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벤처 투자 물꼬…한국판 ‘구글벤처스’ 탄생하나

-지주사 산하 CVC 허용 추진 중…외부 자본 수혈 금지하면 ‘유명무실’ 비판도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구글의 지주회사 알파벳은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구글벤처스를 통해 활발한 투자에 앞장서고 있다. 2009년 설립된 이후 현재까지 약 450억 달러(약 54조원)의 투자를 집행했다.
2015년부터 구글벤처스는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에 투자를 지속적으로 집행하면서 이 분야 스타트업들을 키워 왔다. 그리고 2020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유행)으로 바이오·헬스케어 업종의 가치가 뛰면서 구글벤처스의 투자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CVC로 신성장 동력 찾는 대기업들

그간 한국에서는 구글벤처스처럼 대기업의 지주사가 CVC를 보유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이는 공정거래법상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상대 업종을 소유·지배하는 것을 금지) 원칙에 따른 것이다. 벤처 투자업계는 투자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CVC 허용을 요구해 왔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신성장 동력을 찾는 대기업 또한 CVC를 통해 활발한 인수·합병(M&A)을 원해 왔다.

업계의 오랜 숙원이던 대기업 지주사의 CVC 허용이 ‘제한적으로’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하반기 경제 정책 방향에서 지주회사가 CVC를 보유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코로나19로 경직된 투자 시장에 불을 지피고 경제 활성화의 일환으로 ‘제2의 벤처 투자 붐’을 일으키기 위해서다.

투자업계는 그동안 지주회사의 CVC를 허용해야 한다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 왔다. 대기업은 스타트업 투자를 통해 신성장 동력을 발굴할 수 있다. 신규 사업 영역에 진출하기 위해 기존의 조직과 인력을 투입하지 않고도 스타트업 투자를 활용해 신기술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활발한 M&A를 시도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인 측면이다. 벤처기업엔 성장을 위해 대기업의 자본력과 사업 노하우가 필요하다. ‘시드머니’를 공급해야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대로 미래에셋대우 애널리스트는 “기업은 CVC를 통해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이 필요로 하는 장기 위험 자본을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며 “CVC는 금융회사가 투자 위험성이 높아 투자를 꺼리는 모험적 사업 분야에도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산분리 원칙 때문에 대기업 지주사들이 CVC를 보유할 수는 없지만 대기업의 CVC 운영이 아예 막힌 것은 아니었다. 국내 대기업들은 해외 법인 설립이나 계열사를 통해 CVC를 운영 중이다. 지주사 체제가 아닌 삼성은 삼성벤처투자를 통해 스타트업들에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지주사 체제인 LG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설립했다. 네이버는 계열사 스프링캠프, 카카오는 카카오벤처스를 운영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지주회사 내 CVC’에 대한 필요성이 높았던 것은 벤처기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결정, 관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정 애널리스트는 “지주사 내 CVC는 계열사 간 사업 부문별로 오픈 이노베이션을 할 수 있는 효과적인 컨트롤타워 역할을 구축할 수 있다”며 “타인의 자본을 활용한 투자가 가능해짐에 따라 그룹의 위험을 분산하면서 투자를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장점 때문인지 CVC의 투자 규모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CVC의 투자 규모는 571억 달러(약 68조원)로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일반 벤처캐피털과 비교해도 CVC의 점유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단기적 이윤 추구가 목적인 일반 벤처캐피털 투자와 달리 CVC는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투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산분리 위해 ‘브레이크’ 장착한 CVC 법안

국내에서도 CVC 허용을 통해 대기업의 벤처 투자 참여를 독려해 M&A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르면 7월 중 실무 회의를 가동해 대기업 지주회사의 CVC 보유에 대한 보완 방안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하지만 CVC에 대한 정부 부처 간 시각차는 여전하다. 기획재정부는 벤처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허용을 원했고 공정거래위원회는 벤처 지주회사 규제 완화로도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부처의 목소리를 담아 최종 방안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벤처 투자업계는 이번 제도 개편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번 방안이 외부 자금의 수혈을 막는 방식으로 가닥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정부는 CVC가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하고 재벌의 ‘사금고’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 방지책을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자금을 조달할 때 외부 자본의 참여를 허용하지 않고 모기업의 자본을 100% 활용하게 하는 방안이 있다. 이는 대기업이 CVC를 통해 외부 자본을 그러모아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지분 보유 역시 지주회사가 CVC 지분을 100% 보유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가 의무적으로 보유해야 하는 자회사 지분율이 상장사는 20%, 비상장사는 40%인데 CVC는 지주회사의 책임을 높이기 위해 모든 지분을 갖게 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21대 국회 출범과 함께 발의된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6월 25일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일반 지주회사가 자회사로 소유할 수 없었던 CVC를 조건부로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내용의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외부 투자금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CVC의 금융 기능을 제한하기 위해 벤처투자조합의 조성은 지주회사 계열사 또는 자기자본 출자만 가능하도록 했다.

이는 CVC가 일반적인 벤처캐피털(VC)의 재무적 투자와 달리 그룹 차원의 전략적 투자목적이 크므로 외부 자금 위탁 운용은 이해 상충 문제가 발생하며 글로벌 CVC가 외부 자금 없이 지주회사 내부 자금으로만 투자한다는 점을 참고한 것이다. 이용우 의원은 “대기업 지주사 CVC 제한적 허용은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벤처 투자 활성화의 목표가 조화될 수 있는 수준에서 제도를 마련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벤처 투자업계는 차분한 모습이다. 일단 최종안이 어떻게 나올지에 따라 법안의 효율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관측이다. 벤처 투자업계 관계자는 “지주사 CVC 허용은 외부 자금도 함께 조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야만 최대한의 효과가 있는 제도”라며 “자칫하면 유명무실한 제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전문적인 투자를 집행하기 위해선 투자 전문 기관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정미나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정책팀장은 “스타트업들은 사업 아이템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평가를 받은 후 투자 자금을 끌어 오기를 원한다”며 “외부 투자자들과 대기업 지주사가 함께해야 투자에도 전문성이 길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mjlee@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85호(2020.07.11 ~ 2020.07.17)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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