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의존도 99.5% 달해, 2004년 칠레 시작으로 FTA 드라이브
한국은 2011년부터 연간 무역 규모가 1조 달러를 넘어섰다. 2014년 무역액은 1조980억 달러다. 같은 해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1조4104억 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 경제는 수출과 수입, 즉 무역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역량(수출+수입)’을 국민소득(또는 국민총생산)으로 나눈 무역의존도는 2014년 99.5%다(통계청, ‘통계로 본 광복 70년 한국 사회의 변화’, 2015년 8월 10일).
사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의 성장은 무역에 의해 이뤄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석유·석탄 같은 에너지와 철·구리·아연 등의 천연자원이 거의 없다. 그래서 한국은 1차 광물을 수입해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며 성장해 왔다. 극단적으로 말해 무역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석유가 없어 자동차 대신 말·소와 같은 가축에 의존해야 할 처지다. 또 난방도 산에서 나무를 베어 해결해야만 한다. 무역을 통해 성장한 한국은 전 세계적인 무역 규범에 늘 관심을 갖고 대응할 수밖에 없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161개 회원국(2015년 4월 26일 기준)이 참여하는 단일화된 자유무역 규범이 탄생했다. WTO 회원국들은 각각 보호해야 할 산업이 다르므로 품목별 관세율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적용 시에는 다른 회원국들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회원국들에 최고 대우를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MFN(Most Favored Nation : 최혜국대우) 세율이라고도 한다.
한편 WTO가 출범한 지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WTO는 회원국 사이에 더 높은 개방을 이끌어 내기 위해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산업 발전 수준이 서로 다른 각 회원국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WTO를 탄생시킨 우루과이라운드(UR)의 차기 협의체로 도하개발어젠다(DDA)가 2001년 시작됐지만 회원국들 간의 이해관계가 너무나 복잡해 아직 새로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미국·EU·중국과 FTA 맺은 유일한 나라
그 사이 WTO 회원국들은 양국끼리만 배타적으로 허용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기 시작했다. 이것이 FTA다. WTO 체제하에서 각국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시 특정 국가에 특혜를 베풀거나 차별할 수 없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FTA를 맺은 나라들끼리의 배타적인 특혜는 인정하고 있다. 이는 WTO 체제가 출범하기 전부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유럽연합(EU)과 같은 자유무역협정이 존재했기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FTA를 맺은 나라끼리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유리한 조건에서 무역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한미 FTA를 통해 한국은 중국·일본보다 유리한 환경에서 미국 시장에 수출을 할 수 있게 된다. 한·칠레 FTA를 통해 칠레는 프랑스보다 유리한 조건으로(한·EU FTA 발효 전까지) 한국에 와인을 수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한국 와인 시장점유율 1위는 지금까지도 칠레가 차지하고 있다.
FTA에 다소 소극적이던 한국은 1998년 최초로 FTA를 맺기로 정책 방향을 정하고 파트너를 물색했다. 최초의 협상 대상으로 칠레가 선정된 것은 지구 반대편이라는 지리적 차이, 남반구와 북반구의 계절 차이와 산업구조가 상이하다는 측면이 고려됐다. 지리적 차이가 적다는 것은 교역량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의미고 계절 차이가 있다는 것은 농산품의 영향이 최소화된다는 의미다.
칠레와의 FTA는 첫 시도이기 때문에 다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협상은 오랜 시간 지속됐다. 이렇게 햇수로 6년이 지난 2004년 4월 1일 한국 최초의 FTA인 한·칠레 FTA가 발효됐다. 이후 싱가포르(2006년),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 스위스·리히텐슈타인·노르웨이·아이슬란드, 2006년)처럼 소규모 경제권과 FTA를 발효한 것도 조심스러운 접근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당초 우려와 달리 칠레와의 FTA는 순항 궤도에 올랐다. 농업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고 자동차 수출은 증가했다. 때마침 불어온 와인 열풍과 함께 한국에서 칠레산 와인을 저렴하게 마실 수 있게 되는 등 소비자 후생도 늘어나면서 FTA 효과를 체감할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한국은 거대 경제권인 ASEAN(아세안, 2007년)·인도(2010년)·EU(2011년)·미국(2012년)과 FTA를 발효했다. 또 2015년 중국과 FTA 협정에 서명하고 발효를 준비하고 있다. 세계 15위권 국가 중 EU·미국·중국이라는 세계 3대 거대 경제권과 FTA를 맺은(서명 포함)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한국 외에 칠레와 멕시코가 있다).
