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도 만든다던 ‘세운상가’, 젊은 창업자 날개 펴는 ‘메이커시티’로

-철거 위기 딛고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새 활기…수십 년 경력 기술자들이 멘토 역할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저성장 시대에 돌입한 한국의 도시는 새로운 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을 안고 있다. 하지만 성장 동력은 신규 산업단지 조성이나 기업 이전으로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때 전성기를 겪었다가 침체됐던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사례도 있다.

1968년 세워진 ‘세운상가’가 도시 재생의 무대로 선정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세운상가는 ‘도심 제조업의 기지’로서 여전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첫째는 여러 업종이 집약돼 있다는 것, 둘째는 몇 십년간 한 가지 분야에 종사해 온 기술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시제품 만드는 창업·예술가의 성지

규모가 큰 사업에는 늘 다양한 이해관계인들의 시각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다시세운 프로젝트 또한 입주사·건물주·토지주·신규 입주민들 간의 시각차가 존재한다.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지난 9월 18일 새 모습으로 단장 중인 세운상가를 찾았다.

세운상가가 자리한 종로3가는 탑골공원을 오가는 어르신과 귀금속상을 방문한 손님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다. 이곳을 오가는 보행 인구는 중·장년층부터 고령층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세운상가 입구에 다가서면 종로3가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유명세를 탄 세운상가의 카페와 맛집을 탐방하러 온 20대 커플들과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논의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세운상가를 찾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안내를 맡고 있는 신성덕 해설사는 “일반 시민들부터 외국인 관광객까지 세운상가를 찾는 이들이 최근 들어 다양해졌다”며 “특히 다시세운 프로젝트는 국내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선두 주자로 서울시 25개구를 비롯한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관심을 갖고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언뜻 보기엔 연차가 오래된 가게들이 즐비한 곳이지만 사실 세운상가는 다양한 업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도심 산업의 생태계를 이루는 곳이다. 박주용 세운협업센터 기술중개소장은 “세운상가는 전자 업종뿐만 아니라 기계 가공·인쇄·목공 등 다수의 업종이 밀집돼 있어 하나의 제품을 만들 때 필요한 모든 소재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세운상가는 과거부터 사업가나 예술가가 창업이나 작품 제작에 필요한 시제품을 가장 저렴한 가격에 소량생산할 수 있는 ‘성지’로 여겨지기도 했다. 탱크부터 미사일까지 못 만드는 게 없다는 말은 결코 허언은 아닌 셈이다.



◆‘기술중개소’로 입주사와 창업가 간 가교 역할

새로 단장 중인 세운상가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기존 입주사들 맞은편에 자리한 검정색 임시건물의 등장이다. 이 건물들의 이름은 ‘세운 메이커스 큐브’로, 서울시가 마련한 청년들의 창업 공간이다. 세운상가 2층과 3층에 자리한 이 공간에는 현재 17개의 팀이 입주해 창업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아무나 이곳에 입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운 메이커스 큐브에 입주할 수 있는 대상은 세운상가와 그 주변의 자원을 활용해 창의 제조 산업에 해당하는 활동을 계획하거나 실행 중인 단체나 기업이다. 선정 결과 초청형 7곳, 공모형 10곳이 입주 기업 또는 단체로 선정됐다. 이 밖에 서울시는 조성 공간에 창업 인큐베이팅, 메이커 교육, 공동 제작소, 부품 도서관, 전자 박물관을 설치해 입주자의 편의를 도모하고 시민들에겐 세운상가의 역할을 널리 알리고 있다.

보행재생·산업재생과 함께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은 공동체재생이다. 세운상가는 새로 이곳에 입주한 청년 창업가들과 기존 입주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세운상가를 아우르는 공동체 의식이 싹트는 것을 장려하고 있다.



하지만 결속력은 단순히 친목을 도모한다고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다시세운 프로젝트는 기존 상인들과 청년 사업가들의 교집합을 ‘기술’에서 찾았다. 세운협업지원센터에 자리한 기술중개소가 이러한 역할을 도맡았다.

세운 기술중개소는 기술적 해법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세운상가의 기술자와 연결해 기술적 문제 해결을 중개하는 코디네이팅 프로그램이다. 일반적으로 산업에서 이야기하는 기술 중개는 지식재산권 거래를 의미했다. 수요자를 직접적인 기술자와 연결해 주는 기술 중개는 현재 세운상가에만 존재한다.

