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법 구내약국’에 제동 건 대법원… 매각 건물이지만 병원과 담합 가능성 [법알못 판례 읽기]
입력 2020-12-25 09:21:56
수정 2020-12-25 09:21:56
[법알못 판례 읽기]
병원과 공간적·기능적으로 분리돼야 약국 허용…
건물주 된 의료 도매상도 병원과 밀접한 관계
[한경비즈니스 칼럼=이인혁 한국경제 기자 twopeople@hankyung.com] 병원을 갔던 기억을 돌이켜 보자. 아무리 대형 병원이더라도 병원 안이나 구내에 약국이 있는 곳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병원 밖을 나갔을 때 보이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약국들 중 한 곳을 골라 약을 샀을 것이다.
약사법에서 ‘구내약국’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과 약국의 담합을 막는다는 취지다. 하지만 최근 ‘편법 구내약국’ 논란이 일어 문제가 됐다. 병원 측이 제삼자에게 인근 부지를 매각해 소유권을 넘긴 후 더 이상 병원 건물이 아니게 됐다는 이유로 해당 위치에 약국이 들어서는 식이다. 약사법 규정을 우회한 이 같은 꼼수에 대해 대법원이 제동을 건 사례가 최근 나와 주목 받고 있다.
의료 도매상에게 건물 매각한 병원
약사법에는 약국의 개설 등록을 거부할 수 있는 장소 규정이 자세히 제시돼 있다. 먼저 약국을 개설하려는 장소가 의료 기관의 시설 안 또는 구내인 경우다. 의료 기관의 시설 또는 부지의 일부를 분할·변경 또는 개수(改修)해 약국을 개설하는 경우나 의료 기관과 약국 사이에 전용 복도·계단·승강기 또는 구름다리 등의 통로가 설치돼 있거나 이를 설치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병원과 약국의 담합 가능성을 막아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취지다. 의약품의 오남용을 방지하고 약제비를 절감해 국민 건강을 증진시키는 등의 의약 분업 제도의 취지를 달성하기 위한 차원이다.
2018년 천안시와 A약국 사이 약사법 위반 여부를 둘러싼 소송전이 시작됐다. 학교법인 단국대학은 2016년 B 의약품 도매 업체에 단국대병원의 복지관으로 사용하던 건물과 부지를 매각했다. 해당 건물의 1~2층엔 편의점·식당·카페 등 편의 시설이 입주해 있었고 3층엔 단국대병원 직원들의 기숙사가 있었다. 한때 2층에 단국대병원 사무실이 있기도 했다.
이후 A약국이 해당 복지관 건물에 개설 등록을 신청했지만 천안시가 거부하자 A약국이 소송을 냈다. 천안시는 사실상 구내약국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지만 A약국은 “해당 건물은 단국대병원과 완전히 분리돼 있고 해당 건물에 병원의 진료 시설이 입주해 있지 않다”고 맞섰다.
대법원은 구내약국 여부를 가릴 때 ‘병원과 약국 사이 공간적 기능적 독립성’ 여부를 살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가령 약국이 병원에 얼마나 인접해 있는지, 약국이 입주한 건물이 환자들의 동선에 있는지, 약국이 입주한 건물에 병원 시설도 입주해 있는지, 병원과 건물 사이 뚜렷한 경계가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같은 건물에 개인 의원과 약국이 입주한 경우 약국이나 병원이 모두 임차인에 불과한 곳이 많아 병원이 약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이 같은 요소들을 모두 종합해 약사법 위반 여부를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1심은 단국대병원과 A약국은 공간적·기능적으로 분리된다며 A약국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해당 건물엔 커피숍·식당 등 다른 가게들이 간판 등을 게시해 영업을 하고 있는 점 등을 볼 때 환자들이 A약국을 구내약국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며 “단국대병원에서 A약국으로 곧바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 등이 있지도 않다”고 판단했다.
1심 판결 이후 인근 약국들 참전
그러자 단국대병원 인근 약국들이 피고 보조 참가인 자격으로 소송전에 참여하며 판이 커졌다. A약국과 천안시 사이 다툼이었던 1심과 달리 항소심은 사실상 A약국과 단국대병원 인근 다른 약국들 사이 대결 구도로 재편됐다.
