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알못 판례 읽기
- 임금 인상 요구하며 수자원공사에서 농성한 용역업체 직원들…“근로 장소이고 피해 크지 않아”
[한경비즈니스 =남정민 한국경제 기자]
peux@hankyung.com
하청 업체 소속 노동자가 원청 업체를 점거하고 파업을 벌여도 ‘무죄’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와 화제다. 1심은 회사 손을, 2심은 노동자 손을 들어줬는데 대법원은 2심 판결을 확정지었다. 하청 노동자의 원청 쟁의가 위법하지 않다는 취지의 대법원 첫 판례다.
사건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고인 김 모 씨 등은 한국수자원공사 본사(원청 업체)의 시설 관리 용역 업체인 포시즌환경 소속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임금 협상이 결렬되자 2012년 6월 한국수자원공사를 찾았다. 이후 오전 9시께부터 한국수자원공사 사업장 내의 본관 건물과 수질분석연구센터 건물 사이에서 함께 모여 구호를 외치고 율동과 노동가를 부르는 등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차량에 설치된 확성기를 이용해 농성을 벌였다. 수자원공사 직원들은 “수자원공사 밖으로 나가 집회하라”고 수차례에 걸쳐 퇴거를 요청했지만 김 씨 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씨 등은 또한 수자원공사 건물 각 층의 화장실 청소 및 쓰레기를 수거해 건물 복도에 버리거나 다른 청소 인력의 업무를 방해하기 위해 욕설과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피고인들은 쟁의 행위를 한 사실 관계 자체는 인정하지만 하청 업체 노동자로서 쟁의 행위는 본 사업장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믿었다고 주장했다.
1심 “원청에서 쟁의 행위는 유죄”
1심 재판을 맡은 대전지방법원 형사9단독 김종근 판사는 피고인들의 혐의를 유죄로 보고 한 명당 150만~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노동자의 쟁의 행위가 적법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쟁의 행위의 주체가 단체 교섭의 주체로 될 수 있는 자여야 하고 △그 목적이 노동 조건의 향상을 위한 노사 간의 자치적 교섭을 위해야 하며 △사용자가 노동자의 노동 조건 개선에 관한 구체적인 요구에 대해 단체 교섭을 거부했을 때 개시하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조합원의 찬성 결정 등 법령이 규정한 절차를 거쳐야 하고 △그 수단과 방법이 사용자의 재산권과 조화를 이뤄야 하며 폭력 행사에 해당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한국수자원공사 소속 노동자가 아닌 사내 하청 업체의 노동자인 점, 피고인들은 한국수자원공사의 사내 하청 업체 중 하나인 포시즌과 노동 계약을 체결한 노동자로서 포시즌이 피고인들의 사용자로서 노동관계에 구체적으로 관여한 점, 임금의 지급 등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또한 위 집회는 각 사내 하청 업체를 상대로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던 점 등을 보면 원고용주가 아닌 한국수자원공사의 사업장 내에서 이뤄진 집회를 적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피고인들이 쓰레기를 던진 행위에 대해서도 “항의한다는 명목으로 쓰레기 투척 등을 한 행위는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며 “그와 같은 폭력 행위에까지 정당방위나 정당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다만 피고인들이 초범이었던 점, 이외 별다른 범죄 전력이 없는 점 등을 고려해 양형을 정했다고 밝혔다.
2심 “재산권 과도한 침해 아니야”
반면 2심은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던 1심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을 맡은 대전지방법원 제3형사부는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들은 각 무죄”라고 주문에 적었다. 재판부는 “헌법상 보장되는 쟁의권에는 그 본질상 노동자가 ‘근로를 제공하는 장소’에서 쟁의 행위를 할 권리가 포함된다고 해석된다”며 “사용 사업주는 노동자 파견 계약을 통해 파견 노동자에게 근무지를 제공하고 파견 노동자가 제공한 노동의 결과를 향유하며 실질상 파견 노동자는 사용 사업주의 영향하에서 노동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파견 노동자들이 실제 노동을 제공하는 사용 사업주의 사업장 내에서 파견 사업주를 상대로 쟁의를 했다고 해서 일률적으로 위법하다고 볼 것은 아니다”라며 “사용 사업주의 재산권 또는 시설 관리권과 조화를 이루는 범위 내에서 행해진 쟁의 행위라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파견 노동자들이 쟁의 행위를 함으로써 재산권 또는 시설 관리권을 과도하게 침해했는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노동자들이 사용 사업주의 사업장에서 근무한 기간, 사용 사업주가 파견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 등에 사실상·실질상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여부, 쟁의 행위의 형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수자원공사는 하청 업체들과 체결한 파견 노동 계약을 통해 파견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중 일정 부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점, 피고인들은 율동과 노동가를 제창하는 등 짧게는 1시간, 길어도 3시간을 넘지 않는 시간 동안 쟁의 행위를 했던 점 등을 보면 이 사건 쟁의 행위가 한국수자원공사의 재산권 또는 시설 관리권을 과도하게 침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하청 쟁의 허용 기준 첫 제시
대법원은 이 같은 원심을 확정지었다고 지난 9월 20일 밝혔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도급인의 사업장은 수급인 소속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 되는 곳”이라며 “쟁의 행위의 주요 수단 중 하나인 파업이나 태업은 도급인의 사업장 안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도급인은 비록 수급인 소속 노동자와 직접적인 노동 계약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수급인 소속 노동자가 제공하는 노동에 의해 일정한 이익을 누리고 그런 이익을 향수하기 위해 수급인 소속 노동자에게 사업장을 노동의 장소로 제공했다”며 “그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쟁의 행위로 인해 일정 부분 법익이 침해되더라도 사회 통념상 이를 용인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대법원은 “이 사건 쟁의는 구호를 외치거나 노동가를 제창, 행진을 하는 등 집회나 시위에서 통상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해 집단적인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며 “이러한 행위는 비교적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총 3일간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어 “조합원들의 이러한 행위는 폭력이나 시설물의 파괴를 수반한 것이 아니다”며 “이에 따라 한국수자원공사 직원들이 수질 분석 등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데 실질적으로 지장이 초래됐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워 보인다”고 판시했다.
법조계 “기업에 상당히 부담 가는 판결”
해당 판결은 법조계에서 관심 있게 보는 판례였다. 원청이 하청의 쟁의를 어디까지 용인해 줘야 하는지 정해 준 사실상 대법원 첫 판례였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결국 원청은 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을 제공하는 장소이고 그들을 통해 이득을 보기 때문에 쟁의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용인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한 노동 전문 변호사는 “그간 ‘원청이 용인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논란이 많았는데 법원에서 가르마를 타준 적은 처음”이라며 “이런 명시적인 판단은 그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대법원에서 심리 기간도 꽤 길었다”며 “파급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해당 판결이 사업장 쪽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앞으로 법률상 제삼자인 하청 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비슷한 쟁의·파업과 그에 따른 소송이 줄줄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모든 쟁의를 용인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행위 형태에 따라 다르게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지만 그거야말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며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지 어떻게 판단할지가 핵심 쟁점”이라고 설명했다.
판결 직후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정부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을 이유로 실직자와 해고자 노조 가입도 허용하면서 사업장 점거 파업도 허용하고 있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로 사내 하청 노조의 원청 사업장 점거 파업이 크게 늘 것”이라고 우려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7호(2020.09.26 ~ 2020.10.0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