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경, 비누로 시작해 화학·항공까지…‘한국형 내실경영’의 살아있는 교과서
입력 2019-06-19 07:53:06
수정 2019-06-19 07:53:06
[커버스토리=재계 떠오르는 ‘네 마리 용’=애경그룹]
-채형석 부회장 중심 2세대 경영 안착…‘철저한 시장 분석’이 경쟁력
[한경비즈니스=김정우 기자] 애경그룹은 현재 지주사인 AK홀딩스를 중심으로 생활용품·화장품, 화학, 항공운송, 백화점, 부동산 등 5개 부문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국내외를 모두 합쳐 거느린 계열사는 46개다. 모든 계열사의 자산총액을 합치면 약 5조2000억원에 달해 지난 5월 공정거래위원회의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집단)에 지정됐다.
올해 1분기 매출액 기준으로 사업 비중을 살펴보면 화학과 항공운송 부문이 그룹의 주축 역할을 말고 있다. 생활용품·화장품 부문과 부동산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며 그룹의 실적 개선을 뒷받침하고 있는 가운데 백화점 부문에서만 다소 성장이 더딘 상황이다.
애경의 그간 행보를 들여다보면 무리하게 외형을 넓히기보다 내실 있는 사업 확장에 주력하며 서서히 외연을 확장해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1954년 설립과 함께 비누 생산 판매를 시작하며 성장 기반을 마련했다.
이로부터 약 20년 후인 1970년대 들어 화학 부문에 진출하며 첫 사업 확장에 나선다. 1990년대에는 백화점 사업에 발을 내디뎠고 2000년대 항공과 부동산 개발 등으로 손을 뻗치며 현재에 이른다. 그만큼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기까지 오랜 고민과 철저한 시장 분석을 마친 뒤 결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경의 이 같은 신중한 경영전략은 1970년대 석유파동, 1990년대 외환위기 등 국내를 덮친 수많은 악재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비결로 꼽힌다.
◆설탕 대신 선택한 비누로 기틀을 다지다
그룹의 뿌리는 생활용품·화장품 부문의 사업을 담당하는 애경산업이다. 1954년 창업자 고(故) 채몽인 사장이 비누 생산을 목적으로 애경유지공업을 설립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그 과정도 흥미롭다. 채 창업자는 애경을 만들 때 이미 국내를 대표하는 사업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1945년 대륭양행이라는 무역회사를 만들어 한국을 대표하는 무역 업체로 키워낸 주인공으로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본격적인 사세 확장을 꾀하던 채 창업자는 제당 사업과 유지 사업을 놓고 고민한다.
제당 사업은 당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산업 육성책 중 하나였다. 여기에 힘입어 든든한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제일제당이라는 거대 업체가 시장에 진출해 선점하고 있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반면 비누를 만드는 유지 사업은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었고 향후 성장 가능성도 밝아 보였다. 전쟁 직후였던 터라 국내 유지공업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전국의 200여 개 영세 업체가 조악한 품질의 비누를 생산하는 실정이었다.
대부분의 가정이 품질이 나쁜 비누 또는 양잿물을 사용하는 불편을 겪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비누를 새 사업 아이템으로 정하고 애경그룹의 전신인 애경유지공업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가장 먼저 공장을 확보하고 시설 보수를 진행하는 등 1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마침내 1954년 회사의 설립 등기를 마치고 세탁비누를 처음으로 공장에서 만들어 판매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창업 첫해인 1954년 세탁비누 23만5996개를 생산해 13만7061개를 판매하는 호황을 누린다. 국내 비누 시장이 공급에 비해 수요가 턱없이 부족해 가능했던 일이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듬해부터 비누 제품을 더 다양화해야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내부에 자체적인 연구실을 설치하며 독자적인 생산 기술 확보에 주력했다.