기술중개소는 방대한 업종이 밀집돼 있는 세운상가에서 정작 자신이 원하는 제품에 필요한 기술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맨 처음 찾는 곳이다. 2017년부터 2019년 2분기까지 기술중개소에서는 총 277건의 기술 중개가 시행됐다. 수요가 가장 많았던 것은 시제품 제작(59%)이고 예술(26%)과 창업(16%)이 그 뒤를 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한산해진 세운상가의 문제점 중 하나는 기술을 이어 나갈 젊은이들의 유입이 끊어졌다는 점이다. 박주용 소장은 “기존 세운상가의 기술자들 중 가장 젊은 층이 40대이고 대부분은 50대에서 70대로 이뤄져 있다”고 말한다.

젊은 기술자들의 명맥이 끊어지자 기술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과거엔 실물 크기 모형의 목업(mock-up) 하나를 만드는 데 100만원이 훌쩍 넘었지만 지금은 시중에서 20만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3D 프린터로 얼마든지 모형을 양산할 수 있다. 기술은 빠른 속도로 진화했지만 새로운 세대의 유입이 뜸해진 세운상가는 여전히 과거의 기술을 고집한다. 세상은 디지털 도면으로 이뤄지지만 여전히 세운상가에서는 문서 도면이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박주용 기술중개소 소장은 기술중개소가 두 계층 간의 간격을 좁히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청년 창업가들이 세운상가 기술자들에게 배운 기술을 최신 기기에 적용해야 ‘산업지구’로서 세운상가가 새로운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정 거래처의 일감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기술자들이 새로 등장한 ‘뜨내기’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주는 것을 꺼리지는 않을까. 박주용 소장은 기술 중개가 세운상가 입주자들에겐 신규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창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다면 청년 창업가들이 세운상가를 활성화하는 신규 고정 거래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기술은 아닐지라도 최적의 기술을 찾을 수 있는 세운상가는 청년 사업가들에게도 꼭 필요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마이스터’ 지정으로 입주자 대우 나서

이에 따라 세운상가 잠재력의 원천인 ‘기술자들’에 대한 선제적인 공경과 대우는 꼭 필요했다. 서울시는 지역 조사와 인터뷰, 기술 검증과 심사를 거쳐 2017년 ‘세운 마이스터’를 선정해 인증식을 진행했다. 이들은 한 분야에서 최소 20년 이상의 경력을 쌓은 세계적 기술 장인이다. 지금은 본인들의 고유 업무 외에도 청년 메이커들의 기술 멘토로도 활동 중이다.

40년간 세운상가를 지켜온 ‘정음전자’의 변용규 엔지니어도 ‘마이스터’ 중 한 명이다.
1980년부터 세운상가를 지켜 온 정음전자는 세운상가에 드리운 많은 변화를 몸소 겪고 있다. 현재 변 엔지니어는 세운상가의 마이스터들이 주도해 결성한 ‘수리수리협동조합’에서 전기전자 분야의 수리를 도맡고 있다.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공동체 재생의 일환인 수리수리협동조합은 기술 장인의 경쟁력을 강화하며 세대 간 협업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부품을 구하기도 힘든 오래된 전자 제품의 수리를 원하는 이들이 수리수리협동조합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세대 간 가교 역할도 수행한다. 변 엔지니어는 “조합에서 오디오 기기를 고치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모집해 기술을 알려줬다”며 “젊은 사람들이 내 기술에 관심 있어 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고 말했다.

최근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둘러싼 논란 중 하나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우려다. 다시세운 프로젝트로 재정비된 세운상가가 SNS를 통해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이곳을 찾는 유동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주말이면 세운상가 내부의 카페나 맛집의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다.

하지만 유입된 인구가 세운상가 상인들의 수익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세운상가의 산업군은 B2C보다 B2B의 성격을 갖고 있고 업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 간 거래가 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날 상가를 방문해 만난 입주사 사장님들도 매출 향상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손사래를 쳤다.

올해부터 삼풍상가·호텔PJ·인현상가·진양상가 일대와 중구의 인쇄 골목을 아우르는 지역을 재정비하는 다시세운의 2단계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보행 데크가 을지로 일대까지 연결된다면 그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수많은 인파가 세운상가를 찾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입주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울시는 고민을 지속했다.

