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치판에선]- 전문성 강화 취지 불구 외교 전문가 1명, 기업인 3명 불과- 시민단체 11명, 정치인은 17명
[한경비즈니스 = 홍영식 대기자] 국회의원 비례대표제는 1855년 덴마크에서 최초로 실시됐다.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정치에 투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비례대표제가 고안된 것이다. 이른바 ‘거울 이론’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갈등을 제도로 수렴해 혼란을 줄여 보자는 의도다. 의회를 사회적 갈등의 축소판으로 만든 셈이다. 정당이 얻는 득표 비율을 의석에 반영해 소수 지지 정당도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한국에서 비례대표제를 처음 도입한 것은 1963년 6대 총선 때다. 하지만 온전한 비례대표가 아닌 ‘전국구’라는 이름의 ‘변종’이었다. 제1당의 득표율이 50%를 넘으면 전국구 의석의 3분의 2를 넘지 않는 선에서 득표율에 따라 배정하도록 했다. 50% 미만이면 득표율에 관계없이 전국구 의석의 2분의 1을 배정받게 했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민주공화당에 유리하도록 설계됐다. 이런 전국구 제도는 1973년 제9대 총선 때 없어졌다. 그 대신 1지역구에서 국회의원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와 지역구와 별도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는 ‘유신정우회’ 제도가 실시됐다.
전국구 제도가 부활된 것은 전두환 정권 때인 1981년 11대 총선 때다. 첫 도입 때와 달리 지역구 의석을 배분 기준으로 삼았다. 전국구 의석(92석)의 3분의 2를 제1당에 배분한 뒤 나머지 의석을 2당부터 지역구 의석에 비례해 할당했다. 집권당인 민정당에 과반 의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정국 안정’이란 명분을 내세웠다.
1988년 13대 총선 땐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지역구가 92개에서 224개로 크게 늘어났다. 전국구 의석수는 지역구 의석의 3분의 1인 75석, 배분은 지역구 의석 비율에 맞췄다. 다만 지역구 1위 정당이 지역구 의석 절반이 안 되면 전국구 의석 총수의 2분의 1을 우선 배분받게 했다. 나머지 의석은 2당부터 지역구 의석 비율에 따라 배분했다.
14대 총선(1992년) 땐 지역구 의석이 없더라도 득표율 3% 이상을 얻은 정당도 의석을 배분받을 수 있게 했다. 15대(1996년)와 16대(2000년) 총선 땐 득표율 5% 이상으로 올라갔다가 2004년 17대 총선 때 다시 3%로 내려왔다. 2001년 헌법재판소가 비례대표를 1인 1투표 제도를 통해 배분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림에 따라 17대 총선부터 1인 2표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도입됐다.
◆공천 사라졌지만 권력 유지·내 사람 심기에 활용
비례대표제는 그간 숱한 ‘뒷거래’ 추문과 후유증을 낳았다. 각계의 전문가를 국회로 유입해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고 의회의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도입 취지는 어디 가고 집권 유지와 유력 정치인의 ‘자기 사람 꽂기’ 수단이 됐다. 이 때문에 비례대표 의원들은 당 대표를 비롯한 자신을 발탁한 유력 정치인들의 전위대 역할을 한 사례도 적지 않다. 수억원, 수십억원의 공천 뒷거래가 횡행하면서 비례대표제는 ‘전(錢)국구’라는 비아냥거림도 들었고 논공행상의 통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번 21대 총선 비례대표 공천도 이런 얼룩진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 선거법에 따르면 비례대표 의석 47석 가운데 30석은 준연동형에 따라 뽑는다. 나머지 17석은 현행대로 각 정당 득표율에 비례해 배분된다. 최근 각 정당의 지지율을 토대로 분석한 총선 예상 비례대표 의석은 더불어시민당과 미래한국당 16~20석, 열린민주당 5~7석, 정의당 3~5석, 국민의당 3~5석 등이다. 물론 투표 결과에 따라 실제 의석은 이와 다를 수 있다.