노력 끝에 1956년 마침내 그 결과물을 내놓았다. 국내 최초의 화장비누인 ‘미향’을 출시하며 새로운 비누 시장을 개척했다. 다소 생소한 제품인 만큼 미향비누는 서서히 입소문을 타다 마침내 대박을 터뜨렸다.
1958년 월 100만 개가 판매되는 성과를 냈다. 당시 인구나 경제 규모로 볼 때 단일 제품이 한 달에 100만 개 팔리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미향비누의 성공과 함께 애경 역시 회사 이름을 널리 알리는 등 생활용품 기업으로서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이런 애경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인 것이 바로 주방 세제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트리오’다. 애경이 1966년 국내 최초의 주방 세제로 시장에 출시한 제품이다. 50년 넘게 지난 현재도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며 애경을 대표하는 제품이 됐다.
1960년대 주부들은 설거지할 때 양잿물·쌀뜨물·모래·흙 등을 사용하며 그릇을 씻었다. 애경은 비누에서 쌓아 올린 기술력을 토대로 숱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트리오를 만들어 냈다.
그릇은 물론이고 채소나 과일까지 세 가지를 모두 씻을 수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트리오였다. 전에 없던 제품을 내놓은 효과는 엄청났다. 단숨에 주방 세제 시장을 만들고 사실상 독점하며 ‘국내 최고의 세제 회사’로 불리게 됐으며 신사업 진출의 여력도 마련했다.
◆위기 속에서 키운 화학 사업으로 본격 성장
물론 오랜 역사 속에서 계속 순항했던 것만은 아니다. ‘위기는 예고 없이 다가온다’고 했다. 회사의 수장이던 채 창업자가 1970년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애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기대’에서 ‘우려’로 뒤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남편의 뒤를 이어 경영권을 쥐게 된 장영신 현 회장은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하며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을 증명해 냈다. 특히 그는 과감한 결정을 통해 화학 사업을 회사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으며 전진해 나갔다.
어떻게 보면 ‘승부수’를 던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만큼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수장의 교체와 함께 당시 석유파동(1973년)까지 겹치며 대내외로 악재가 이어졌다. 이때 경영권을 쥔 장 회장은 그룹의 새로운 미래가 화학 사업에 있다고 확신했다.
미국 유학 시절 화학을 전공한 그는 향후 화학 분야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더욱이 애경 역시 비누 제조를 위해 이미 화학 분야에 대한 나름의 전문성도 갖추고 있던 상태였다.
장 회장은 이를 확대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면 승산이 있다고 분석하며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다. 해외 기업들과 접촉해 기술을 제휴하고 울산과 대전 등에 공장을 설립했다. 이때 진행했던 투자는 현존하는 애경유화·애경화학·에이케이켐텍 등 애경의 막강 화학 계열사가 존재하는 주춧돌이 됐다.
또한 재계에서는 장 회장이 화학 부문에 힘을 준 이후부터 애경의 본격적인 성장사가 시작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더욱 다양한 제품과 이를 담는 용기 등을 만들어 내는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화학 부문에서의 기술 발전에 힘입어 애경은 세제를 넘어 보다 다양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1985년 애경유지를 지금의 애경산업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단순히 세제를 생산하는 기업에서 벗어나 다양한 뷰티 생활용품을 만드는 기업으로 새 출발하겠다는 목표를 담은 것이다.
이후 애경산업은 화장품·샴푸·치약 등으로 제품군을 점차 확대하며 이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생활 뷰티’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실적에서도 나타난다. 애경산업은 지난해 화장품 사업 성장에 힘입어 약 7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이 중 화장품 사업은 전년 대비 32% 성장한 약 3600억원을 기록하며 전체 매출의 절반을 넘어선 상태다. 계속 새로운 브랜드 출시와 해외시장을 공략하며 화장품 사업을 확대할 예정이다.
