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의 룰’ 바꾼 여전사...매일유업 김선희 사장의 '혁신 7년'


[SPECIAL REPORT]


매일유업 혁신 주역 김선희 사장…우유 넘어 국민영양식 신시장 개척






[한경비즈니스 칼럼=김보라 한국경제신문 기자 destinybr@hankyung.com] 한국 200대 상장 기업 중 여성 등기 임원의 비율은 2.7%다. 지난해 기준 200대 상장사의 등기 임원 1444명 중 여성은 39명이다. 여성 등기 임원이 1명도 없는 기업도 168곳에 달한다. 미국(28.4%)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 여성 대표이사 수는 더 적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김선희 매일유업 사장, 한성숙 네이버 사장 등 3명이 전부다. 유리천장이 높은 한국 기업 경영 환경 때문에 여성 기업인들이 갖는 무게감은 더 크다. 이들의 작은 행보에도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지난 7년간 여성 전문 경영인으로서 업계에 ‘조용한 돌풍’을 일으킨 이가 있다. 보수적인 식품업계 중에서도 더 보수적인 곳으로 통하는 우유업계에 ‘파괴적 혁신’을 일으킨 김선희 매일유업 사장이다. 그는 ‘한 번 1등은 영원한 1등’이라는 공식으로 반세기 넘게 큰 변화가 없었던 우유업계에서 ‘경쟁의 룰을 바꾼 여전사’로 불리고 있다.


10여 년간 우유 시장은 침몰하는 배와 같았다. 출산율이 떨어지며 우유의 주 소비층인 영유아·어린이 인구가 계속 줄었다. 반면 외국산 수입 분유와 우유는 시장점유율이 계속 상승했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미국·호주·뉴질랜드 등 낙농 선진국 제품들이 좋은 품질에 싼값을 앞세워 대거 한국 시장에 들어왔다. 관세가 점점 철폐될 예정이어서 단기간 이들과 싸워 경쟁력을 갖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업계에선 ‘이대로 가면 다 망할 것’이라는 비관론만 나왔다. 내수 시장이 침체되며 경쟁이 날로 심화됐다. 흰 우유 시장의 절대 강자인 서울우유협동조합과 남양유업·매일유업 3사는 끝을 모르는 지루한 점유율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우유만 만들지 말라”

김 사장은 ‘파괴적 혁신’을 외쳤다. 1969년 창립해 국민 건강을 책임져 온 회사가 이대로 침몰하게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바탕이 됐다. 흰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면 우유를 사용한 커피 음료, 우유의 유청 단백질을 활용한 영양식, 우유를 대체할 식물성 단백질 등의 제품으로 변화하면 된다고 주문했다.


그 결과 7년간의 최고경영자(CEO) 재임 기간에 1등으로 밀어올린 브랜드가 여러 개다. 단백질 건강기능식품 ‘셀렉스’와 컵커피 ‘바리스타룰스’, 우유를 대체할 식물성 음료 ‘아몬드브리즈’ 등이 그렇게 시장을 리드하는 브랜드가 됐다.


없던 시장을 새로 만든 것 역시 김 사장의 혜안이다. 중·장년층의 근력 감소를 방어하는 성인 영양식은 한국에 없었던 제품군이다. 그는 분유와 우유 중심으로 0세부터 10세까지 영유아·어린이 소비자만 바라보던 매일유업을 0세에서 100세까지 끌어안는 종합 식품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금융 전문가, 보수적 시장에 돌을 던지다

글로벌 금융 회사에서 리스크 관리 본부장 등으로 일하던 김 사장이 매일유업에 합류하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사촌 지간인 김정완 매일유업 회장이 함께 일본의 낙농업체들을 돌아보자고 한 것. 홋카이도 등에서 고품질의 낙농산 업체들을 돌아보고 난 그는 “매일유업도 고부가 가치 식품 산업으로 도약할 기반이 필요한 때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누구나 레드오션이라고 불렀던 유가공 시장이 오히려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여행이었다.


당시 ‘고령화’라는 벽이 있었다. 유업계엔 악재 중 악재였다. 김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숫자와 통계에 밝은 김 사장은 급격하게 늘어나는 50대 이상 고령층에서 해답을 찾았다. 근력이 줄어드는 고령층을 위한 단백질 강화 건강기능식품을 개발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미국에선 이미 10년도 더 전부터 30~40대 여성들이 단백질 보충제를 필수품처럼 챙겨 다니고 수시로 마시더군요. 한국보다 먼저 고령사회를 맞은 선진국들은 ‘근감소증’을 새로운 질병으로 분류하고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회사 내 근감소증 연구소를 출범시켰고 곧장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한국에선 술잔 대신 역기를 들어올린다는 뜻의 ‘덤벨 경제’도 주목받는 시기였다.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서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있었다. 매일유업은 업계에서 가장 먼저 단백질 식품 연구를 시작했다.


