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번역 소설 ‘대망’ 재출간한 출판사 대표, 유죄→무죄로 기사회생한 이유는


[법알못 판례 읽기]


저작권법 강화 이전인 1975년 첫 번역 출간…대법, 2005년 일부 수정판도 동일 출판물로 인정




[한경비즈니스 칼럼=남정민 한국경제 기자 peux@hankyung.com] 일본 베스트셀러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대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출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출판사 대표가 기사회생했다. 앞선 1·2심은 출판사 대표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가 1950년 3월부터 1967년 4월까지 17년간 집필한 소설이다. 15~16세기 일본 전국시대 무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대하소설인데 당시 일본 신문에 동시 연재돼 큰 인기를 끌었다.


사건은 1995년 한국의 저작권법이 개정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협정(TRIPS) 발효에 따라 한국 저작권법이 개정됐는데 개정안에 따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회복 저작물’이 된다. 쉽게 말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한국에서 출판하려면 원저작자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재판에 넘겨진 출판사 동서문화동판의 전신인 동서문화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번역해 1975년 4월부터 ‘전역판(全譯版) 대망(大望)’을 판매했다. 또 다른 출판사인 솔 출판사는 199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본 원출판사 ‘고단샤’와 정식 계약하고 2000년 1권을 펴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05년 동서문화출판사의 대표 고 모 씨가 1975년판 ‘대망’을 일부 수정해 다시 출간하자 솔 출판사는 “동서문화사 측이 허락 없이 책을 출판했다”며 검찰에 고발했다.


1·2·3심 판결 모두 달라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고 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 유예 1년, 동서문화동판사에 대해서는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고 씨의 저작물 발행 기간이 상당히 길고 발행 부수도 많다”며 “저작권 계약을 정식으로 맺은 출판사(솔 출판사)에 피해가 상당해 죄질이 좋지 않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1975년판 ‘대망’과 2005년판 ‘대망’을 동일한 저작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그간 고 씨 측은 2005년 출판한 ‘대망’은 1975년판의 단순 오역이나 맞춤법, 표기법을 바로잡은 것에 불과해 새로운 저작물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즉 1975년판과 2005년판이 같은 책이라는 취지다. 하지만 재판부는 1975년판과 2005년판의 수정 정도, 표현 방법 등을 보면 동일한 저작물이라고 볼 수 없고 1975년판을 수정해 출간하는 것을 허용하게 된다면 사실상 원저작물을 무제한 번역해 출간할 수 있는 결과에 다다르게 된다고도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피고인은 오랫동안 출판업에 종사했고 저작권이 문제되지 않을 때부터 책을 출판하고 있었다”며 “저작권을 이용할 권리에 대해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며 양형 사유를 밝혔다. 또한 “피고인 역시 상당한 노력을 들여 1975년판을 발행했고 그러던 중 예기치 않게 개정된 저작권법이 시행돼 결과적으로는 피해를 본 측면이 있어 보이는 점, 피고인에게 별다른 전과가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2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 항소부는 1심에서 징역형의 집행 유예를 선고받은 고 씨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1심보다 감형된 선고다. 2심은 마찬가지로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출판사와 고 씨에게 각각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


고 씨 등은 항소심에서 앞선 1심과 마찬가지로 2005년판 ‘대망’은 1975년판 ‘대망’의 내용을 일부 수정하거나 오탈자를 고친 결과물에 불과하므로 실질적으로는 동일한 저작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2005년판 ‘대망’은 구 저작권법 발효 시점 이전에 이미 작성을 완료했고 2004년 이후 작업은 최종 교정 작업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2005년판 ‘대망’이 수정, 증감된 정도를 보면 1975년판과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1심과 마찬가지로 혐의를 유죄로 보긴 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양형 부당을 이유로 원심을 깼다. 즉 인정된 혐의에 비해 선고된 형량이 너무 무겁다는 뜻이다. 재판부는 “고 씨 등은 범행을 부인하고 있고 저작권 침해의 정도도 상당히 크다”며 “고발된 후에도 계속 저작권 침해 행위를 해 그 죄책이 가볍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고 씨 역시 상당한 노력을 들여 1975년판 ‘대망’을 발행했다”며 “판매하던 중 예기치 않게 저작권법이 개정, 시행돼 피해를 본 측면이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 2차적 저작물의 이용 행위로 인정

고 씨의 혐의는 1, 2심 감형에 이어 3심에서는 아예 무죄 취지로 판단됐다. 사건이 처음 접수된 지 3년 만이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2020년 12월 21일 고 씨와 동서문화동판사에 각각 벌금 7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법원은 “2005년판 ‘대망’ 1권이 1975년판 ‘대망’ 1권과의 관계에서 저작권 침해를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2차적 저작물의 이용 행위에 포함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원심 판결이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우선 대법원은 저작물을 수정, 변경하면서 첨가된 새로운 부분의 창작성이 양적·질적으로 상당해 사회 통념상 새로운 저작물로 인정될 경우에 이를 때만 저작물 이용 행위에 포함된다고 판단했다. 즉 1975년판 ‘대망’의 내용의 오역이나 표기법·맞춤법을 바로잡은 정도의 2005년 ‘대망’은 새로운 저작물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대법은 “2005년판 ‘대망’ 1권은 1975년판 ‘대망’ 1권을 실질적으로 유사한 범위 내에서 이용했지만 사회 통념상 새로운 저작물로 볼 정도에 이르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1975년판 ‘대망’ 1권과 비교할 때 2005년판 ‘대망’ 1권은 구시대적 표현을 현대적 표현으로 수정하거나 번역 오류를 수정한 부분, 자주 쓰이는 유사한 단어를 단순하게 변경하거나 띄어쓰기를 수정한 부분들이 있다”면서도 “양 저작물 사이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1975년판 ‘대망’ 1권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표현을 그대로 직역한 부분도 많지만 이를 제외한 어휘 선택과 배열에서 창작적 노력이 나타난 부분이 다수 있다”며 “이러한 표현들이 2005년판 ‘대망’ 1권에도 상당 부분 포함됐다”고 말했다. 이어 “공통된 창작적인 표현들의 양적·질적 비중이 훨씬 크다”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1975년판과 2005년판 ‘대망’이 다른 책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돋보기

형사뿐만 아니라 민사 사건도 진행됐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 관련 사건은 혐의의 유·무죄를 다투는 형사 재판뿐만 아니라 소송가액을 다투는 민사 재판도 진행됐다. 2019년 5월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5부는 솔 출판사가 동서문화동판과 고 모 씨를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금지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동서문화동판이 무단으로 출간했다는 2005년판 등의 출판을 금지한다”며 “책 판매로 얻은 이익 등 1700여만원을 솔 출판사에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금액은 솔 출판사가 전집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한 권에 대해서만 제기한 손해 배상 판결이었다. 형사 재판부 1·2심과 마찬가지로 민사 재판부는 1975년판 ‘대망’과 2005년판 ‘대망’이 서로 다른 책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오탈자 수정이나 표기법 변경에 따른 수정을 넘어 1975년판에 없던 표현이 2005년판에 다수 포함됐다”며 “동서문화동판이 원저작자 허락 없이 저작 재산권을 침해했다”고 설명했다.앞선 2심에서 벌금이 700만원으로 줄어든 데는 이 민사 소송이 영향을 끼쳤다. 2심 재판부는 고 씨와 솔 출판사 사이 민사 소송에서 향후 조정이 성립해 피해 일부가 회복된 점을 고려했다며 벌금을 700만원으로 줄였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9호(2020.12.28 ~ 2021.01.0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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