◆항공 산업의 높은 진입 장벽을 넘다
화학과 생활용품·화장품 부문에서 거둔 성과를 기반으로 애경의 사업 확장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993년 애경백화점 구로점(현 AK플라자 구로본점)을 오픈하는 등 유통 사업으로까지 외연을 넓혔다. 기업 이미지 제고와 함께 내부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의 판로를 보다 수월하게 확대하겠다는 계획이 깔려 있었다.
이처럼 애경은 계속 주력 사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분야로 하나둘 사업을 늘리며 나름의 신사업 성공 방정식을 구축해 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이런 방식을 과감하게 깨부수며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2005년 항공운송 사업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애경의 항공 사업 진출 결정은 2세대 경영의 막이 오르며 시작됐다. 장 회장은 애경그룹이 창립 50주년을 맞은 2004년 경영에서 물러났다. 그 바통을 아들인 채형석 애경 총괄부회장이 넘겨받으며 새롭게 꽃피운 사업이 제주항공을 필두로 한 항공운송 사업이다.
최근 애경을 얘기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항공운송 사업일 정도로 계열사인 제주항공을 대한항공·아시아나와 견출 만한 항공사로 키워냈지만 성공이 있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사실 출발부터 무모하다는 시각이 주를 이뤘다.
수천억원에 달하는 비행기를 운항하는 만큼 항공 산업의 진입 장벽은 높다. 따라서 사업 진출을 위해 많은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채 부회장은 당시 국내에 개념조차 생소했던 ‘저비용 항공사(LCC)’로 승부수를 던졌다.
제주항공은 야심차게 출범했지만 우려는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항공사라고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애경이 비행기를 띄운다고 하자 자연스럽게 ‘과연 안전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또 싼 맛에 제주항공을 이용했던 이들도 좁은 ‘좌석이 불편하다’, ‘서비스가 안 좋다’고 평가하며 외면했다. LCC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던 때문에 터져 나온 불만들이었다.
적자가 이어졌고 안팎에서 항공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이어졌지만 채 부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고 더 많은 투자와 다양한 마케팅 전략, 신규 서비스 등을 도입하며 LCC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키기 위한 전략들을 펼쳐나갔다.
이런 노력이 빛을 발하며 제주항공은 2011년 마침내 만성 적자에서 벗어나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에도 급격한 성장을 이어 가며 국내를 대표하는 LCC로 떠올랐다.
현재 실적 추이로 볼 때 제주항공은 조만간 화학 부문을 뛰어넘어 애경의 새로운 ‘캐시카우’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가운데 애경은 항공업계에서의 위상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매물로 나온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도 뛰어든 상태다.
결과야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만약 인수에 성공한다면 항공업계 1인자 자리까지 넘볼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바라보고 있다.
▶돋보기
면세점까지 포기하며 움켜쥔 제주항공
애경이 제주항공을 키워내는 대신 잃은 것도 있다. 면세점 사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애경은 2000년 ‘유통 사업 다각화’라는 중·장기 경영전략을 세우고 유통업 확대에 나섰다. 당시 수원 민자 역사 기공식을 시작으로 애경백화점 수원점의 추가 출점 그리고 면세점 사업권까지 따냈다. 특히 면세점은 내부에서 가장 기대를 모으는 사업 중 하나였다.
2001년 인천공항 개항과 동시에 공항 내부에 AK면세점을 오픈했고 김포공항 삼성동 코엑스 등에서 총 3개의 면세점을 운영했다. 하지만 2005년 출범한 제주항공이 계속 적자를 이어 가면서 2009년 결국 면세점을 롯데그룹에 매각했다. 당시 매각 가격은 2800억원. 면세점업계에서 최고 입지로 주목받았던 삼성동 코엑스 면세점까지 포기하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런 애경의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매각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애경은 제주항공에 추가 항공기를 도입하고 마케팅과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렇게 제주항공은 애경의 든든한 주력 계열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계속 면세점 사업을 이어 갔더라면 어땠을까. 최근에 여러 면세 사업자가 시장에 진입하며 전반적으로 면세점업계의 상황이 녹록하지 않은 만큼 쉽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돋보기
채형석 부회장, 애경에 새로운 ‘색’을 입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은 현재도 계속 직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경영에서는 사실상 손을 내려놓았다. 그의 장남인 채형석 총괄부회장이 애경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채 부회장은 1960년생으로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보스턴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마쳤다.
