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봄’ 지나 겨울?…우울한 중동

5년 전 민주화 기대 불구  내전·테러 악순환, 유가 급락으로 경제마저 ‘휘청’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한 청년이 노점상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한 것을 계기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결국 24년간 튀니지를 통치해 온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로 망명했다. 튀니지에서 촉발된 시위는 주변국으로 번져 독재 정권들이 잇달아 무너졌다. 중동·북아프리카에 민주화 바람을 몰고 온 이른바 ‘아랍의 봄’이었다. 5년여가 흐른 지금 중동은 여전히 혼돈 상태다. 민주화는 요원하고 내전과 테러, 점증하는 난민으로 중동은 그 어느 때보다 어지럽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셰일 혁명으로 중동의 가장 큰 돈줄이던 유가마저 하락해 자칫 아랍권 전체가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이 낮지 않다.


노벨평화상 수상에도 멀고 먼 민주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지난 10월 9일 올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튀니지의 ‘국민 4자 대화기구’를 선정했다. 튀니지의 다원적 민주주의 구축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는 게 선정 이유다.
하지만 튀니지 민주주의 역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2011년 재스민 혁명 이후 그해 10월 자유선거가 치러졌지만 폭력 시위와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2013년엔 야당 지도자가 잇달아 암살되는 등 사회 혼란이 극심했다. 지난해 12월 민선 대통령을 평화적으로 선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도 튀니지 민주주의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많다. 이슬람국가(IS)와 같은 주변국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튀니지에 들어와 테러를 자행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35%에 이르는 높은 청년 실업률 등 경제적 문제도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니지의 국민 4자 대화기구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랍의 봄 이후 튀니지 이외 중동 국가에서는 민주화가 사실상 좌초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집트에서는 2011년 민주화 시위로 30년간 독재를 해 온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나고 2012년 첫 민선 대통령인 무함마드 무르시가 당선됐지만 1년도 안 돼 군부에 의해 축출됐다. 이후 전·현 대통령 지지자 사이에 무력 충돌과 시위가 이어지며 정국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리비아는 가다피 축출 후 권력 공백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수도 트리폴리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이슬람 무장 세력과 북동부의 임시정부로 국가가 분열돼 있어 사실상 내전 상태다. 정부군과 시아파 후티 반군 간 내전이 끊이지 않는 예멘에서는 1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속출해 제2의 시리아가 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특히 시리아는 독재 정권과 반정부군·IS·쿠르드족 간에 얽히고설킨 내전이 끊이지 않는 데다 미국과 러시아의 개입으로 내전이 국제전 양상으로까지 치닫는 형국이다. 나라가 이 꼴이 되니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국민의 20%가 난민이 될 정도며 최근 유럽 난민 문제의 핵심에도 시리아가 있다. 이라크 역시 IS와 정부군 반군 간 내전이 그칠 줄 모르는 상태다.
결국 2011년 정점을 치닫던 아랍의 봄은 튀니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동에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런 중동의 모습을 보면 민주주의란 결코 반정부 시위로 독재자가 권좌에서 물러난다고 가능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랍의 봄이 민주주의 내지는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몇 가지 분석이 있다. 우선 다수의 중동 국가, 특히 극심한 내전을 치르고 있는 시리아나 이라크와 같은 국가들은 하나의 개별 국가로 성립될 역사적 근거가 별로 없다는 분석이 있다.


사우디, 재정 적자 규모 GDP의 20%
시리아·이라크·요르단·레바논·팔레스타인 등의 국가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워진 나라들이다. 1차대전 때 영국은 독일과 동맹이던 오스만튀르크 제국 치하에 있던 주요 아랍 부족을 선동해 봉기시켰다. 이 지역은 수많은 민족과 종파가 뒤얽혀 살아온 곳이다. 종교·민족·부족별로 공동체로 공존하며 살아왔다.
이처럼 부족주의가 여전히 지배하는 지역에 인위적으로 국가를 만들고 국경선을 그었으니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이전에 통일국가 성립 자체가 어렵다는 얘기다.
아랍의 봄이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를 종교와 민주주의 간 관계를 통해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알프레드 스테판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학과 교수는 민주주의와 종교가 모두 발전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국가의 제도적 분화가 이뤄져 두 개의 관용이 존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종교 간 완전 분리를 뜻하는 좁은 의미의 세속주의가 아니라 국가와 종교가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관계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중동의 많은 국가에서 아직 이런 국가와 종교 간 적절한 관계가 이뤄지지 않아 민주화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국가 통합과 다소 거리가 있는 중동이지만 어떻든 이 지역 국가들과 경제를 그나마 유지해 온 가장 큰 힘이 석유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중동 경제를 떠받치던 유가가 급락해 가뜩이나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중동의 미래가 더욱 불투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다. 사우디는 수익의 90%를 원유에 의존하고 있다. 사우디는 올 들어 유가 급락 시에도 감산하지 않고 미국 셰일 업계에 맞불 작전을 썼지만 결과적으로 상처만 남았다. 저유가로 올해 사우디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20%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랍의 봄 이후 사우디에서는 현금 순유출이 시작됐고 유가 급락으로 이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중동 내 최대 라이벌인 이란의 핵 협상 타결로 중동 내에서 사우디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고 있다. 비교적 정치가 안정돼 왔지만 최근에는 궁정 쿠데타설이 나오는 등 왕실 내 알력과 권력 다툼 사실이 외부로 새어 나올 정도다. ‘아랍의 봄’을 겪은 후 정치적 혼란에 경제난까지 겹친 중동이다. ‘아랍의 겨울’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김선태 한국경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Vitamin’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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