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닮은꼴' 호주 애들레이드…GM 떠난 자리에 새로운 제조업이 자란다
입력 2019-08-16 13:27:19
수정 2019-08-16 13:29:53
녹슨 도시를 바꾸는 힘, 러스트벨트 극복의 조건 - 호주 애들레이드
완성차 몰락 예측하고 이직 훈련 등 사전 대비
교육산업 기반으로 첨단 제조업 성장
“자동차 제조업의 몰락을 예측했기 때문에 피해가 큰 편은 아니었습니다.” 2017년을 끝으로 호주 자동차 제조업은 자취를 감췄다. 이제 호주에서 생산되는 완성차는 단 한 대도 없고 이에 따라 4만 명이 일자리를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남호주) 주 애들레이드에서 만난 정부·기업·대학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제조업으로의 전환이 준비됐다”고 설명했다.
다른 국가 러스트벨트와 달리 제조업 몰락 후 인구 엑소더스 현상도 없었다. 애들레이드는 오히려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2019년 6월 기준 애들레이드 인구는 140만 명이 넘는다. 2011년 이후 지난 8년간 연평균 인구 성장률은 2.05%다.
애들레이드를 방문한 7월 셋째 주, 시내는 젊은 인파로 붐볐고 거리에도 활기가 넘쳤다. 군산 제너럴모터스(GM) 공장과 비슷한 시기에 마지막 완성차 공장을 철수한 호주는 어떻게 제조업의 몰락에 대비했을까. 호주가 바라보는 미래 성장 동력은 무엇일까.
◆FTA와 환율 강세로 경쟁력 잃어
2017년 10월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남호주)의 주도인 애들레이드에서 카퍼레이드가 벌어졌다. 1500여 대가 넘는 GM홀덴 차들이 도로를 메웠고수천 명의 관중이 참여해 손뼉을 쳤다. 언뜻 보면 축제 현장 같지만 호주 자동차 산업이 막을 내리는 날이었다.
관중들은 GM홀덴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고 그동안 자동차 제조업을 위해 일하던 노동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호주 전역에서 모인 시민이었다.
GM홀덴 엘리자베스 공장에서 20여 대의 버스를 타고 떠나는 노동자들의 마지막 퇴근길을 함께하기 위해 2000km 넘게 떨어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와 퀸즐랜드 주에서도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GM홀덴 생산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한 세기 가까이 이어져 오던 호주 자동차 산업의 역사도 종지부를 찍었다. 2003~2004년 호주의 연간 자동차 생산량은 40만 대에 달했지만 이제 호주 내에서 생산되는 완성차는 단 한 대도 없다.
GM홀덴 공장이 멈추기 한 달 전에는 도요타자동차가 자사 1호 해외 공장이던 호주 알토나 공장을 폐쇄했고 호주 최초 현지 수입차 제조사였던 포드자동차도 2016년 멜버른 공장과 질롱 공장을 철수했다. 미쓰비시자동차는 2008년 마지막 정리 해고를 진행했고 호주에서 자동차 생산을 중단했다.
호주에 마지막 남은 완성차 제조 공장이었던 GM홀덴은 호주인들의 자부심이었다. 1856년 마구(馬具) 사업으로 출발한 홀덴은 세계 대공황이 덮친 1931년 미국 GM에 인수됐다. GM의 자회사였지만 홀덴은 1948년부터 호주 최초의 완성차 생산 업체로 자리매김하며 호주 제조업의 상징이 됐다.
스캇 바첼러 호주제조업노동조합 남호주 자동차 지부장은 “호주인들은 미국 회사 소유인 GM홀덴을 자국 생산물로 여겼고 호주회사로 인식했다”며 “미쓰비시나 포드는 다른 나라에서도 생산됐지만 홀덴은 오직 호주에서만 생산됐으며 호주만의 독자성이 주어졌었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제조업이 전멸해 지역 경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남호주 지역 자동차 공장의 폐쇄로 4만여 명이 일자리를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호주 지역 제조업 붕괴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존 스피어 플린더스대 교수는 “직접 고용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련의 공급 과정에 있던 많은 하도급 업체들과 다른 경제 분야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며 “당시 일자리를 잃었던 3분의 1은 장기간 실직을 겪었고 3분의 1 정도가 파트타임제나 임시계약직으로 일했고 나머지 3분의 1만이 안정적인 직장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호주에서 자동차 제조업이 몰락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호주 정부가 적극적으로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기 시작하면서 수입차에 대한 관세가 낮아지자 현지 생산차의 가격 경쟁력이 점차 하락했다. 호주의 최저임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생산비 절감에 한계가 있던 호주는 FTA 이전 관세로 자국 제조업을 보호해 왔다. FTA 체결로 태국·일본·한국 차들의 관세가 현저히 낮아지자 호주 현지 생산차는 가격 경쟁력을 잃었다.
토니 에반스 호주제조업노동조합 연구원은 “1970년대 호주에서 수입 자동차에 대한 관세는 57.5%였지만 지난 지난 5년간 수입차에 붙은 관세는 5% 정도밖에 안 됐다”며 “태국에서 생산된 자동차 제품에 무관세가 적용됐고 한국이나 일본에서 온 자동차들은 판매 가격이 25%나 떨어졌다”고 말했다.
2017년 이후 호주 완성차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호주의 자동차 최대 수입국은 일본(37%)이고 태국(30%)과 한국(16%)이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는 유례없던 호주 달러 강세가 이어지며 악재가 겹쳤다. 2011년 1호주 달러의 가치가 최고 1.10달러까지 상승했고 2012년까지 상승 기조를 이어 갔다. 그러자 내수 경쟁력을 잃은 ‘메이드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출 경쟁력도 하락했다.