이 정당들의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된 인사들을 보면 각계의 대표성을 제대로 반영했는지 의문이다. 각 정당이 비례대표 안정권으로 꼽는 후보 가운데 외교 전문가는 한 명밖에 없다. 미래한국당 비례 순번 6번을 받은 조태용 전 외교부 1차관이다. 북한 핵문제 등으로 한반도 상황이 엄중한데 각 정당들이 외교 문제에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더욱이 현 정부 들어 미국·일본·중국 등 한반도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가 실타래처럼 꼬여 있는 상황이다. 기업인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미래한국당 2명, 더불어시민당 1명 등 3명이다. 반면 시민·이익단체 출신은 11명에 달한다.
정치인들도 많다. 전·현직 의원을 포함해 17명이다. 국민의당은 안철수 대표의 측근인 이태규 전 의원과 권은희 의원이 2, 3번을 받았다. 지역구 공천 탈락자들이 비례대표 후보를 갈아타기 한 사례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열린우리당 4번에 이름을 올렸다. 김 전 대변인은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뒤 불출마 선언을 했다가 번복했다. 열린우리당 10번에 이름을 올린 김성회 후보는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했다가 탈락했다. 비례대표가 ‘낙천자 구제용’, ‘패자부활전’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치꾼’을 앞세워 비례대표 쟁탈전에 나섰다는 지적도 있다.
공천 과정을 보면 ‘가관’이다. 비례대표 취지가 전문성을 강화하려는 것인데 각 정당들은 자질 검증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미래한국당은 5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공천 신청자들을 한 사람당 3분 면접으로 후보를 선출했다. 더불어시민당은 공모와 심사, 순번 결정, 선거인단 찬반 투표를 하는데 1주일도 걸리지 않아 투명성 논란도 일었다. 정당이 급조되다 보니 비례대표 후보 공천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한 것이다.
◆위장전입, 의원 꿔주기 등 온갖 꼼수들 판쳐
부실 검증에 후보 자격 논란까지 일었다. 더불어시민당 11번 후보인 최혜영 강동대 사회복지행정과 교수는 기초생활비 부정 수급 의혹을 받았고 정의당 1번 류호정 후보는 대리 게임 논란이 일었다. 열린민주당 2번 최강욱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아들에게 허위 인턴 증명서를 발급해 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같은 당 김의겸 전 대변인은 서울 흑석동 재개발 지역 상가 투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비례대표 후보로 각기 영입한 인사들을 탈당시켜 위성 정당인 더불어시민당·미래한국당에 각각 위장 전입시키고 공천 탈락 또는 불출마 선언한 현역 의원을 비례 위성 정당에 빌려 주기까지 했다.
열린민주당은 ‘문재인 지킴이’, ‘조국 수호’ 등 특정 인사를 선거 마케팅에 활용하면서 비례대표제를 희화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가치와 책임 정치는 실종되고 정파적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는 행태가 횡행한 것이다. 이번에도 비례대표제 무용론·폐지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툭 하면 터져 나오는 비례대표들의 거취 논란도 무용론에 힘을 싣고 있다. 비례대표는 자진 탈당하면 의원직을 잃게 된다. 이 때문에 소속 정당 계파 간 분란이 일어 당이 쪼개질 때 의원직을 내놓지 않으려고 ‘몸 따로 마음 따로’ 두 당에 발을 걸쳐 놓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 경우가 적지 않다.
20대 국회 때만 해도 이상돈·박주현·장정숙 바른미래당 비례대표 의원은 바른미래당이 갈라질 때 몸은 바른미래당에 있으면서 실제 민주평화당에서 의정 활동을 해왔다. 장 의원은 바른미래당 소속으로 대안신당 수석대변인을 맡기도 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위성 정당에 불출마하는 비례대표 의원을 보낼 때 자진 탈당이 아니라 제명 형식을 취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대부분의 비례대표 의원들이 비례대표직을 지역구 출마를 위한 디딤돌로 여기고 있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ysho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0호(2020.03.30 ~ 2020.04.05) 기사입니다.]
