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
대형마트·온라인마켓 결합한 인터넷 슈퍼, 코로나19 이후 대안 쇼핑 공간으로 각광
[한경비즈니스 칼럼=도쿄(일본) 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 ‘디지털 후진국’ 일본의 유통 시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급변하고 있다. 대형마트와 온라인 마켓을 결합한 인터넷 슈퍼가 코로나19 이후의 대안 쇼핑 공간으로 각광받으면서 이 시장을 선점하려는 대형 유통 회사와 정보기술(IT) 대기업이 한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먼저 포문을 연 쪽은 일본 최대 온라인 상거래 업체인 라쿠텐이다. 라쿠텐은 11월 15일 미국 월마트가 보유한 일본 대형 슈퍼마켓 체인 세이유그룹을 세계 4대 사모펀드(PEF)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와 공동으로 인수하는데 합의했다.
KKR과 라쿠텐이 지분 65%와 20%를 인수하고 월마트가 나머지 지분(15%)을 보유하는 구조다. 세이유의 기업 가치는 1725억 엔(약 1조8506억원)으로 평가됐다.
세이유는 일본 전역에 300개 이상의 점포와 3만5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형 슈퍼마켓 체인이다. 한때 ‘동쪽의 세이유, 서쪽의 다이에’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을 대표하는 유통 대기업이었지만 2008년 월마트에 인수된 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월마트는 2018년 수익성이 시원찮은 세이유를 매각하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기대한 탓에 실패했다. 이번에는 기대 가격을 절반으로 낮춰 매각을 눈앞에 두게 됐다.
라쿠텐의 세이유 인수는 ‘아날로그 대국’ 일본에서 인터넷 슈퍼마켓 경쟁의 막을 올린 거래로 평가된다. 2019년 일본의 전자 상거래 시장 규모는 10조 엔으로 1년 전보다 8% 증가했지만 전체 유통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에 불과하다. 전 세계 유통 시장에서 전자 상거래가 차지하는 평균 비율(약 14%)의 절반에 그친다. 코로나19 이후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고 사람 간 접촉을 피하는 방식으로 소비 패턴이 바뀌면서 일본에서도 전자 상거래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특히 주목받는 분야는 온라인 마켓과 오프라인 슈퍼마켓의 장점을 결합한 인터넷 슈퍼마켓이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신선식품을 가까운 오프라인 슈퍼마켓이 배송하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계산대에서 줄을 서지 않고도 결제가 가능한 오프라인 마트, 오프라인 마트를 거치지 않고 중간 물류 창고에서 고객에게 직접 배송하는 온라인 마켓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라쿠텐, 오프라인 슈퍼 인수로 포문 열어
라쿠텐이 세이유와 제휴해 2018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인터넷 슈퍼의 매출은 지난 7~9월 작년 같은 기간보다 36% 증가했다. 10월에는 55% 늘었다. 일본에서 라쿠텐과 전자 상거래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아마존닷컴도 온라인과 오프라인 소매 시장의 융합을 급속히 확대하고 있다. 지난 7월 일본 슈퍼마켓 체인인 라이프코퍼레이션과 제휴해 수도권에서 인터넷 슈퍼 사업을 시작했고 최근 들어 오사카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아마존과 라쿠텐의 무기는 1억 명의 회원을 둔 인터넷 플랫폼이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구매 데이터를 분석하면 소비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화한 맞춤형 상품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AI의 수요 예측에 기반한 재고 관리와 가격도 설정할 수 있다. 라쿠텐은 이용자의 속성과 구매 이력, 선호하는 가격대 등 920개에 달하는 항목의 빅데이터를 AI로 분석해 고객들을 인터넷 슈퍼로 끌어들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라쿠텐 관계자는 요미우리신문에 “오프라인 슈퍼마켓 고객을 라쿠텐이 보유한 상거래 생태계에 편입시키면 아직까지는 온라인으로 구매 비율이 낮은 신선식품의 매출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 4월 이동통신 시장과 보험·증권업에 진출하는 등 70여 개에 달하는 사업을 운영하는 라쿠텐은 세이유의 오프라인 점포망과 결합한 고객 확대도 기대하고 있다. 세이유의 전국 점포에 라쿠텐의 각종 온라인 서비스 창구를 개설해 단숨에 신규 고객을 늘린다는 목표다.