고민의 결과로 2016년 세운상가, 2017년 청계상가·대림상가를 대상으로 상가 소유주 대표, 임차인 대표, 서울특별시장 간 ‘지역 활성화 및 발전을 위한 상생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의 제반 규정을 준수하고 현 임차인의 영업 보장을 계약일로부터 5년으로 정했다. 이는 국내 최초, 사업 추진 단계에서 체결한 상생 협약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물론 협약이 젠트리피케이션을 절대적으로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시장의 흐름이 세운상가만 피해 갈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세운상가는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으로 성과를 내리기엔 다소 이른 시기라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조남준 서울시 도시재생실 역사도심재생과장
“2만여 명 기술자 밀집…도심 제조업의 혁신기지로 발전할 것”




국내 대표적인 도심 제조업 밀집 지역으로 꼽히는 세운상가군 일대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을까. 조남준 서울시 도시재생실 역사도심재생과 과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시세운 프로젝트가 가져올 미래를 가늠해 보았다. 다음은 조 과장과의 일문일답.


▶철거 위기에 놓였던 세운상가를 재생하는 것으로 결정하게 된 이곳의 잠재력은 무엇인가.

“이 지역에는 7000여 개의 산업체와 2만여 명의 기술자들이 근무한다. 전자·전기 업종 이외에도 인쇄·조명·철공·부자재 재료상 등과 같이 다양한 업종이 밀집돼 거대한 도심 제조산업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과거 세운상가의 전성기를 이끈 것은 고급 아파트와 같은 부동산이 아니라 이 일대를 한 바퀴만 돌면 탱크도 만들고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기술에 대한 신뢰였다. 세운상가에 축적된 경험에 청년들의 혁신성이 더해진다면 어떨까. 미래 도심 제조 산업의 혁신 기지로 발전할 가능성과 기회가 세운에 있다.”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다양한 이해관계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대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성장과 개발, 파괴와 소비라는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 사람을 중심에 두고 지역의 가치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500회 이상의 주민 간담회와 설명회를 바탕으로 ‘다시세운 시민협의회’를 발족하는 등 민·관 협력적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도시 재생 정책의 비전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2016년 1월에는 국내 최초로 사업 추진 단계에서 ‘지역 활성화 및 발전을 위한 상생 협약’을 체결했다. 상가 임대차와 관련된 분쟁을 심의·조정하기 위한 상가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의·조정 기준을 마련하는 등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서도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거친 세운상가는 다가올 미래에는 어떤 역할을 수행할까.

“다시세운 프로젝트가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세운상가~청계상가 일대는 이미 ‘을지로의 창의 제조산업의 혁신지’로 주목 받고 있다. 개장 이후 현재까지 7000여 명이 세운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방문할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올해부터는 2단계 구간의 지역 산업인 인쇄업을 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 인쇄 산업 활성화에도 나서고 있다. 다시세운 프로젝트가 완성된다면 세운상가군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21세기형 도심 제조 산업의 핵심 거점 역할을 하며 도시 성장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다.”


◆'다시세운 프로젝트'는?

국내 다수의 전기·전자 업체들이 모인 세운상가는 ‘TG삼보컴퓨터’, ‘한글과컴퓨터’ 등 국내 1세대 벤처기업들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전자 메카’로 명성을 누리던 세운상가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당시 정부가 1986년 전자·전기 업종을 ‘도심 부적격 업종’으로 지정하면서 이듬해인 1987년부터 세운상가에 입점한 전기·전자 업체들은 ‘용산전자상가’로 대거 이전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90년대부터 차차 한산해지던 세운상가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겪으며 입주 기업들의 거래처들이 도산하며 큰 위기를 겪었다. 여기에 2000년대부터 온라인을 통한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세운상가를 찾는 발길은 줄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6년, 서울시는 세운상가 일대를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해 전체 상가를 철거한 후 녹지축을 조성하고 주변 일대를 고밀도로 개발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현대상가 1개 동이 철거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 건물주와 토지 사업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와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사업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이에 따라 전면 철거 계획에 보류 결정이 내려지며 세운상가의 앞날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갯속과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시는 세운상가가 가진 잠재력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2014년, 세운상가를 전격 존치하는 방향으로의 정책 전환을 결정한다. 이듬해인 2015년부터 지금까지 세운상가군에서는 재정비촉진지구의 분리 개발 방식을 골자로 한 도시 재생 사업이 추진 중이다. 그 이름은 바로 ‘다시세운 프로젝트’다. 세운상가부터 진양상가에 이르는 총 7개의 상가군과 그 일대의 도심 제조 산업을 포용하는 대규모의 프로젝트로 설계됐다. 서울시는 다시세운 프로젝트에 보행재생·산업재생·공동체재생이라는 세 가지의 목표를 설정했다.

mjlee@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3호(2019.09.23 ~ 2019.09.2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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