매일유업 중앙연구소 산하에 건강한 노년 생활을 위한 매일사코페니아연구소를 조직했다.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 의학영양학과·아주대병원 등과 함께 활발한 학술 연구와 인체 적용 시험 등의 종합적 연구를 진행했다. 3년간 제품을 개발해 2018년 10월 성인 영양식 브랜드 ‘셀렉스’를 출시했다. 전략은 통했다. 셀렉스의 매출은 올해 6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년여 만에 매일유업 전체 매출의 4%를 차지하는 효자 품목이 됐다. 중국 시장에도 진출해 단백질 음료와 파우더로 선전하고 있다.


김 사장의 도전 이후 경쟁사들도 모두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유업계뿐만 아니라 식품과 제과업계까지 넘본다. 단백질 건강기능식품 시장은 매일유업이 만들어 주요 식품사가 사활을 걸고 뛰어드는 주요 승부처로 떠올랐다.










‘소비자의 눈’으로 시장을 본다

김 사장이 유업계에서 성공한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유업계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낙농업·식품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전략을 시도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유를 마실 인구는 줄어드는데 낙농가에서 파는 원유 가격은 매년 오르는 기형적 상황, 어두운 터널 속에서 그는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다른 생각을 했다. “젊은 층이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면 우유 대체 식품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면 된다”는 게 그의 전략이었다.


김 사장은 매일유업이 1969년부터 쌓아 온 유가공 기술을 바탕으로 남아도는 우유를 고부가 가치 제품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 해외 현장을 누비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전엔 글로벌 트렌드를 볼 수 있는 국제 식품박람회가 열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갔다. 세계 곳곳에서 발품 팔아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국내 시장과 소비자를 철저히 분석했다.


‘퍼스트 무버’ 제품들은 김 사장이 소비자의 눈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멸균 유제품과 멸균 팩 등은 일반 유제품에 비해 유통 기한이 길어 온라인 유통 시장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한국 최초로 멸균 우유를 만들었던 매일유업은 이 고유의 기술력을 활용해 대리점 중심의 영업에서 온라인 중심의 영업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우유의 지방 함량을 0%, 2% 등으로 나눠 나온 제품도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한 결과다. 유럽 등 낙농 선진국에는 용도와 체질에 따라 우유를 다르게 소비하는데 국내 시장엔 브랜드만 있을 뿐 이 같은 분류 자체가 없다는 문제에서 착안했다. ‘소화가 잘되는 우유’도 관찰과 연구의 결과다. 한국인 네 명 중 세 명은 우유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유당불내증’에 해당한다. 유당불내증 때문에 우유 소비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소화가 잘되는 우유’를 만들었다.


‘아몬드 브리즈’도 비슷한 개발 과정을 거쳤다. 김 사장은 미국에서 두유보다 세 배 이상 잘 팔리는 아몬드 음료를 찾아냈다. 칼로리가 낮은 저칼로리 음료의 인기가 높은 한국 2030 시장에서 승산이 있을 것으로 봤다. 글로벌 아몬드 공급 회사 블루다이아몬드와 손잡고 원료를 들여와 100% 국내 생산에 나섰다. 건강과 몸매를 관리하는 사람들, 비건 인구 등이 늘면서 이 제품의 매출은 매년 60% 이상 성장하고 있다.


인재는 키우고, 비효율은 버리다

이 모든 변화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 관리다. 김 사장은 조직의 변화를 위해 ‘메기 효과’를 노렸다. CJ와 삼성전자 임원 출신 등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동료들이 많아지면 기존 조직의 역량도 극대화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생애 주기를 책임지는 종합 식품 회사’라는 비전에 맞지 않는 사업은 과감하게 정리했다. 중식 레스토랑 ‘크리스탈 제이드’와 이탈리아 레스토랑 ‘더 키친 살바토레’ 등만 남기고 부진한 외식 브랜드는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충분한 소통을 통해 잡음은 없었다. 지금도 유업계 유일한 여성 CEO인 김 사장은 “여성의 소통 능력이 회사 내·외부 소통과 문제 해결 과정에서 강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김 사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가족’이다. 분유와 우유를 뿌리로 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매일유업 내부에서 이 같은 가치를 키우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여겼다. 그는 여성 CEO로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고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장 취임 직후 육아 문제로 고민하는 직원들을 위해 탄력근무제를 도입했다. 출산 휴가도 적극 권장했다. 지난해에는 임신한 직원 가족을 서울시내 호텔로 초청해 1박 2일 육아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김 사장은 현장에서 얻은 영감을 바로 실행으로 옮기는 현장형 리더이기도 하다. 한번 실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추진한다. 이 같은 일하는 방식을 조직에도 도입했다.


