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중앙은행 전자화폐’ 시대, 상업은행의 위기 오나 [비트코인 A to Z]
입력 2020-10-05 10:45:10
수정 2020-10-05 10:45:10
[비트코인 A to Z]
-화폐 유통 구조의 근간 흔들 수 있어…더 높아지는 비트코인의 중요성
[한경비즈니스 칼럼 = 오태민 지놈체인 대표, ‘비트코인은 강했다’·‘비트코인, 지혜의 족보’ 저자]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전자화폐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중국이 개발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브라질 중앙은행도 2023년이 오기 전에 CBDC를 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독일의 핀테크 전문 비영리 싱크탱크 디젠은 3~5개 국가가 10년 내 자국 통화를 CBDC로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때문에 유럽이 CBDC를 발행하지 않는다면 유로화의 가치는 2025년 안에 중국 위안화에 따라잡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비트코인 투자자들에게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안전하고 확실한 암호화폐의 존재감은 크다. 비트코인의 기술적 혁신성을 인정하면서도 CBDC와 같은 정부 대응에 의해 비트코인의 존재 의미가 퇴색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비트코인을 대체할 전자화폐를 본격적으로 보급하면 비트코인은 끝난다는 주장이다.
최근 CBDC에 관한 논의가 급증하고 있는 이유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행보도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무엇보다 지난해 페이스북 리브라의 여파가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스쿨의 필립 샌드너 블록체인센터장은 CBDC에 대한 유럽중앙은행(ECB)의 대응이 느리다면서 “리브라 프로젝트와 디지털 위안화 등을 감안하면 ECB는 지정학적 위치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트코인은 가격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무리 기술이 오묘해도 화폐로서는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이 금융 피라미드 정점에 자리한 중앙은행 엘리트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발행하는 리브라라면 얘기가 다르다. 가격도 안정적이지만 국경도 없다. 게다가 사용자 20억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가 리브라 화폐권으로 묶일 가능성도 있다. 이미 지불 수단에서의 기술적·사업적 우위를 확보한 테크 기업들이 사실상 금융 피라미드의 정점을 차지하게 된다는 위기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행을 비롯해 많은 중앙은행들이 속속 CBDC를 연구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CBDC의 개념적 정의조차 명료하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보고서에서 CBDC를 특징짓는 기술은 없다고 밝혔다. 비트코인 회의론자들의 기대와 달리 CBDC가 블록체인을 활용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블록체인의 개방적이고 투명한 특성을 중앙은행들이 감당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아가면 CBDC를 도입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뚜렷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호주 중앙은행(RBA)은 보고서를 통해 CBDC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은행 간 실시간 지급 결제가 가능한 ‘뉴 페이먼트 플랫폼’ 등 이미 효율적인 인프라를 갖추고 있고 전반적인 현금 사용이 줄고 있지만 감소세가 빠르지 않은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 상황에서 호주 내 현금 수요가 오히려 증가했다고 밝혔다.
RBA는 CBDC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호주 은행들은 자금의 60% 정도를 예금에서 조달하고 있는데 CBDC가 발행돼 예금이 줄어든다면 은행 자금 조달 비용을 증가시키므로 금융 상품의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CBDC의 기술적 특징이 무엇이고 개념적 정의가 어떠하든지 간에 CBDC를 도입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기존의 중앙은행과 상업은행 그리고 기업과 민간으로 이뤄진 화폐의 유통 구조를 CBDC가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RBA의 경고대로 CBDC가 상업은행의 존재 기반을 허물 가능성이 높다.
