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와 러시아의 ‘증산 전쟁’, 목표는 미국 셰일업계의 몰락

[글로벌 현장]-국제 유가 배럴당 20달러대까지 추락 ‘18년 만의 최저 수준’, 증산 당분간 이어질 것


[뉴욕(미국)=김현석 한국경제 특파원]국제 유가가 다시 배럴당 20달러대까지 추락했다. 2002년 이후 18년 만의 최저 수준이다. 금세 배럴당 10달러대, 아니 저장 비용을 고려하면 마이너스로 떨어질 것(미즈호증권)이란 극단적 전망까지 나온다.

3월 7일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주요 산유국 간 감산 합의 결렬과 함께 세계 2·3위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와 러시아 사이의 ‘증산 전쟁’이 발발한 때문이다. 전쟁 발발 자체도 문제지만 시점도 최악이다. 팬데믹(대유행)으로 발전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 경제를 강타하면서 각국의 경제 활동이 봉쇄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가가 낮아져도 수요가 늘어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란 얘기다. KKR의 닐 브라인 글로벌 인프라 담당 임원은 “이번 전쟁으로 세계 원유 시장에는 몇 년에 걸쳐 소화해야 할 원유 재고가 발생할 것”이라며 중·장기적으로 저유가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감산량 두고 벌어진 사우디와 러시아의 갈등

게다가 사우디·러시아 모두 유가 폭락에도 증산 전쟁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전쟁을 이끌고 있는 사우디의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나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모두 상당 기간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강하다.

특히 이들이 노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차지해 온 세계 석유 시장을 잠식해 온 미국 셰일업계의 몰락이란 분석이 나온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들이 2016년부터 감산을 지속해 온 가운데 미국은 지난해 세계 1위 산유국 그리고 원유 순수출국으로 도약했다.

미국의 셰일오일 붐이 일어난 것은 2011~2014년부터다. 당시 국제 유가는 배럴당 90달러에 달했다. 이 같은 유가는 높은 생산비용의 셰일오일 채굴을 가능하게 했고 미국에선 채굴 기술 발전과 함께 전국에서 기름이 쏟아져 나왔다. 셰일 붐 덕분에 2012년까지 하루 500만 배럴 수준이던 미국의 산유량은 2014년 800만 배럴을 넘었고 2015년 말에는 1000만 배럴에 육박했다.

이에 따라 국제 유가는 폭락하기 시작했다. 2014년 6월 배럴당 106달러까지 치솟았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2016년 1월 배럴당 30달러 초반으로 급락했다. 셰일오일 산업의 싹을 뽑기 위해 사우디 중심의 OPEC가 대대적으로 증산했지만 셰일업계는 죽지 않았다. 월가의 막대한 자본이 셰일업계에 흘러들어갔다.

결국 2016년 당시 세계 산유량 1·2위이던 사우디와 러시아는 이른바 ‘OPEC+’를 결성해 역사적 감산에 돌입했다. 이후 수차례 감산 협력을 이어 오면서 미국 셰일오일에 대응해 유가를 지지해 왔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양국 간 불신이 커져 왔다. 가장 많은 감산량을 담당해 온 사우디는 상대적으로 적은 양을 줄여 온 러시아에 불만을 가졌다. 러시아는 감산이 미국 셰일오일 업자들만 돕는 게 아닌지 근본적인 의심을 가졌다. 실제 OPEC+가 감산으로 유가를 방어하는 동안 미국의 석유 생산량은 세계 1위가 됐다. OPEC의 세계 원유 시장점유율은 2009년 45% 수준에서 올 초 34%까지 떨어졌다.

양국은 시리아 문제에서도 부딪쳤다. 사우디는 시리아 반군을 돕지만 러시아는 정부군을 지원한다. 최근 양국 간 회담에서 러시아가 사우디에 대러 투자 확대와 시리아 내 군사 활동 지지를 요청했지만 사우디는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간 반목은 지난 2월 초 코로나19에 따른 하루 150만 배럴 추가 감산을 논의하며 본격적으로 표출됐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빈 살만 왕세자가 부친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살만 왕)에게 푸틴 대통령에게 전화해 추가 감산 협조를 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처음에는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대화에 응하지 않아 사우디를 당혹스럽게 했고 지난 2월 3일 대화가 이뤄졌지만 감산을 약속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코로나19로 인한 수요 감소가 장기화되지 않을 것으로 봤다.

2월 초 OPEC 긴급 회의에서도 이견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빈 살만 왕세자는 결국 러시아가 합의할 것으로 기대했다. 압둘 라지즈 빈 살만 에너지부 장관이 3개월만 추가 감산하자고 설득했지만 빈 살만 왕세자는 1년 감산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바뀌지 않았다. 빈 살만 왕세자는 ‘노딜 시나리오’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러시아에 ‘감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우디는 증산에 들어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결국 응하지 않았다.

