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일대기]‘세계 1등을 향한 열망’ 질 경영으로 한국 경영사를 새로 쓰다


- 이건희 회장 일대기② 1993~1999
- 취임 후 변화 주문 공염불 그치자 대로, 경영진 이끌고 마라톤 순례




[장진원 객원기자] “지금부터 내 말을 녹음하세요. 내가 질 경영을 그렇게도 강조했는데 이게 그 결과입니까? 수년간 그렇게 강조했는데도 변한 게 고작 이겁니까? 나는 지금껏 속아왔습니다. 사장들과 임원들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키세요. 이제부터 내가 직접 나설 겁니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는 이건희 회장의 말에는 그야말로 분노가 서려 있었다. 1987년 이병철 선대 회장이 타계한 후 그룹 회장을 넘겨받은 이 회장은 1992년까지 이렇다 할 대외 활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 이 회장은 ‘불량은 안 된다, 양이 아닌 질로 승부하라’는 독려를 멈추지 않았다.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불량 근절을 외쳤지만 후계자라는 핸디캡 때문에 자신의 말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는 게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정식으로 그룹 경영권을 손에 쥐게 된 지 5년이 지났건만 되는 대로 만드는 불량품과 무조건 많이 팔면 그만이라는 사고는 여전했다. 회장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특단의 위기 상황은 정작 이 회장 자신만 알고 있었던 셈이다.

1993년 6월 7일. 이날은 한국 기업사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운명의 시간이었다. 삼성의 내로라하는 핵심 임원 200여 명이 이 회장의 명령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집결했다. ‘신(新)경영’의 닻이 오른 순간이었다. 이 회장의 지시로 허겁지겁 짐을 꾸린 임원들은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켐핀스키 호텔은 독일은 물론 유럽 내에서도 최고급 시설로 이름을 날리던 특급 호텔이었다. 하지만 호텔 회의장에 모인 임원들을 반긴 것은 럭셔리한 연회 대신 절규에 가까운 이 회장의 목소리였다.

◆ 절규에 가까운 토로


“세탁기만 저런 게 아닙니다. VCR 불량은 내가 몇 번이나 경험했습니다. 아끼는 테이프를 다 갉아먹으니 울화통이 터집니다. TV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퓨즈가 나가요. 당연히 고객들이 회사를 욕합니다. 불량이 나오면 100명 중 50명은 다시 사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회사 제품은 엉터리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이런 게 바로 암입니다.

1979년부터 불량은 안 된다고 소리소리 질렀지만 부회장, 후계자라는 핸디캡 때문에 내 말이 먹히질 않았어요. 그런데 회장에 취임한 지 5년이 지나서도 ‘불량은 안 된다. 양이 아니라 질로 향해 가라’고 했는데 아직 양을 외치고 있습니다. 비서실장, 삼성전자 사장, 비서실 전자팀장이 모두 양을 지향합니다. 어처구니없는 발상, 썩어빠진 정신입니다!”

◆ “썩어빠진 정신으론 안 된다”

신경영은 그렇게 이 회장의 절규와 함께 시작됐다. 장장 68일간 200여 명의 임원진 전원이 유럽, 미국, 일본의 세계 일류 현장을 찾아 다녔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공장이라고 불리던 벤츠와 폭스바겐, 에어버스를 조립하는 파리공항의 조립 현장, 세계 제일의 백화점 등 세계 일류라면 업종을 가리지 않았다.

저녁에 돌아와선 각자 보고 들은 것에 대해 회의를 열었다. 회의라기보다 ‘뼈저린 반성’에 가까웠다. 그동안 임원들은 회사의 업무에서 완전히 제외됐다. 전화도 할 수 없었다. 당시 비서실 소속으로 이 회장 수행을 맡았던 손욱 전 농심회장(전 삼성SDI 사장·삼성종합기술원장·삼성인력개발원장)은 “호텔 지배인이 ‘당신들은 무슨 종교 집단이냐’고 물었다”고 전한다.

매일 아침 검은 양복을 입고 전도하듯 호텔을 떠나고 밤이 되면 교주 같은 사람이 맨 앞에 나와 얘기하며 눈물까지 흘리니 그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로 유명한 이 회장의 신경영의 시작을 알린 것은 6월 7일이었지만 그 싹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게 사실이다. 회장 취임 직후 이 회장의 관심사는 오로지 ‘세기 말의 생존’이었다.

