 신평사 보고서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을 보여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다”며 “증권사의 채권 애널리스트는 ‘투자’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과 신평사 애널리스트가 기업을 평가하는 것은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관점의 차이를 시장에서 이해하고 ‘균형’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진화하는 신용 평가 모델


김필규 자본시장 선임연구위원은 “전에 비해 신평사들의 등급 판정이 엄정해지기도 했고 신평사들에 대한 시장의 신뢰도가 많이 좋아지고 있다”며 “2013년 동양 사태를 계기로 규제가 강화되기도 했고 신평사들 또한 내부적으로 노력을 많이 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국내에 신용 평가 제도가 도입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당시 신평사의 업무는 기업을 상대로 영업과 기업 평가가 동시에 이뤄지는 구조로 돼 있었다. 일반적으로 팀장 1명이 5~6명의 애널리스트와 함께 일하는 시스템이었는데 팀장이 기업을 돌아다니며 영업을 하면 시니어 애널리스트가 신용 평가 업무를 배분해 팀원들이 기업을 평가하는 식이다.

문제는 신평사들이 신용 평가를 의뢰한 기업체로부터 수수료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신평사로서는 일감을 주는 기업에 나쁜 등급을 주기 어려웠다. 채권을 발행하는 회사로부터 ‘평가에 박하다’는 인상을 주면 언제든 다른 신평사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케케묵은 관행이 지속되다 터진 사건이 ‘동양 사태’였다. 신평사들이 기업의 신용 등급을 실제와 다르게 부풀리기한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이후 금융 당국은 신용 평가사들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일련의 규제 강화를 진행해 왔다. 신평사 규제 체계를 2013년 ‘자본시장법’으로 이관하고 신평사들의 평가 결과, 평가 방법, 부도율 등 신용 평가의 적정성을 보여주는 지표를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등 행위 규제 등을 강화했다. 영업 부서와 리서치 부서 간 방화벽을 강화한 것도 ‘예스맨’이었던 신평사들의 변화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현재 국내 3대 신용 평가사 중 2곳은 글로벌 신용 평가사들의 자회사인데 이 또한 이해 상충을 줄이기 위해 외국계 신평사 중심으로 재편한 결과다.


국내 한 신평사 관계자는 “글로벌 신평사들 대부분이 영업 조직과 평가 조직을 분리하고 있다”며 “국내에서도 이와 같은 체제가 자리 잡아 영업 조직이 실무 부서의 의견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규제 강화에 따른 가장 큰 변화는 어떤 기업에 등급 평가를 내릴 때 그 근거를 구체적으로 적시하도록 한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신평사들 내부적으로도 자체적인 평가 모델을 개발하거나 기업의 신용 등급을 평가하는 프로세스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등 개선 노력이 컸다”고 말했다. 특히 ‘펀더멘털 평가’를 강화하는 노력이 최근에 긍정적으로 반영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 연구위원은 이 밖에 신용 평가사들의 역할에 대한 기업들의 이해도가 높아진 것 또한 주요한 이유로 짚었다. “동양 사태 이전에는 기업들이 신용 평가사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등급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신용 평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높아지면서 기업들도 등급과 관련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이 현저히 줄어드는 등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vivajh@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2호(2019.04.29 ~ 2019.05.0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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