[한경비즈니스 = 홍영식 대기자] 국회의원 비례대표제는 1855년 덴마크에서 최초로 실시됐다.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정치에 투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비례대표제가 고안된 것이다. 이른바 ‘거울 이론’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갈등을 제도로 수렴해 혼란을 줄여 보자는 의도다. 의회를 사회적 갈등의 축소판으로 만든 셈이다. 정당이 얻는 득표 비율을 의석에 반영해 소수 지지 정당도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한국에서 비례대표제를 처음 도입한 것은 1963년 6대 총선 때다. 하지만 온전한 비례대표가 아닌 ‘전국구’라는 이름의 ‘변종’이었다. 제1당의 득표율이 50%를 넘으면 전국구 의석의 3분의 2를 넘지 않는 선에서 득표율에 따라 배정하도록 했다. 50% 미만이면 득표율에 관계없이 전국구 의석의 2분의 1을 배정받게 했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민주공화당에 유리하도록 설계됐다. 이런 전국구 제도는 1973년 제9대 총선 때 없어졌다. 그 대신 1지역구에서 국회의원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와 지역구와 별도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는 ‘유신정우회’ 제도가 실시됐다.
전국구 제도가 부활된 것은 전두환 정권 때인 1981년 11대 총선 때다. 첫 도입 때와 달리 지역구 의석을 배분 기준으로 삼았다. 전국구 의석(92석)의 3분의 2를 제1당에 배분한 뒤 나머지 의석을 2당부터 지역구 의석에 비례해 할당했다. 집권당인 민정당에 과반 의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정국 안정’이란 명분을 내세웠다.
1988년 13대 총선 땐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지역구가 92개에서 224개로 크게 늘어났다. 전국구 의석수는 지역구 의석의 3분의 1인 75석, 배분은 지역구 의석 비율에 맞췄다. 다만 지역구 1위 정당이 지역구 의석 절반이 안 되면 전국구 의석 총수의 2분의 1을 우선 배분받게 했다. 나머지 의석은 2당부터 지역구 의석 비율에 따라 배분했다.
14대 총선(1992년) 땐 지역구 의석이 없더라도 득표율 3% 이상을 얻은 정당도 의석을 배분받을 수 있게 했다. 15대(1996년)와 16대(2000년) 총선 땐 득표율 5% 이상으로 올라갔다가 2004년 17대 총선 때 다시 3%로 내려왔다. 2001년 헌법재판소가 비례대표를 1인 1투표 제도를 통해 배분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림에 따라 17대 총선부터 1인 2표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도입됐다.
◆공천 사라졌지만 권력 유지·내 사람 심기에 활용
비례대표제는 그간 숱한 ‘뒷거래’ 추문과 후유증을 낳았다. 각계의 전문가를 국회로 유입해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고 의회의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도입 취지는 어디 가고 집권 유지와 유력 정치인의 ‘자기 사람 꽂기’ 수단이 됐다. 이 때문에 비례대표 의원들은 당 대표를 비롯한 자신을 발탁한 유력 정치인들의 전위대 역할을 한 사례도 적지 않다. 수억원, 수십억원의 공천 뒷거래가 횡행하면서 비례대표제는 ‘전(錢)국구’라는 비아냥거림도 들었고 논공행상의 통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번 21대 총선 비례대표 공천도 이런 얼룩진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 선거법에 따르면 비례대표 의석 47석 가운데 30석은 준연동형에 따라 뽑는다. 나머지 17석은 현행대로 각 정당 득표율에 비례해 배분된다. 최근 각 정당의 지지율을 토대로 분석한 총선 예상 비례대표 의석은 더불어시민당과 미래한국당 16~20석, 열린민주당 5~7석, 정의당 3~5석, 국민의당 3~5석 등이다. 물론 투표 결과에 따라 실제 의석은 이와 다를 수 있다.
