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 도장도 인사하듯 기울여서’… 디지털 시대도 못 말리는 일본의 도장 문화


[글로벌 현장]

코로나19에도 살아남은 ‘겸양 도장 문화’…화상회의에도 상급자가 상단에 위치


[한경비즈니스 칼럼=도쿄(일본) 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결재 도장을 찍을 때 지점장란을 향해 기울여 찍으세요.” 2002년 제일권업은행·후지은행·일본흥업은행 등 3개 은행의 통합으로 탄생한 일본 3대 메가뱅크 미즈호은행. 도쿄의 한 지점에 새로 부임한 후지은행 출신 오쿠노 요코(당시 38세) 씨는 제일권업은행 출신 상사의 지시에 어안이 벙벙했다.

후지은행에서 인감은 문자를 반듯하게 세워 찍는 게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묻는 그에게 제일권업은행 출신 상사는 “지점장님을 향해 겸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사양함’, ‘겸양’을 뜻하는 일본어 ‘오지기(おじぎ)’에 ‘도장 인(印)’을 합한 ‘겸양 도장(おじぎ印)’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다.

계장은 ‘폴더 날인’ 전무는 ‘목례 날인’

20년이 지난 현재 미즈호은행 관계자는 “겸양 도장 같은 관행은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권과 일부 업종에서 겸양 도장의 문화가 여전히 폭넓게 남아 있다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겸양 도장은 결재 서류의 결재란에 도장을 찍을 때 직급이 낮을수록 도장을 왼쪽으로 기울여 날인하는 방식이다. 계장은 인감을 거의 90도로 기울여 ‘폴더 인사’하듯 찍는다. 과장은 45도, 부장은 30도로 직급이 올라갈수록 기울기는 줄어든다.

전무쯤 되면 목례하듯 15도만 기울여도 되는 게 겸양 도장의 불문율이다.이렇게 말단부터 사장까지 날인하고 보면 인감도장들이 가장 왼쪽의 사장란을 향해 일제히 인사하는 모양이 된다. 조직의 위계질서가 결재란에도 반영되는 셈이다. 사인 문화권에서는 하려야 할 수 없는 겸양법이다.

지금은 중견기업 임원으로 변신한 오쿠노 씨는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종업원이 수만 명인 회사에서 이러한 수고와 시간의 낭비가 거듭되면 상당한 비용이 된다”고 지적했다. 상사의 결재란을 향해 기울여 날인하는 방식이 예의에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후쿠시마 게이이치 전일본인장업협회 부회장은 “날인은 글자를 반드시 세워 찍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며 “비스듬히 기울이는 것은 아름다운 날인법도, 예의범절도 아니다”고 단언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 이후 일본은 디지털화에 뒤처진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의 경로를 추적하기는커녕 확진자 수 집계조차 실시간으로 하지 못한다. 지방자치단체 간 온라인 시스템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소비를 장려하기 위해 전 국민 1인당 10만 엔(약 105만원)씩 현금으로 지급하는 정책은 반 년 넘게 걸려서야 겨우 끝났다.

구청 직원들이 신청 접수부터 교부 작업까지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요 선진국들은 2주 만에 끝낸 일이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재택근무를 실시했지만 인감도장을 찍기 위해 직원들이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 때문에 2020년 9월 16일 새로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디지털화를 정권의 핵심 정책으로 내걸었다.

디지털화를 달성하기 위해 뜯어고쳐야 하는 인습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 게 인감 문화다. 인감이 필요한 행정 수속이 1만5000개에 달하다 보니 디지털화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가 총리는 일본의 뿌리 깊은 인감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고노 다로 전 방위상을 행정개혁·규제개혁상에 임명했다. ‘비용 삭감자(cost cutter)’란 별명을 가진 고노 장관에게는 ‘과감한 탈인감 정책’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취임 한 달 만인 2020년 10월 고노 행정·규제개혁상은 전체 행정 수속의 99%에 인감 날인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주민표 교부, 혼인·이혼신고서, 원천징수 서류 등에 인감을 찍을 필요가 없어지게 됐다. 올해 1월 18일 통상 국회에 관련 법안을 제출해 법으로 못 박을 계획이다.


