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적 지위 가진 ‘슈퍼 을’과의 협상,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입력 2020-12-25 09:23:19
수정 2020-12-25 09:23:19
[경영 전략]
당신이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보여줘야…
결렬 대비한 ‘배트나’ 실행 준비도 필요
[한경비즈니스 칼럼=이태석 IGM세계경영연구원 교수] 대기업에서 구매를 담당하는 김 모 팀장은 난감했다. 재료비를 15% 절감해야 하는데 공급 업체인 A사에서 가격 인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품목은 최첨단 제품이어서 A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공급받기 어렵다. 독점적 지위를 가진 소위 ‘슈퍼 을’이라고 할 수 있다.
김 팀장은 양 사의 오랜 거래 관계를 강조하며 A사 측을 대표하는 협상자를 달래기도 하고 으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심지어 A사는 다른 수요 업체의 ‘러브 콜’을 받았다며 최근에는 오히려 가격을 올리겠다고 한다. 물량을 서로 달라고 하니 줄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라는 것이다. 김 팀장은 말문이 턱 막혔다. 대량 구매라는 당근도 소용없었다. 이건 구매가 아니라 차라리 배급이라는 표현이 맞다. 참고 참았던 분노가 폭발 일보 직전이다.
질문으로 상대의 생각을 움직여야
김 팀장 사례처럼 ‘슈퍼 을’을 상대하는 협상은 쉽지 않다.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상대 조건을 대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다. 구매자로서 자존심도 상한다. 때로는 맞불 작전으로 나가고 싶지만 결정적인 힘이 없다. 만약 맞대응한다면 사태가 악화될 수 있다.
서로 자기주장만 고집하게 되고 자칫 감정 대립으로 번질 것이다. 합의한다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형국으로 바뀔 것이다. 진퇴양난이다. 힘으로 밀어붙일수록 상대를 ‘예스’라고 말하기 더 어렵게 만든다. 이것이 ‘힘의 역설’이다. 힘을 사용하면 항복이 아니라 더 큰 반항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관계가 악화되거나 거래의 단절·파업·소송으로 이어진다. 회사는 중요한 고객을 잃고 소송은 장기화된다. ‘윈-윈(win-win)’이 아니라 ‘루스-루스(lose-lose)’가 된다. 눈에는 눈으로 맞서다가 모두 장님이 되고 만다.
어떻게 해야 이런 ‘힘의 역설’을 극복하고 파국을 막을 수 있을까. 윌리엄 유리 하버드대 교수는 ‘문제 해결’과 ‘파워 게임’을 동시에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상대가 합의를 거부하는 이유는 대부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A사는 자사 제품에 대한 수요가 넘쳐나기 때문에 구매자인 김 팀장의 요구에 굳이 응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다. 이제 그 믿음이 잘못됐다는 것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스스로 깨닫는 것만큼 효과적인 설득은 없다.
양측이 양보하지 않고 맞선다면 모두 피해자가 된다는 점을 알려 주는 것이 좋다. 어쩌면 상대가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인지하고 있더라도 그 심각성까지는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상대 스스로 깨닫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질문이다. 질문을 통해 현실에서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물어보자.
“만약 서로 합의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결과가 벌어질지 알고 있나요.”
“양 사의 오랜 우호 관계가 단절될 수도 있는 상황을 당신은 감당할 수 있나요.”
상대가 그 문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생각하고 있었더라도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점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는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려고 할 것이다. 이때는 다른 질문으로 당신의 힘을 깨닫게 해주는 방법이 있다.
“협상이 결렬된다면 우리는 공급자를 잃고 당신도 소중한 고객을 잃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장을 세울 수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런 질문을 통해 생각하는 만큼 당신이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당신의 태도다. 공손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다. 또 양 사가 입을 손실과 합의할 경우 얻을 수 있는 혜택을 알려주고 이를 비교해 보여 줘야 한다. 서로가 시너지 효과를 내는 유일한 길은 윈-윈 게임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는 결렬에 따른 결과를 감수할 것인지, 아니면 합의의 다리를 건널 것인지 기로에 서게 된다. 선택권을 상대에게 넘겨주고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잠재적 대안을 실행에 옮길 준비에 착수하라
때로는 질문만으로 충분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직접 말해 주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고집스러운 상대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충분하지 않지만 우리는 3개월 치 물량을 확보하고 있어서 당분간 공장을 계속 가동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 우리는 대체 공급자를 개발하거나 아니면 자체 생산, 나아가 인수·합병(M&A)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물론 힘들 겁니다. 하지만 그쪽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중요한 고객과 매출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것은 ‘위협(threat)’이 아니다. 일종의 ‘경고(warning)’다. 위협과 경고의 차이는 무엇일까. 둘 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초래될 결과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언뜻 보기에 비슷하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위협이 주관적이고 도전적인 것이라면 경고는 객관적이고 상대를 존중하는 메시지다.
상대를 괴롭히고 벌을 주겠다는 것이 위협이라면 경고는 위험에 대한 사전 고지다. 상황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날 결과를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는 설마 그렇게 하겠느냐면서 경고를 무시할 수 있다. 그럴 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상대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때는 다음 단계로 나갈 필요가 있다. ‘배트나(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를 실행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배트나는 협상 결렬 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뜻이다. 배트나가 있다는 말은 자기에게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이를 실행에 옮기라는 것은 아니다. 이 행동은 상대에게 강한 인식을 심어주는 데 효과적이다.
앞의 사례에서 김 팀장은 맞대응할지, 요구를 수용할지 진퇴양난이었다. 방법은 배트나를 개발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는 일이다. 즉 A사의 잠재적인 다른 경쟁사를 불러들이는 동시에 협상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흘리는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A사의 경영진이 이 소식을 접한다면 가만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김 팀장이 더 강한 신호를 원한다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죄송합니다만 지금까지 협상해 온 방식으로는 건설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논의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입니다. 검토해 보고 연락 주세요. 그때까지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다른 대안을 강구하려고 합니다.”
협상에서 파워는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다. 같은 힘이라도 막연한 힘보다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힘의 효과가 더 크다. 강한 신호와 함께 실제 행동을 눈으로 목격하게 되면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제 정리해 보자. ‘예스’를 끌어내는 힘은 압박이나 위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결렬됐을 때 결과와 합의했을 때 결과를 확실하게 대비해 주는 데서 나온다. 그리고 상대는 당신의 실제 행동을 보고 최종 판단을 할 것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8호(2020.12.21 ~ 2020.12.2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