“기회가 보이면 빨리 움직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타이밍·퀄리티·마케팅 등 세 박자가 맞아떨어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보고를 위한 보고서를 만들 시간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우선 실행하는 게 좋습니다. 실패하더라도 말이죠.”


김 사장은 혁신하는 일에 지칠 줄 모른다. 2017년 지주회사 매일홀딩스를 설립했다. 지배 구조를 단순화해 경영 비효율을 제거해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지난해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협업해 사내 데이터를 모두 클라우드로 이전했다. 한국 기업 중 대한항공에 이어 두 번째 시도였다.


그의 취임 일성은 ‘식품 그 이상, 한국을 넘어(More than food, Beyond Korea)’였다. 이후 매일유업의 눈은 늘 해외를 향했다. 매일유업의 판매 시장을 중동·동남아시아 등으로 넓히고 제품군을 프리미엄 유기농 제품과 영유아용 이유식 쪽으로 확장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 컵커피 1위인 바리스타룰스가 편의점 커피 시장을 장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새로운 시장 창출과 사업 다각화 노력에 힘입어 매일유업은 지난해 영업이익 기준으로 유(乳) 업계 1위에 올랐다.

돋보기

주위에서 보는 김선희 사장은…


김선희 매일유업 사장은 한국 우유 가공업계에서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다. 식품업계를 통틀어서도 보기 드문 홍일점이다. 그는 우유업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금융업에서 시작했다. 연세대 불문과를 졸업한 김 사장은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MBA 전공은 재무였다. 그 후 BNP파리바은행 한국지점과 크레디아그리콜은행 한국지점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다 한국씨티은행 신탁위험 관리부장, 투자은행 UBS 아시아태평양지역 위험관리부문 이사 등을 거쳤다.


김 사장이 매일유업에 합류한 것은 2009년이다. 제품 품질 관련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매일유업 회사 전체가 흔들리던 때였다. 생존까지 걱정해야 할 위기의 순간이었다. 김정완 매일유업 회장은 서울우유협동조합·남양유업 등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독한 변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무통으로 불리면서 똑 부러지는 ‘사촌동생’인 김 사장을 회사로 불러들였다.


김 사장의 첫 직책은 재경본부장(전무)이었다. 그는 “첫 3년은 우리 부서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내 문화(부서 이기주의)와의 싸움이었다”고 회고했다. 몇 년이 지나 2014년 매일유업 사장에 취임한 그는 회사 분위기를 크게 바꿔 놓았다. 김 사장은 뜻하지 않게 CEO 자리에 오르게 된 때를 떠올리며 “마치 (넷플릭스 드라마 속) 지정 생존자가 된 것 같았다”고도 회상했다.


저출산과 고령화라는 도전 과제를 다양한 신제품으로 정면 돌파한 그의 전략 뒤에는 소비자와 직원들의 작은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는 ‘어머니 리더십’이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는 회사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든 직원들에게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실질적인 복지 제도를 많이 만들었다. 또 직원이나 고객이 보내는 사내 보고는 매일 빠지지 않고 챙긴다. 퇴근 전에 고객의 소리(VOC)를 챙기는 것도 CEO 취임 이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VOC는 회사 카카오톡 공식 계정과 전화·홈페이지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집돼 고객 상담실을 거쳐 김 사장에게 직접 보고된다.


그의 진정성은 사회 공헌 활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남들은 따라할 수 없는, 매일유업만 할 수 있는 후원 활동을 하자’는 게 그의 원칙이다. 혼자 사는 노인들의 안부를 묻는 ‘사단법인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과 손잡고 2016년부터 정기 후원해 왔다. 올해부터는 ‘소화가잘되는우유’ 매출의 1%를 기부하기로 했다. 미혼모 지원과 선천성 대사증후군 아이들을 위한 기부 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7호(2020.12.14 ~ 2020.12.2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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