대규모 신규 사업 진출에 따른 재무 건전성 위험은 세계 최대 PEF 가운데 하나인 KKR을 끌어들여 해결했다.
'텃밭 사수' 나선 유통사, IT 접목해 반격
라쿠텐은 휴대전화 기지국 정비 등을 위해 올 1~9월에만 설비 투자로 3648억엔을 쏟아부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0% 늘었다. 그 결과 9월 말 기준 그룹 부채 규모(금융 사업 제외)가 1조307억 엔으로 3년 새 2배 넘게 증가했다. KKR을 끌어들여 1380억 엔에 달하는 인수금액의 3분의 2를 떠넘김으로써 인터넷 슈퍼 확장에 투자할 여력을 확보했다는 분석이다.
온라인 상거래 업체들이 오프라인 유통 시장을 잠식해 들어오자 일본의 유통 기업들도 텃밭 사수에 비상이 걸렸다. 일본 최대 유통 기업 이온의 요시다 아키오 사장은 “코로나19 이후 변화의 스피드가 가장 빠른 것이 디지털화”라며 인터넷 슈퍼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영국 인터넷슈퍼 오카도와 제휴해 2023년부터 점포를 통하지 않고 창고에서 신선식품을 고객에게 직배송하는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일본 최대 편의점 체인인 세븐일레븐은 전국 2만1001개(2020년 10월 말 기준)에 달하는 점포망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고객이 인터넷으로 주문한 상품을 근처 편의점이 30분 이내에 배달하는 서비스를 내놓았다. 전 세계적으로도 IT 공룡과 유통 대기업이 서로의 영역을 뺏고 빼앗기는 경쟁이 거세지고 있다.
아마존닷컴은 2017년 인수한 고급 슈퍼마켓 체인 홀푸즈마켓과 온·오프라인 융합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달 하순부터 유료회원(프라임 회원)이 인터넷으로 주문한 신선식품을 500여 개의 홀푸즈마켓 점포를 통해 1시간 만에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최첨단 IT를 오프라인 슈퍼에 접목한 서비스도 잇따라 내놓았다. 지난 9월 말부터 미국 시애틀 등을 중심으로 계산대가 없는 슈퍼마켓 ‘아마존 고’를 시작했다. 생체 인증 시스템을 도입해 손바닥을 기기에 대면 결제가 완료되는 방식이다.
미국 전역에 4700여 개의 점포를 운영하는 월마트는 지역에 뿌리를 내린 네트워크와 온라인 마켓을 압도하는 취급 품목을 내세워 아마존에 맞서고 있다. 디지털 기술을 오프라인 슈퍼에 접목한 역공도 시작했다.
신흥 기업 얼러트이노베이션과 연계해 창고 자동화에 로봇 기술을 활용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월마트가 도입한 소형 로봇은 인간보다 10배 빠른 속도로 화물을 운반하고 수집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인터넷 상거래 최대 업체 알리바바집단이 인터넷 슈퍼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2016년 문을 연 계열 해산물 전문 슈퍼마켓인 푸마생선은 점포망을 물류 창고로 활용해 고객이 스마트폰으로 주문한 상품을 30분 이내에 배송한다. 지난 10월에는 약 3조원을 투자해 ‘중국판 월마트’로 불리는 대형 마트 체인 선아트리테일을 인수했다. 물류 거점을 늘리는 동시에 취급 품목도 훨씬 다양화할 수 있게 됐다.
중국 2위 전자 상거래 업체인 JD닷컴은 2016년 월마트로부터 투자를 받아 인터넷 슈퍼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두 회사의 고객 데이터를 공유한 판촉 활동을 벌이는 한편 30분 배송 서비스도 시작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5호(2020.11.30 ~ 2020.12.0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