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티 키보드와 TEU 컨테이너가 만들어낸 위대한 표준화의 힘 [장동한의 리스크관리 ABC]




장동한 건국대 국제무역학과 교수·한국보험학회 회장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만들어 낸 말 중 ‘쿼티 경제학’이란 것이 있다. 쿼티는 ‘QWERTY’를 뜻하는데 컴퓨터 자판 맨 위의 알파벳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필자는 QWERTY 순서가 아닌 자판을 본 적이 없는데 이 순서는 1873년 타자기가 상용화된 이후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글로벌 표준이다. 쓰다 보니 우리에게 그저 익숙해져 있을 뿐이지 QWERTY 순서는 외우기 쉬운 것도 아니고 인체공학적으로도 전혀 도움이 되는 배열도 아니다. 아마도 오타를 줄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알파벳을 랜덤으로 배치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저 ‘랜덤’으로 배열된 쿼티 키보드
‘쿼티 경제학’은 표준화 경제의 엄청난 힘을 알기 쉽게 표현한 말이다. 140여 년 전 타자기 자판의 알파벳 순서로 시작된 QWERTY는 오늘날까지 또 앞으로도 상당 기간 자판 배열의 표준으로 계속 쓰일 것이다. 이와 같이 좋든 싫든 시장의 표준이 된 것은 개인 선호와 무관하게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표준화 경쟁이 치열한 것이다. 1970년대 말 소니가 개발한 베타 맥스와 필립스가 개발한 VHS 간의 비디오테이프 경쟁은 유명한 클래식이다. 이 밖에 DVD와 블루레이 경쟁, 이동통신 방식 표준화 경쟁 등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박이 한국에서 건조됐는데 TEU 컨테이너를 한꺼번에 2만3000개나 적재할 수 있다고 한다.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는 길이 20피트(약 6m)짜리 컨테이너를 의미한다. 같은 길이, 같은 높이, 같은 폭의 컨테이너를 적재하기 때문에 배 하나에 1만 개, 2만 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5대양을 누비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컨테이너에는 자동차, 선반 기계, 이불 보따리, 주방 용구 등 각양각색의 다양한 크기와 모양과 부피를 가진 화물들을 빼곡하게 실을 수 있다. 화물 하나하나의 크기나 모양은 다 다르지만 일단 규격화된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가게 되면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으로 변모해 선박 위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수의 컨테이너를 적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컨테이너는 2차 세계대전에 뒤늦게 참전한 미국이 대서양 건너 격전장인 유럽에 많은 물량의 군수 물자를 빨리 보내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탱크·박격포·지프차·탄약 등 여러 종류와 다양한 형태의 군수 물자를 신속하고 안전하고 저렴하게 보내기 위해 규격화된 철제 용기를 사용한 ‘그뤠잇(great)’ 아이디어였다. 종전 후 컨테이너는 국제 무역의 활성화에 힘입어 국제 거래에 본격적으로 도입됐는데 가히 국제 물류의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 무역 거래에서 사용되는 컨테이너는 딱 두 가지가 있는데 TEU와 FEU 뿐이다. 20피트(약 6m)짜리와 그 두 배인 40피트(약 12m)짜리만 쓰이지 그 밖의 사이즈는 쓰이지 않는다.

물류(物流)는 물적 유통의 준말이다. 제조된 물건을 시장의 소비자에게 어떻게 하면 빨리 안전하고 저렴하고 편하게 보낼 수 있느냐가 물류의 핵심 이슈다. 운송 수단 차원에서 물류의 대표적인 예가 컨테이너라면 물류 시스템 차원에서의 대표적인 예는 허브(HUB) 시스템이다. 말 그대로 중심(中心) 시스템이다. 전국 각지에서 들어와 전국 각지로 보내지는 택배 비즈니스를 생각해 보자. 일단 물류 허브에 물건들이 수집되고 분류 작업을 거쳐 다음 날 목적지로 배송된다. 옛날엔 출발지와 목적지를 일대일로 하나씩 처리했었는데 허브 시스템에 비하면 시간과 비용이 전혀 효율적이지 않다. 택배 비즈니스 전체를 대상으로 할 때 허브 시스템의 효율성은 자명한데 허브가 물류 시스템 표준화의 예가 된다.

표준화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표준화되지 않았을 때의 큰 혼란과 엄청난 비용을 생각하면 표준화는 비즈니스 리스크 관리의 위대한 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4호(2020.09.14 ~ 2020.09.2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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