1985년 애경산업 감사로 입사해 애경백화점 수원점 대표, 애경유지공업 대표 등을 거쳐 2002년부터 그룹 총괄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경영권을 잡기 전 애경의 유통업 진출을 주도한 바 있다.
회사를 이끌게 된 이후에는 제주항공을 키워 저비용 항공사(LCC)업계 1위로 만들었고 애경개발을 설립하고 레저와 부동산 개발에 발을 뻗기도 했다. 2017년 사업 부문 체제를 폐기하고 애경을 지주사 중심의 수직 계열화 체제로 전환시킨 것도 그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지난해에는 서울 홍대에 새 사옥을 마련하고 흩어져 있던 여러 계열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를 통해 ‘제2의 창업’을 내세우며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옥 이전 당시 채 부회장은 직원들에게 “2018년 새로운 홍대 시대를 열어 보다 젊고 트렌디한 공간에서 퀀텀 점프하자”면서 “쾌적하고 효율적인 근무 환경에서 임직원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기 기대하며 훗날 홍대 시대 개막이 애경그룹의 새로운 도약의 시작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지주사 AK홀딩스는 채 부회장과 함께 안재석 사장이 대표이사로 앉아 있다. 안 사장은 1968년생으로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AK홀딩스 기획팀장, 애경그룹 경영지원실 상무 등을 거쳐 2017년 지주사 전환 당시 사장에 올랐다. 채 부회장의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그룹 경영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
주요 계열사의 사장도 눈에 띈다. 애경산업은 장 회장의 차남인 채동석 부회장이 맡아 이끌고 있고 애경화학은 문상철 부사장이 수장이다. 핵심 계열사로 떠오른 제주항공은 현재 이석주 사장이 단독으로 맡아 진두지휘 중이다.
enyo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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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9호(2019.06.17 ~ 2019.06.23) 기사입니다.]
-채형석 부회장 중심 2세대 경영 안착…‘철저한 시장 분석’이 경쟁력
[한경비즈니스=김정우 기자] 애경그룹은 현재 지주사인 AK홀딩스를 중심으로 생활용품·화장품, 화학, 항공운송, 백화점, 부동산 등 5개 부문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국내외를 모두 합쳐 거느린 계열사는 46개다. 모든 계열사의 자산총액을 합치면 약 5조2000억원에 달해 지난 5월 공정거래위원회의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집단)에 지정됐다.
올해 1분기 매출액 기준으로 사업 비중을 살펴보면 화학과 항공운송 부문이 그룹의 주축 역할을 말고 있다. 생활용품·화장품 부문과 부동산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며 그룹의 실적 개선을 뒷받침하고 있는 가운데 백화점 부문에서만 다소 성장이 더딘 상황이다.
애경의 그간 행보를 들여다보면 무리하게 외형을 넓히기보다 내실 있는 사업 확장에 주력하며 서서히 외연을 확장해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1954년 설립과 함께 비누 생산 판매를 시작하며 성장 기반을 마련했다.
이로부터 약 20년 후인 1970년대 들어 화학 부문에 진출하며 첫 사업 확장에 나선다. 1990년대에는 백화점 사업에 발을 내디뎠고 2000년대 항공과 부동산 개발 등으로 손을 뻗치며 현재에 이른다. 그만큼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기까지 오랜 고민과 철저한 시장 분석을 마친 뒤 결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경의 이 같은 신중한 경영전략은 1970년대 석유파동, 1990년대 외환위기 등 국내를 덮친 수많은 악재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비결로 꼽힌다.