결론은 A약국의 패소였다. 먼저 해당 건물에 식당 편의점 등 편의 시설뿐만 아니라 광역치매센터·피부연구센터·간호사 기숙사 등 단국대병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시설이 입주하고 있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병원의 이용객과 일반인들은 해당 건물과 단국대병원 사이에 일정한 업무적·기능적 연관 관계가 있다고 오인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판단했다. 또 “해당 건물과 단국대병원 사이에 다른 건물이 없어 환자들이 A약국을 용이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2심은 “의약 분업의 근본 취지는 약국을 의료 기관으로부터 공간적·기능적으로 독립시켜 담합을 방지하는 데 있는 것이지 약국을 의료 기관이 들어선 건물 자체로부터 독립시키려는 데 있지 않다”며 단국대병원과 A약국의 건물주인 B업체 사이 관계에도 주목했다. 재판부는 “B업체는 실질적으로 단국대병원에 대한 의약품 납품을 독점하고 있다”며 “건물 소유자가 병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면 장차 임차인인 A약국 역시 병원과 담합해 의약 분업의 취지를 몰각시킬 수 있다는 합리적인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키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항소심 판단은 대법원에서도 확정됐다.
피고 보조 참가인(인근 약국들)을 대리해 항소심에서 역전을 이끌어 낸 박상현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현장검증을 신청해 재판부가 직접 현장을 둘러볼 수 있도록 하고 B업체와 단국대병원 사이 관계를 좀 더 부각시킨 것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이어 “A약국이 소송 과정에서 단국대병원 측 자료를 B업체를 통해 확보해 제출한 사실과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B업체가 A약국으로부터 월세를 받지 않은 사실 등을 확인했다”며 “3자(A약국·B업체·단국대병원) 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돋보기
1심 판결 뒤집은 태평양 행정소송팀…
의료소송·행정심판·자문에서 두각
‘단국대병원 구내약국 논란’ 소송전에서 1심을 뒤집고 ‘약국 개설 불가’라는 최종 승소를 이끌어 낸 곳은 법무법인 태평양의 행정소송팀이다. 태평양 행정소송팀에는 의료와 약학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이번 사건은 1심에서 한 중소형 로펌이 피고(천안시)를 대리했지만 패소했다. 항소심에서 단국대병원 인근 약국들이 피고 보조인 자격으로 소송에 참여했고 대리인으로 태평양을 내세우면서 피고가 최종 승소할 수 있었다.
태평양 행정소송팀은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과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 등을 역임한 송우철 송무총괄 대표(사법연수원 16기)가 이끌고 있다.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출신인 김종필(18기)·박태준(22기) 변호사도 주축이다. 이번 소송을 진두지휘한 유욱 변호사(19기)는 현재 태평양 규제그룹장을 맡고 있고 박상현 변호사(30기)는 판사 출신으로 행정심판위원회 민간위원 등으로 활동한 바 있다.
이 밖에 제약 특허 소송 분야 전문가인 박정희 변호사(22기)와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에서 근무했던 안효준 변호사(38기), 제약 라이선싱 분야 전문가인 남문기 변호사(30기), 제약 형사 분야 전문가인 이희종 변호사(33기) 등이 속해 있다.
태평양은 의료 관련 각종 소송과 행정심판, 자문 사건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당시 의료 기관에 대한 과징금 부과 처분 사건, 2017년 제약회사 제조 의약품 전체에 대한 약가 인하 처분 취소 사건 등을 담당했다. 발암 물질 논란이 일었던 ‘발사르탄 사태’와 관련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한 구상금 소송에서 현재 36개 제약 회사를 대리하고 있기도 하다.
국내외 기업과 병원들을 상대로 의료 기록 등 개인 정보 활용,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 활용, 원격 진료, 신약 개발 관련 규제 등 다양한 자문 업무도 수행하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8호(2020.12.21 ~ 2020.12.2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