코로나19가 낳은 신비즈니스 매너

정부의 정책에 호응해 기업들도 업무상 인감을 폐지하는 대신 전자 서명이나 전자 인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자연히 겸양 도장의 시대도 저물 것으로 기대됐지만 오히려 디지털화의 흐름을 타는 분위기다. 일본 인감도장 1위 업체 시야치하타의 전자 인감 서비스에서 겸양 도장의 질긴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시야치하타는 원래 목도장(크게 중요하지 않은 서류에서 본인 확인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도장. 막도장이라고도 부른다) 전문 업체였다.

이 회사가 1968년 발매한 목도장 ‘네임 인’은 즉석에서 만들어 쓸 수 있는 편리함과 저렴한 가격 덕분에 지금까지 1억8000만 개 이상이 팔렸다. 시야치하타가 기업용 전자 인감 서비스인 ‘시야치하타 크라우드’를 내놓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전자 인감을 도입하는 기업이 급증한 덕분에 2020년 2분기에만 가입 고객이 27만여 곳 늘었다.

기존 가입 회사 수의 30배가 넘는다. 고객 회사가 크게 늘어나자 시야치하타는 2020년 11월 기업용 전자 인감 서비스에 ‘겸양 인감’ 기능을 새로 추가했다. 전자 인감을 찍을 때 인감의 종류뿐만 아니라 날인 각도를 1도 단위로 지정할 수 있는 기능이다. 그 덕분에 폴더 인사부터 목례까지 자유자재로 연출할 수 있게 됐다. 간단한 마우스 조작만으로 ‘전자 겸양 도장’을 찍을 수 있게 되자 전자 인감 서비스를 도입한 기업에서 겸양 도장이 늘어나는 기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시야치하타의 개발담당자는 “고객 기업들의 요청이 많아 편의성을 높이는 차원에서(겸양 인감 기능을) 추가했다”고 설명했다. 인감이 필요한 행정 수속의 99%를 없애더라도 남아 있는 1%가 탈인감의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꾸준히 나온다. 일본 정부는 법인 등기와 부동산 등기 등 83개의 행정 수속에는 인감 증명을 변함없이 유지할 방침이다. 고노 행정개혁·규제개혁상은 “제삼자가 본인을 사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겸양 도장은 ‘10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재난’이라는 코로나19에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관습이다. 반대로 코로나19를 계기로 새로 생겨난 일본의 비즈니스 매너도 있다. 재택근무의 정착으로 화상 회의가 늘어나면서 화상 회의 전문 애플리케이션 ‘줌’과 관련해 생겨난 매너가 대표적이다. 줌은 2020년 9월 화면상의 참가자 표시 순서를 바꿀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

수화 통역이나 사회자를 고정할 수 있도록 해 참가자 수가 많더라도 원활하게 회의를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능이라는 게 줌 관계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 기능이 상급자를 화면의 좌상단에, 하급자를 우하단에 배치하는 ‘상석·말석 배치 기능’으로 정착됐다.

매너 컨설턴트 니시데 히로코 대표는 고객 기업의 젊은 사원들에게 화상 회의를 시작할 때 미리 로그인해 상사를 기다리고 회의가 끝나면 가장 마지막에 퇴장하는 게 적절한 예의라고 교육한다. 온라인 회의를 할 때 항상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상반신과 하반신 모두 정장을 착용할 것 등도 코로나19가 낳은 일본의 새로운 매너다.

반면 회식에서 상급자의 술잔이 비지 않도록 계속 술을 따라 줄 것, 상급자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 줄 것 등은 감염 방지라는 대의명분하에 사라진 비즈니스 예절이 됐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12호(2021.01.18 ~ 2021.01.2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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