◆설탕 대신 선택한 비누로 기틀을 다지다
그룹의 뿌리는 생활용품·화장품 부문의 사업을 담당하는 애경산업이다. 1954년 창업자 고(故) 채몽인 사장이 비누 생산을 목적으로 애경유지공업을 설립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그 과정도 흥미롭다. 채 창업자는 애경을 만들 때 이미 국내를 대표하는 사업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1945년 대륭양행이라는 무역회사를 만들어 한국을 대표하는 무역 업체로 키워낸 주인공으로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본격적인 사세 확장을 꾀하던 채 창업자는 제당 사업과 유지 사업을 놓고 고민한다.
제당 사업은 당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산업 육성책 중 하나였다. 여기에 힘입어 든든한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제일제당이라는 거대 업체가 시장에 진출해 선점하고 있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반면 비누를 만드는 유지 사업은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었고 향후 성장 가능성도 밝아 보였다. 전쟁 직후였던 터라 국내 유지공업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전국의 200여 개 영세 업체가 조악한 품질의 비누를 생산하는 실정이었다.
대부분의 가정이 품질이 나쁜 비누 또는 양잿물을 사용하는 불편을 겪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비누를 새 사업 아이템으로 정하고 애경그룹의 전신인 애경유지공업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가장 먼저 공장을 확보하고 시설 보수를 진행하는 등 1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마침내 1954년 회사의 설립 등기를 마치고 세탁비누를 처음으로 공장에서 만들어 판매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창업 첫해인 1954년 세탁비누 23만5996개를 생산해 13만7061개를 판매하는 호황을 누린다. 국내 비누 시장이 공급에 비해 수요가 턱없이 부족해 가능했던 일이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듬해부터 비누 제품을 더 다양화해야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내부에 자체적인 연구실을 설치하며 독자적인 생산 기술 확보에 주력했다.
노력 끝에 1956년 마침내 그 결과물을 내놓았다. 국내 최초의 화장비누인 ‘미향’을 출시하며 새로운 비누 시장을 개척했다. 다소 생소한 제품인 만큼 미향비누는 서서히 입소문을 타다 마침내 대박을 터뜨렸다.
1958년 월 100만 개가 판매되는 성과를 냈다. 당시 인구나 경제 규모로 볼 때 단일 제품이 한 달에 100만 개 팔리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미향비누의 성공과 함께 애경 역시 회사 이름을 널리 알리는 등 생활용품 기업으로서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이런 애경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인 것이 바로 주방 세제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트리오’다. 애경이 1966년 국내 최초의 주방 세제로 시장에 출시한 제품이다. 50년 넘게 지난 현재도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며 애경을 대표하는 제품이 됐다.
1960년대 주부들은 설거지할 때 양잿물·쌀뜨물·모래·흙 등을 사용하며 그릇을 씻었다. 애경은 비누에서 쌓아 올린 기술력을 토대로 숱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트리오를 만들어 냈다.
그릇은 물론이고 채소나 과일까지 세 가지를 모두 씻을 수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트리오였다. 전에 없던 제품을 내놓은 효과는 엄청났다. 단숨에 주방 세제 시장을 만들고 사실상 독점하며 ‘국내 최고의 세제 회사’로 불리게 됐으며 신사업 진출의 여력도 마련했다.
◆위기 속에서 키운 화학 사업으로 본격 성장
물론 오랜 역사 속에서 계속 순항했던 것만은 아니다. ‘위기는 예고 없이 다가온다’고 했다. 회사의 수장이던 채 창업자가 1970년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애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기대’에서 ‘우려’로 뒤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남편의 뒤를 이어 경영권을 쥐게 된 장영신 현 회장은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하며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을 증명해 냈다. 특히 그는 과감한 결정을 통해 화학 사업을 회사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으며 전진해 나갔다.
어떻게 보면 ‘승부수’를 던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만큼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수장의 교체와 함께 당시 석유파동(1973년)까지 겹치며 대내외로 악재가 이어졌다. 이때 경영권을 쥔 장 회장은 그룹의 새로운 미래가 화학 사업에 있다고 확신했다.