‘한국 1등’이라는 우물 안 개구리식 사고로는 더 이상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회장의 결론이었다. 양이 아닌 질로 승부하라는 슬로건이 공염불에 그치자 극단의 선택에 나서게 된 것이 바로 신경영이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두 건의 보고서였다. 1980년 이 회장이 직접 각고의 노력으로 영입한 후쿠다 다미오, 기보 마사오 고문이 작성한 보고서였다. 두 사람은 각각 디자인과 기술 고문을 맡아 삼성에 일본의 기술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회장은 6월 7일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날 두 고문과 밤새도록 삼성의 앞날에 대해 토론했다. 그때 기보 고문이 올린 보고서가 바로 그 유명한 ‘K보고서’다. 보고서의 내용은 이랬다.

“일본인들은 연구·개발자들이 부품이나 측정기, 각종 도구를 사용하고 나면 원래 위치로 다시 가져다 놓는다. 다음 사람이 금방 찾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연구 데이터도 잘 정리해 나중에 다시 활용한다. 중복이나 누락 없이 원활한 연구·개발이 가능한 이유다. 그런데 삼성은 13년 동안 정리 정돈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금까지 안 된다. 내가 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이젠 회장이 조직 문화를 바꿀 때다.”

비행기에 오른 이 회장은 수행한 핵심 임원 6명에게 ‘도대체 왜 그런지’ 답을 찾아오라고 주문했다. 한두 시간 후 답을 올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다시’였다. 독일에 도착해 주재원을 방문한 후에도 토론은 이어졌다. 밤 12시가 넘도록 ‘다시’의 연속이었다. 보다 못한 홍라희 여사가 “사람들도 피곤하니 이제 그만 답을 알려 드리세요. 그래야 내일 또 일을 할 수 있죠”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회장은 그제야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선문답 같은 답을 내놓으며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비행기 탑승 전 만 하루, 비행기에서 10시간이 넘는 시간, 현지 도착 후 밤 12시가 넘도록 한숨도 잠을 자지 않았다.

정리 정돈을 잘한다는 것은 결국 남에게도 좋은 일이다. 남을 배려하고 애정을 베풀면 그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결국 동료·회사·고객을 자신만큼 사랑하는 것이 삼성이 세계 일류에 오를 수 있다는 이 회장의 결론이었다.

◆ 신경영은 결국 ‘나를 사랑하는 일’


K보고서 전인 1993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회의를 사실상 신경영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 회장과 삼성의 주요 임원들이 LA의 전자상가를 둘러본 일이었다. ‘한국 1등’이라는 자부심은 그곳에서 처참하게 깨져나갔다.

진열대의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은 소니·도시바·NEC 같은 일본 제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다음이 오히려 미국산이었고 삼성 제품은 맨 밑바닥에서 먼지만 뒤집어 쓴 채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어떤 제품은 고장 난 채로, 또 어떤 제품은 덤으로 끼워 파는 경품 신세였다. 제 손으로 힘들게 탄생시킨 자식(제품)들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 회장은 당시 회사의 핵심 임원에게 “일본에 가서 전문가들과 토론해 보니 모두 ‘삼성이 이대로 가면 망한다’고 하더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일본인 고문의 보고서, 세탁기 부품 불량을 칼로 깎아 맞추던 삼성 내부 방송의 고발 영상, 해외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삼성 제품들을 보며 이 회장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생존을 위협하는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이 신경영, 즉 ‘양에서 질로의 변화’였다. 세계 일류가 무엇인지 몸으로 깨닫게 해주기 위해 200명이 넘는 임원들을 68일간이나 세계로 끌고 다닌 것이다. 세계 기업사에서 리더들의 마인드를 바꾸기 위한 이런 집중적인 교육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 최고를 직접 확인한 삼성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현장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월드 베스트’ 삼성의 시작이었다.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 그래야 비서실이 변하고 계열사 사장과 임원이 바뀐다. 과장급 이상 3000명이 바뀌어야 그룹이 바뀔 수 있다. 그 시기는 나도 모른다. 1년, 2년, 3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 5년간 이런 식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걸겠다. 그래도 바뀌지 않으면 그만두겠다. 10년을 해도 안 된다면 영원히 안 되는 것이다.”