이 정당들의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된 인사들을 보면 각계의 대표성을 제대로 반영했는지 의문이다. 각 정당이 비례대표 안정권으로 꼽는 후보 가운데 외교 전문가는 한 명밖에 없다. 미래한국당 비례 순번 6번을 받은 조태용 전 외교부 1차관이다. 북한 핵문제 등으로 한반도 상황이 엄중한데 각 정당들이 외교 문제에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더욱이 현 정부 들어 미국·일본·중국 등 한반도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가 실타래처럼 꼬여 있는 상황이다. 기업인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미래한국당 2명, 더불어시민당 1명 등 3명이다. 반면 시민·이익단체 출신은 11명에 달한다.
정치인들도 많다. 전·현직 의원을 포함해 17명이다. 국민의당은 안철수 대표의 측근인 이태규 전 의원과 권은희 의원이 2, 3번을 받았다. 지역구 공천 탈락자들이 비례대표 후보를 갈아타기 한 사례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열린우리당 4번에 이름을 올렸다. 김 전 대변인은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뒤 불출마 선언을 했다가 번복했다. 열린우리당 10번에 이름을 올린 김성회 후보는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했다가 탈락했다. 비례대표가 ‘낙천자 구제용’, ‘패자부활전’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치꾼’을 앞세워 비례대표 쟁탈전에 나섰다는 지적도 있다.
공천 과정을 보면 ‘가관’이다. 비례대표 취지가 전문성을 강화하려는 것인데 각 정당들은 자질 검증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미래한국당은 5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공천 신청자들을 한 사람당 3분 면접으로 후보를 선출했다. 더불어시민당은 공모와 심사, 순번 결정, 선거인단 찬반 투표를 하는데 1주일도 걸리지 않아 투명성 논란도 일었다. 정당이 급조되다 보니 비례대표 후보 공천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한 것이다.
◆위장전입, 의원 꿔주기 등 온갖 꼼수들 판쳐
부실 검증에 후보 자격 논란까지 일었다. 더불어시민당 11번 후보인 최혜영 강동대 사회복지행정과 교수는 기초생활비 부정 수급 의혹을 받았고 정의당 1번 류호정 후보는 대리 게임 논란이 일었다. 열린민주당 2번 최강욱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아들에게 허위 인턴 증명서를 발급해 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같은 당 김의겸 전 대변인은 서울 흑석동 재개발 지역 상가 투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비례대표 후보로 각기 영입한 인사들을 탈당시켜 위성 정당인 더불어시민당·미래한국당에 각각 위장 전입시키고 공천 탈락 또는 불출마 선언한 현역 의원을 비례 위성 정당에 빌려 주기까지 했다.
열린민주당은 ‘문재인 지킴이’, ‘조국 수호’ 등 특정 인사를 선거 마케팅에 활용하면서 비례대표제를 희화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가치와 책임 정치는 실종되고 정파적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는 행태가 횡행한 것이다. 이번에도 비례대표제 무용론·폐지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툭 하면 터져 나오는 비례대표들의 거취 논란도 무용론에 힘을 싣고 있다. 비례대표는 자진 탈당하면 의원직을 잃게 된다. 이 때문에 소속 정당 계파 간 분란이 일어 당이 쪼개질 때 의원직을 내놓지 않으려고 ‘몸 따로 마음 따로’ 두 당에 발을 걸쳐 놓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 경우가 적지 않다.
20대 국회 때만 해도 이상돈·박주현·장정숙 바른미래당 비례대표 의원은 바른미래당이 갈라질 때 몸은 바른미래당에 있으면서 실제 민주평화당에서 의정 활동을 해왔다. 장 의원은 바른미래당 소속으로 대안신당 수석대변인을 맡기도 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위성 정당에 불출마하는 비례대표 의원을 보낼 때 자진 탈당이 아니라 제명 형식을 취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대부분의 비례대표 의원들이 비례대표직을 지역구 출마를 위한 디딤돌로 여기고 있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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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0호(2020.03.30 ~ 2020.04.0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