미국 유학 시절 화학을 전공한 그는 향후 화학 분야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더욱이 애경 역시 비누 제조를 위해 이미 화학 분야에 대한 나름의 전문성도 갖추고 있던 상태였다.
장 회장은 이를 확대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면 승산이 있다고 분석하며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다. 해외 기업들과 접촉해 기술을 제휴하고 울산과 대전 등에 공장을 설립했다. 이때 진행했던 투자는 현존하는 애경유화·애경화학·에이케이켐텍 등 애경의 막강 화학 계열사가 존재하는 주춧돌이 됐다.
또한 재계에서는 장 회장이 화학 부문에 힘을 준 이후부터 애경의 본격적인 성장사가 시작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더욱 다양한 제품과 이를 담는 용기 등을 만들어 내는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화학 부문에서의 기술 발전에 힘입어 애경은 세제를 넘어 보다 다양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1985년 애경유지를 지금의 애경산업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단순히 세제를 생산하는 기업에서 벗어나 다양한 뷰티 생활용품을 만드는 기업으로 새 출발하겠다는 목표를 담은 것이다.
이후 애경산업은 화장품·샴푸·치약 등으로 제품군을 점차 확대하며 이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생활 뷰티’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실적에서도 나타난다. 애경산업은 지난해 화장품 사업 성장에 힘입어 약 7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이 중 화장품 사업은 전년 대비 32% 성장한 약 3600억원을 기록하며 전체 매출의 절반을 넘어선 상태다. 계속 새로운 브랜드 출시와 해외시장을 공략하며 화장품 사업을 확대할 예정이다.
◆항공 산업의 높은 진입 장벽을 넘다
화학과 생활용품·화장품 부문에서 거둔 성과를 기반으로 애경의 사업 확장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993년 애경백화점 구로점(현 AK플라자 구로본점)을 오픈하는 등 유통 사업으로까지 외연을 넓혔다. 기업 이미지 제고와 함께 내부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의 판로를 보다 수월하게 확대하겠다는 계획이 깔려 있었다.
이처럼 애경은 계속 주력 사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분야로 하나둘 사업을 늘리며 나름의 신사업 성공 방정식을 구축해 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이런 방식을 과감하게 깨부수며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2005년 항공운송 사업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애경의 항공 사업 진출 결정은 2세대 경영의 막이 오르며 시작됐다. 장 회장은 애경그룹이 창립 50주년을 맞은 2004년 경영에서 물러났다. 그 바통을 아들인 채형석 애경 총괄부회장이 넘겨받으며 새롭게 꽃피운 사업이 제주항공을 필두로 한 항공운송 사업이다.
최근 애경을 얘기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항공운송 사업일 정도로 계열사인 제주항공을 대한항공·아시아나와 견출 만한 항공사로 키워냈지만 성공이 있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사실 출발부터 무모하다는 시각이 주를 이뤘다.
수천억원에 달하는 비행기를 운항하는 만큼 항공 산업의 진입 장벽은 높다. 따라서 사업 진출을 위해 많은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채 부회장은 당시 국내에 개념조차 생소했던 ‘저비용 항공사(LCC)’로 승부수를 던졌다.
제주항공은 야심차게 출범했지만 우려는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항공사라고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애경이 비행기를 띄운다고 하자 자연스럽게 ‘과연 안전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또 싼 맛에 제주항공을 이용했던 이들도 좁은 ‘좌석이 불편하다’, ‘서비스가 안 좋다’고 평가하며 외면했다. LCC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던 때문에 터져 나온 불만들이었다.
적자가 이어졌고 안팎에서 항공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이어졌지만 채 부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고 더 많은 투자와 다양한 마케팅 전략, 신규 서비스 등을 도입하며 LCC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키기 위한 전략들을 펼쳐나갔다.