민간의 현금 재고는 지갑이나 장롱 속이나 은행 금고에 있다. 은행에 둔 돈은 신용을 확장하지만 지갑이나 장롱 속에 있는 현금 재고는 신용을 확장하지 않는다. 중앙은행의 CBDC는 스마트폰에 잔액을 남기기 때문에 신용을 창출하지 못한다.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CBDC 때문에 은행은 장기 저축만으로 대출해야 한다. 장기 저축은 그만큼 많은 이자를 지급해야 하므로 저렴한 신용 창출원이 사라지는 셈이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본원 통화는 현금과 지불준비금(지준금)으로 구성돼 있다. 상업은행이 중앙은행에 하는 저축이 지준금이고 현금은 민간에 뿌려진 돈이다. 현금과 지준금 모두 중앙은행의 부채인데 현금은 신용을 창출하지 않는 반면 지준금은 신용을 창출해 통화량을 증가시킨다. 지준금은 상업은행이 중앙은행에 의무적으로 맡긴 자산이다. 상업은행은 지준금을 뺀 예금을 대출해 이자 수익을 올린다. 상업은행은 단기 예금을 묵히지 않고 장기 대출에 활용한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아무리 당좌 예금이라고 해도 예금자들이 동시에 인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지준율을 높이면 상업은행의 대출 활동은 억제되고 시중 통화량은 줄어든다.
그런데 만약 중앙은행이 전자적인 형태로 현금을 발행해 비은행 민간에게 직접 제공하면 본원 통화에서 현금의 비율이 높아진다. 통화승수(은행 예금이 반복적으로 신용을 창출한 결과 통화량을 증가하는 비율)는 개인이나 기업이 현금을 은행 금고에 맡긴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금융 시스템을 활용하면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 결제·송금·보관이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CBDC는 중앙은행 발행 전자화폐가 개인의 스마트폰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은행망을 거칠 필요가 없다.
이 때문에 투 티어(two tier) CBDC가 검토되고 있다. 중앙은행이 민간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상업은행을 통해 CBDC를 유통한다는 발상이다.
그러면 기존의 직불카드 시스템과 구조적으로 차이가 없게 된다. 직불카드는 이미 비트코인 등장 이전부터 전자화폐로 불려 왔다. 민간이 전자적 지불 수단을 이용해 결제하면 동시에 은행 장부가 조정된다. 지급자의 잔액이 줄고 수령자의 잔액이 늘어난다. 이 때문에 추치앙 중국 인민대 교수 같은 전문가는 투 티어를 지향하는 중국의 CBDC가 알리페이나 위챗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중국은 CBDC라고 하지 않고 DCEP(Digital Currency Electronic Payment)라고 부른다. 중앙은행 발행을 강조하지 않는다.
◆CBDC 시대의 신용 창출, ‘프로그램’이 할 것
중앙은행은 상업은행을 배신하기 어렵다. 상업은행을 파산(뱅크 런)에서 구제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가 중앙은행이라는 역사적인 경로도 고려해 봐야 한다. 즉 금융은 상업은행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 전체가 집합적으로 구현하는 시스템이다. 만약 중앙은행이 상업은행을 무시하고 원 티어 CBDC를 발행한 후 민간을 상대로 직접 유통한다면 상업은행의 몰락은 가속화될 것이다. 이미 인터넷과 스마트폰 그리고 블록체인이 몰고 온 혁신의 격랑 속에서 상업은행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기도 했다. 민간으로부터 은행권의 배타적 권한을 지키고자 하는 CBDC가 오히려 은행권의 몰락 내지는 혁신을 초래하는 셈이다.
CBDC 시대의 신용 창출은 은행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스마트폰에 담겨 있는 개개인의 평균 잔액을 통계 처리한 뒤 활용 폭을 정하고 소유자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에게 대출할 수 있는 기술이 근간이다. 원래 소유자는 언제고 잔액을 사용할 수 있어 불편하지 않은 데다 잔액에 이자까지 붙으니 계약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프로그램이라면 신용 창출 이전에 비트코인 가격의 등락부터 자동으로 해지할 수 있다. 즉 비트코인을 위한 생태계가 CBDC를 위한 생태계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어차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나 스마트폰 기기가 하나의 은행처럼 기능하는 시대라면 게임의 승자는 상업은행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7호(2020.09.26 ~ 2020.10.0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