한국은 2011년 한·페루 FTA 발효, 2013년 한·콜롬비아 FTA 서명, 2015년 한·중미(파나마·코스타리카·과테말라·온두라스·엘살바도르·니카라과) FTA 협상 개시, 한·에콰도르 FTA 공동 연구 시작 등 남미 지역과 활발히 FTA를 추진하고 있다. 칠레의 사례를 통해 남미와의 FTA가 한국에게 긍정적인 효과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은 남미 태평양 연안 국가를 FTA 벨트로 연결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은 이슬람권 국가들과도 FTA를 통해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고 있다. 2013년 터키와 FTA를 발효한 한국은 현재 중동 6개국 연합인 GCC(Gulf Cooperation Counsil : 걸프협력회의, 회원국은 사우디아라비아·바레인·쿠웨이트·오만·카타르·UAE)와 중단된 협상 재개를 위해 노력 중이다.
또 한국은 2014년 호주와 FTA를 발효하고 2015년 뉴질랜드와는 FTA를 서명한 뒤 발효를 준비 중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아프리카·중앙아시아·러시아를 제외한 전 세계 주요 지역과 FTA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됐다.
FTA 협정은 한꺼번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크게 상품·서비스·투자 협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대개의 FTA는 발효 시 세 분야가 한꺼번에 발효된다. 하지만 한·아세안 FTA처럼 상품·서비스·투자 협정이 순차적으로 발효되기도 한다. 한·터키 FTA는 상품 협정을 먼저 발효한 이후 서비스·투자 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상품 분야에서 가시적인 FTA 효과는 관세 인하다. 하지만 위생 검사, 기술 인증 등의 이른바 비관세 장벽을 낮추는 효과도 있다. 즉 관세·비관세 장벽을 낮춰 통관을 용이하게 해 무역이 원활화해진다. 이에 따라 교역량이 늘어나게 된다. 이 밖에 FTA는 무역량 증대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한다.
메가 FTA로 역전당할 처지
1990년대가 WTO를 중심으로 하는 다자 무역 시대, 2000년대가 FTA를 중심으로 하는 양자 무역 시대였다면 2010년은 메가 FTA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처럼 FTA에 주도적인 나라가 다년간 축적한 FTA 네트워크를 다른 나라들이 따라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아직 FTA를 많이 맺지 못한 국가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한꺼번에 많은 나라들이 참여하는 거대 FTA를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 그동안 해 온 노력의 성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국제 통상 환경은 예측을 불허한다. 그래서 한국의 전략적 대처가 중요한 시점이다.
최근 미국과 일본을 주축으로 12개국(캐나다·미국·멕시코·페루·칠레·호주·뉴질랜드·싱가포르·베트남·말레이시아·브루나이·일본)이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2015년 10월 5일 협상 타결을 선언했다. 아시아권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16개국(한국·중국·일본·인도·호주·뉴질랜드·ASEAN 10개국)이 참여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역시 2015년 연내 타결을 목표로 협상 진행 중이다. 한국은 RCEP에 참여하고 있고 TPP는 추후 참여를 위해 참여국들과 협의를 진행 중이다.
돋보기
TPP와 FTA는 어떻게 다른가
관세·비관세 장벽을 없앰으로써 교역량을 늘리기 위해 두 나라(혹은 경제공동체)가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것을 FTA(Free Trade Agreement)라고 한다. FTA는 두 나라 사이에서 체결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 나라 이상이 체결하기도 한다. 두 나라 사이의 FTA는 한미 FTA, 한중 FTA처럼 나라 이름을 붙여 지으면 되지만 참여국이 많으면 TPP·RCEP·NAFTA처럼 별도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TPP·RCEP처럼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것을 메가 FTA라고도 한다. 반면 두 나라끼리의 FTA는 양자 FTA라고 부른다. 양자 FTA라고 하기엔 많은 나라가 참여하고 메가 FTA라고 하기엔 규모가 작으면 다자 FTA라고도 한다. 한중일 FTA, EFTA(노르웨이·스위스·리히텐슈타인·아이슬란드)가 다자 FTA로 볼 수 있다. 양자 FTA, 다자 FTA, 메가 FTA는 학술적인 용어는 아니며 편의상 붙이는 이름이다.
한편 광범위한 국가 간 협정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처럼 관세·비관세 장벽을 없애는 무역 원활화의 내용을 다루지 않고 외교·군사 동맹만 맺기도 한다. 또한 관세·비관세 장벽을 포함하지 않고 단순히 경제 협력만 목적으로 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FTA라고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TPP는 많은 나라가 참여하는 FTA인 메가 FTA다.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