이런 노력이 빛을 발하며 제주항공은 2011년 마침내 만성 적자에서 벗어나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에도 급격한 성장을 이어 가며 국내를 대표하는 LCC로 떠올랐다.
현재 실적 추이로 볼 때 제주항공은 조만간 화학 부문을 뛰어넘어 애경의 새로운 ‘캐시카우’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가운데 애경은 항공업계에서의 위상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매물로 나온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도 뛰어든 상태다.
결과야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만약 인수에 성공한다면 항공업계 1인자 자리까지 넘볼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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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점까지 포기하며 움켜쥔 제주항공
애경이 제주항공을 키워내는 대신 잃은 것도 있다. 면세점 사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애경은 2000년 ‘유통 사업 다각화’라는 중·장기 경영전략을 세우고 유통업 확대에 나섰다. 당시 수원 민자 역사 기공식을 시작으로 애경백화점 수원점의 추가 출점 그리고 면세점 사업권까지 따냈다. 특히 면세점은 내부에서 가장 기대를 모으는 사업 중 하나였다.
2001년 인천공항 개항과 동시에 공항 내부에 AK면세점을 오픈했고 김포공항 삼성동 코엑스 등에서 총 3개의 면세점을 운영했다. 하지만 2005년 출범한 제주항공이 계속 적자를 이어 가면서 2009년 결국 면세점을 롯데그룹에 매각했다. 당시 매각 가격은 2800억원. 면세점업계에서 최고 입지로 주목받았던 삼성동 코엑스 면세점까지 포기하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런 애경의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매각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애경은 제주항공에 추가 항공기를 도입하고 마케팅과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렇게 제주항공은 애경의 든든한 주력 계열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계속 면세점 사업을 이어 갔더라면 어땠을까. 최근에 여러 면세 사업자가 시장에 진입하며 전반적으로 면세점업계의 상황이 녹록하지 않은 만큼 쉽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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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형석 부회장, 애경에 새로운 ‘색’을 입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은 현재도 계속 직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경영에서는 사실상 손을 내려놓았다. 그의 장남인 채형석 총괄부회장이 애경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채 부회장은 1960년생으로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보스턴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마쳤다.
1985년 애경산업 감사로 입사해 애경백화점 수원점 대표, 애경유지공업 대표 등을 거쳐 2002년부터 그룹 총괄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경영권을 잡기 전 애경의 유통업 진출을 주도한 바 있다.
회사를 이끌게 된 이후에는 제주항공을 키워 저비용 항공사(LCC)업계 1위로 만들었고 애경개발을 설립하고 레저와 부동산 개발에 발을 뻗기도 했다. 2017년 사업 부문 체제를 폐기하고 애경을 지주사 중심의 수직 계열화 체제로 전환시킨 것도 그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지난해에는 서울 홍대에 새 사옥을 마련하고 흩어져 있던 여러 계열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를 통해 ‘제2의 창업’을 내세우며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옥 이전 당시 채 부회장은 직원들에게 “2018년 새로운 홍대 시대를 열어 보다 젊고 트렌디한 공간에서 퀀텀 점프하자”면서 “쾌적하고 효율적인 근무 환경에서 임직원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기 기대하며 훗날 홍대 시대 개막이 애경그룹의 새로운 도약의 시작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지주사 AK홀딩스는 채 부회장과 함께 안재석 사장이 대표이사로 앉아 있다. 안 사장은 1968년생으로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AK홀딩스 기획팀장, 애경그룹 경영지원실 상무 등을 거쳐 2017년 지주사 전환 당시 사장에 올랐다. 채 부회장의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그룹 경영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
주요 계열사의 사장도 눈에 띈다. 애경산업은 장 회장의 차남인 채동석 부회장이 맡아 이끌고 있고 애경화학은 문상철 부사장이 수장이다. 핵심 계열사로 떠오른 제주항공은 현재 이석주 사장이 단독으로 맡아 진두지휘 중이다.
enyo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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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9호(2019.06.17 ~ 2019.06.2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