2013년 호주 정부가 보조금 지급 중단을 결정하면서 자동차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호주생산성위원회에 따르면 호주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1997년부터 2012년 사이 정부로부터 약 300억 호주 달러(24조400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 받았다.
하지만 적자가 이어졌고 생산 경쟁력이 하락하자 2013년 들어 보수 정권이 자동차 제조업체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중단했다. 이후 3년 동안 포드·도요타·GM 등 3사가 잇따라 공장 폐쇄 계획을 발표했다.
◆교육·헬스케어·첨단제조업 성장
호주에서 자동차 제조업의 시대는 끝났지만 다시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 중심에 첨단 제조업이 있다.
그동안 자동차 산업 철수에 대한 많은 경고가 주어지면서 정부·업계·노동자들이 모두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정부는 전통 제조업에서 새로운 산업과 첨단 제조업으로의 전환을 준비했고 노조는 GM홀덴 이전 미쓰비시 공장 철수의 실패를 교훈 삼아 대비했다.
GM 공장 폐업 후 실직자들을 위한 재정 지원과 재취업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도 진행됐다. 공급망에 있는 하도급 업체를 위한 금전적인 지원과 교육 프로그램 지원은 연방 정부와 주정부가 도맡았고 GM홀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GM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GM홀덴은 철수 계획을 3년 전부터 발표해 실직자들이 이직할 만한 시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했고 업계와 전문가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자동차 제조 공장의 철수를 예측하고 있었다. 실업수당과 퇴직수당, 보편적 의료 시스템인 ‘메디케어’ 등 호주의 사회 안전망 역시 실직자들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존 카밀로 남호주제조업 노조지부장은 “철수 계획 발표 후 3년 동안 노조와 회사가 노동자들에게 기술 자격증을 받을 수 있게 돕고 홀덴 밖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지원했다”며 “미쓰비시 철수 때와 달리 회사는 노동자들이 이직할 일자리를 찾으면 쉽게 놓아주기로 합의했고 대부분의 노동자가 2017년 전에 이직해 회사를 떠났다”고 설명했다.
또한 노조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든 노동자를 추적해 이직에 성공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2015년부터 다시 호주 달러가 하락하면서 제조업에도 숨통이 트였다. 스피어 교수는 “호주 달러가 하락하면서 제조업 국제 경쟁력이 다시 향상했고 다른 기업들이 직장을 잃은 자동차 노동자를 흡수할 수 있었다”며 “한동안 제조업 일자리가 많이 줄었지만 최근 다시 오르고 있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호주통계청(ABS)이 올 6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호주에서 1분기 제조업 관련 고용이 증가했으며 이는 호주 전체 고용의 6%가 넘는다. 지난 12개월간 제조 관련 일자리는 1만6000개 증가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전통 제조업에서 새로운 산업으로의 전환과 첨단 제조업으로의 전환을 준비했다. 당시 남호주 지역은 자동차 제조업이 쇠락하는 대신 헬스케어·노인복지·교육산업·서비스업 등 다른 산업이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교육 부문의 성장이 컸다.
애들레이드는 인구 140만 명이 살고 있는 도시지만 면적은 서울의 3배다. 시드니나 멜버른 같은 다른 대도시 대비 인구밀도가 낮아 영주권 취득이 유리해 현재 많은 유학생과 이민자들을 그러모으고 있다.
애들레이드 내에만 경쟁력을 갖춘 대학이 3개나 자리하고 있어 교육산업 성장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애들레이드 시내에 자리한 애들레이드대는 1874년 설립돼 개교 이후 노벨상 수상자를 5명이나 배출했다.
그 옆에 자리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대는 남호주 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립대학이고 애들레이드 남부에 자리한 플린더스대는 간호학과 의공학 명문대다. 이 세 대학 모두 정부와 함께 지역사회와 경제를 연구하거나 새로운 산업을 이끄는 주축이 되고 있다.
이처럼 탄탄한 교육산업은 인재 배출과 연구력을 기반으로 다른 산업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애들레이드에서 헬스케어·의료기기·노인복지·서비스업이 성장하고 있는 이유다.
남호주 지역에서 전통 제조업이 쇠퇴하는 대신 다른 제조업 분야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재생에너지·식품·농업·첨단 제조업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인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특히 방위산업과 조선업에 희망을 걸고 있다.
연방정부가 발표한 계획에 따르면 호주 최대 규모 국방 사업인 ‘호주 해군함대 건조 계획(The Naval Shipbuilding Plan)’에 따라 미래형 호위함을 건조하기 위해 남호주 오스본 조선소와 서호주 헨더슨 조선소에 10억 달러(1조2000억원) 이상을 투자한다. 정부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5000명 이상의 증원이 필요하고 관련 인력까지 합치면 2배 이상이 더 필요하다”고 설명한 만큼 남호주에 상당한 경제적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남호주 정부는 2008년 폐쇄한 미쓰비시 공장 부지를 사들여 혁신 단지인 ‘톤슬리 이노베이션 디스트릭트’를 설립하는 등 첨단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생산비와 임금이 높은 만큼 제조업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높은 기술력과 생산성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스피어 교수는 “호주 제조업은 여전히 회복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라며 “한국이나 호주 같은 국가는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할 수 없기 때문에 높은 기술 경쟁력을 가진 나라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호주 애들레이드=김영은 기자, 후원=한국언론진흥재단 kye0218@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7호(2019.08.12 ~ 2019.08.18)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