◆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


1993년 6월 말, 런던 출장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난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의 충격을 또 한 번 이어간다. 바로 ‘7·4제’ 실시다. 이 회장은 하네다공항에서 서울로 전화를 걸어 ‘아침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으로 근무시간을 전면 재조정하도록 지시했다. 스마트워킹이 일반화된 요즘 기준으로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7·4제는 변화의 시작, 질 경영의도 시작을 몸으로 체화시키기 위한 이 회장의 고육지책이었다. 처음에는 눈치 때문에 퇴근을 미루는 직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는 이 회장의 불호령에 차츰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업무 양은 줄이고 질은 높인다’는 7·4제의 핵심은 직원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의도도 있었다. 4시에 퇴근해 자기 계발 시간을 갖거나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그만큼 기업과 제품의 질도 높아진다는 결론이었다.

◆ 또 한 번의 충격 ‘7·4제’

“비행기가 음속을 돌파하기 위해선 소재와 부품이 모두 바뀌어야 한다”는 이 회장의 지론은 ‘라인스톱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품질을 위해서는 라인을 세우라는 지시다. 당시 삼성 TV의 불량률은 6~8%에 달했다. VCR·냉장고·전자레인지·세탁기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 회장은 “3만 명이 만들고 6000명이 수리하는 삼성전자는 망한 회사나 다름없다”고 강하게 질책했다.

당시만 해도 결함은 최종 조립 라인에서 걸러내고 해결하는 게 관행이었다. 수십·수백 번의 공정 가운데 어는 한 곳의 불량으로 라인 전체를 세운다는 발상은 혁명적이었다. 이 회장은 “질을 위해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무조건 공장 가동을 멈추라”고 전 계열사에 지시했다.

이 회장의 창조적 파괴는 1995년 ‘불량 제품 화형식’에서 절정에 달했다. 1994년 당시 삼성전자 무선사업부는 무리한 제품 출시로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때마침 직원들에게 추석 선물로 지급한 무선전화기에 불량이 발견됐다. 이 회장은 신경영 이후에도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강하게 질책했다. 뒤이어 15만 대의 전화기가 구미 사업장 운동장에 쌓였다.

2000여 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머를 든 몇 명이 전화기를 내리쳤다. 산산조각 난 전화기들이 불구덩이 속에 던져졌다. 엄청난 충격요법이었다. 1994년 4위에 그쳤던 삼성 무선전화기의 점유율은 이듬해 1위로 올라섰다.

가전, 카드·보험 등 금융, 반도체 등 삼성의 저력은 신경영을 통해 획득한 수확이었다. 특히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하늘을 날려 한다”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었던 반도체 사업은 1993년 6월, 세계 최초의 8인치 16메가 D램 생산에 성공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당시 한국이 유일하게 세계 최고를 점하는 기술이 바로 16메가 D램이었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쌓인 한국의 무역 적자는 774억 달러에 달했다. 그나마 삼성의 반도체 사업이 아니었다면 적자 폭은 몇 배로 늘어나는 착시 효과까지 겹쳤다.

이 회장은 당시 “지난 신경영 3년의 성과는 대체로 긍정적이지만 아직도 변화의 속도는 느리고 물리적 변화에 비해 소프트적 변화가 미흡하며 변화의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며 “다들 정신 차리라”고 일갈했다. 1년 뒤 다가올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내다본듯한 경고였다.

◆ “위기를 무사히 넘긴 유일한 대기업”


1997년 11월 외환위기가 터졌다. 금리가 하루아침에 30%대로 치솟고 외국인 자금이 썰물처럼 빠졌다. 은행은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 능력을 상실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대기업들이 그룹 해체와 축소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삼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삼성전자에서만 3만 명이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떠났다. 해외 부문 사업과 자산도 과감히 매각했고 삼성자동차 관련 부실은 이 회장이 사재(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내놓으며 일단락됐다.

과감하고도 선제적인 구조조정은 놀라운 속도로 위기를 벗어나는 원동력이 됐다. 1999년 삼성전자의 전 해외법인이 흑자를 달성했는가 하면 1999년 17조 원에 달했던 순차입금 규모도 2003년 들어선 3000억 원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당시 30대 그룹의 거의 절반이 퇴출됐고 중견기업의 27%가 사라졌다. 2003년 11월 ‘뉴스위크’는 ‘은둔의 왕(The Hermit King)’이라는 커버스토리에서 이건희 회장과 삼성의 성장을 소개했다.

“삼성은 금융 위기를 무사히 넘긴 유일한 재벌이었다. 한국 기업들의 모범이 될 만했고 실제로도 모범이 됐다. 현재 삼성은 한국 역사상 그 어떤 기업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한경비즈니스 이건희 회장 추모 특별판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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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0호(2020.10.26 ~ 2020.11.0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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