◆사우디 아닌 미국 겨냥한 푸틴의 속내

러시아는 3월 6일 OPEC+ 회의에서 감산을 최종적으로 거부했다. 이들은 3월 말 종료되는 기존 감산(하루 210만 배럴) 연장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노박 에너지 장관은 직후 “4월 1일부터 어떤 국가도 감산 요구를 받지 않는다”며 증산을 시사했다. 이날 국제 유가는 10% 폭락했다.

사우디는 즉각 공격에 나섰다. 하루 970만 배럴인 생산량을 4월부터 1300만 배럴로 늘리고 수출가를 배럴당 6~8달러 내리기로 했다. 러시아 정부도 “50만 배럴 증산이 가능하다”고 맞받아쳤다. 러시아는 하루 평균 1140만 배럴을 생산한다. 시장 조사 업체 IHS마킷은 올 1분기 세계 원유 수요가 전년 동기보다 하루 380만 배럴 감소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부에선 유가가 배럴당 20달러대로 떨어지면 양국이 결국 합의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사우디는 유가가 배럴당 30달러면 국가를 운영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러시아 정부의 예산도 배럴당 42.4달러를 기본으로 짜여 있다. 하지만 빈 살만 왕세자 그리고 푸틴 대통령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번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미국의 컨설팅 업체 유라시아그룹은 “사우디의 장기적 목표는 시장을 지배하고 가격을 결정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라며 “간단히 말해 사우디는 장기전에 돌입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의 안톤 실루아노프 재무장관도 그동안 누적된 국부펀드 덕분에 배럴당 30달러의 유가에서도 향후 4년 동안 정부가 예산을 집행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국부펀드에 쌓아 놓은 돈은 1700억 달러에 달한다. 또 외환보유액은 5770억 달러로, 2015년 대비 60% 늘었다.

사우디도 502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사우디는 배럴당 생산 원가가 3달러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산만 아껴 쓴다면 오래 버틸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푸틴 대통령이 전쟁을 시작한 진짜 목표는 미국 셰일업계에 대한 타격이라는 설이 강하다. RBC의 헬리마 크로프트 상품전략책임자는 “러시아의 전략은 단순히 미국 셰일 기업을 겨냥한 게 아니라 에너지 산업을 간접적으로 지원해 온 미 행정부의 제재 정책일 수 있다”면서 “푸틴 대통령이 증산을 금방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러시아·이란·베네수엘라 등 산유국들을 잇달아 제재함으로써 자국의 셰일오일 수출을 확대해 왔다. 최근에는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초대형 가스관인 노르스트롬2에 대해서도 제재를 단행해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는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천연가스 수출을 차단하고 자국 업체들의 셰일가스 수출을 위한 것이란 관측이 많다.

이에 푸틴 대통령이 반격에 나섰다는 시나리오다. 맥킨지에 따르면 미국 셰일 유정의 15% 정도만 35달러 이하에서도 원가 경쟁력을 가진 것으로 분석된다. 그렇지 않아도 셰일업계는 유가 폭락 이전부터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해 왔다.

2014년 세계적 증산 경쟁이 붙었을 때는 투자자들이 수천억 달러를 투자해 셰일업계를 구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수년간 셰일업계의 낮은 수익률에 지친 월가는 지금 도와줄 의향이 없다”고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조사한 29개 셰일 기업들은 지난 10년 동안 매출보다 지출이 1120억 달러 많았다.

여기에 그동안 발행한 회사채의 만기가 다가오고 있다. 무디스에 따르면 향후 4년간 미국의 석유·가스 기업은 약 860억 달러의 부채를 갚아야 한다. 이 중 530억 달러는 ‘BBB’ 등급으로, 대부분 투기 등급 추락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됐다.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금액은 53억 달러 수준이지만 2022년에는 257억 달러로 늘어난다.

이에 따라 이날 에너지 회사들이 발행한 회사채들도 폭락했다. 파이오니어내추럴리소시스의 스콧 셰필드 최고경영자(CEO)는 “석유가스 기업의 아마도 50%는 향후 2년간 파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에너지 기업들의 비율은 뉴욕 증시에서는 4.4% 수준이지만 정크본드 시장에선 11%에 달한다. 또 에너지 산업은 100만 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고 금융업계는 물론 각 지역 산업과도 깊게 연계돼 있다.

헤지펀드 그레이트힐 캐피털의 토마스 헤이스 회장은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유가가 낮아지면 일부 에너지 기업은 부도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러시아가 곧 협상장에 돌아오지 않으면 미 셰일 기업의 신용 위기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는 미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셰일 회사들은 당장 감산에 돌입했다. 다이아몬드백에너지는 3월 9일 새 유정을 개발하는 직원 3분의 1을 감축하고 이번 분기에 예정된 3곳의 굴착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석유 생산이 3월 초 하루 1310만 배럴로 2위 러시아(1129만 배럴), 3위 사우디(967만 배럴)보다 많다. 시장 조사 업체 IHS마킷의 다니엘 예르긴 부회장은 “미국은 현재 석유와 가스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런 유가 수준에서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realist@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9호(2020.03.23 ~ 2020.03.2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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