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국 간 부품 조달 촉진…車·섬유 ‘비상’

자동차는 역내 부품 55% 넘어야 TPP 혜택, 한국의 중간재 수출 ‘직격탄’



한국은 현재 49개국(11건)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발효한 상태다(32쪽 참고). 특히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참여한 12개국 중 일본과 멕시코를 제외한 10개국과 양자 간 혹은 다자간 FTA를 맺고 있다. 이 때문에 TPP는 ‘사실상 일본과의 (양자 간) FTA’라는 말이 나온다. 물론 멕시코도 같은 상황이지만 일본은 한국과 산업 경합도가 높고 한국의 대일 무역 적자가 크기 때문에 더 주목을 받는다.

부가가치 따져 원산지 판정
하지만 메가 FTA인 TPP의 효과는 ‘한일 FTA’ 수준을 넘어선다. 그 이유는 누적 원산지 규정(Cumulative Rules of Origin) 때문이다.
본래 FTA는 협정을 맺은 국가들 내에서만 서로에게 관세 특혜를 준다. 따라서 주변국들은 FTA 특혜관세를 받기 위해 FTA 체결국으로 원산지를 위장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예를 들면 한미 FTA 관세 혜택을 받기 위해 중국에서 생산한 제품을 한국으로 들여와 포장만 다시 해 ‘한국산’으로 표기하는 방식이다.
이를 막기 위해 FTA 협정은 해당국에서 상당 부분의 부가가치가 생산돼야만 원산지로 인정한다. 분쇄·포장·건조·절단·도장 등과 같은 단순 가공만으로는 원산지를 인정받을 수 없다. 흔히 보는 ‘메이드 인 코리아’ 표기 제품이 FTA 협정상에선 ‘메이드 인 코리아’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한국이 맺은 FTA에서 한국을 원산지로 인정받으면 이를 ‘국내산’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역내산’으로 표현한다. 이는 FTA에서 자국 및 상대국의 부가가치를 모두 인정하기 때문이다. FTA의 목적은 관세·비관세 장벽을 없애 체결국 간 무역을 원활하게 하고 교역량을 늘리는 것이다. 결국 한미 FTA에서 순수 한국산뿐만 아니라 미국산 원재료(또는 부품) 비율이 일정 수준을 넘는 제품은 모두 ‘역내산’으로 인정받는다.
한미 FTA에서는 미국 수출 시 FTA 특혜관세를 적용받으려면 한국산이나 미국산 원재료·부품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해야 한다. 한·아세안(ASEAN) FTA를 활용해 베트남에서 생산한 부품을 한국에서 조립하면 한미 FTA 혜택을 대부분이 적용받지 못한다.
하지만 TPP가 발효되면 일본은 베트남에서 생산한 부품을 일본에서 조립해 미국으로 수출해도 모두 TPP 협정문이 규정한 특혜관세를 받을 수 있다(원산지 기준을 충족한 경우). 모두 TPP 역내에서 생산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때 한국에서 중간재(완성품 제작에 필요한 부품)를 조달했던 일본은 역내 비율 충족 요건을 갖추기 위해 TPP 비참여국인 한국 대신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 등 TPP 역내국에서 중간재를 조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이런 누적 원산지 규정 때문에 TPP의 잠재적 파괴력은 단순히 생각하는 ‘관세 인하 혜택’을 훨씬 넘어선다. 일본은 베트남·말레이시아에 구축해 놓은 생산 기지를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고 베트남과 말레이시아는 주변국인 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태국보다 일본·미국·호주 등 선진국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유리해진다. 미국 또한 멕시코에서 생산한 원재료를 이용해 생산한 제품을 호주·뉴질랜드 등으로 수출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이는 TPP에 포함되지 않은 한국에는 분명 불리한 일이다.


베트남, 한국 대신 일본서 원사 수입 가능성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TPP가 타결된 직후인 10월 6일 홈페이지에 TPP 합의문 요약본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TPP는 누적 조항을 채택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TPP 회원국 내에서 생산한 것을 TPP 역내국에서 생산 과정에 투입하면 이를 기타 TPP 회원국에서 조달한 재료와 같게 본다.
이와 관련해 가장 주목 받는 산업은 섬유·자동차·자동차 부품이다. TPP 최종 협상 때 일본과 미국·캐나다·멕시코(이른바 NAFTA 국가)는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과 관련한 누적 원산지 규정을 놓고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활용하기 위해 북미와 유럽 자동차 기업의 생산 공장이 몰려 있는 캐나다와 멕시코는 TPP 역내에서 부품 조달 비율이 62.5%에 미달하면 역내 원산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집했다.
반면 일본은 TPP 참여국이 아닌 태국 등 역외 생산 비율이 높아 이를 40%로 낮추자며 대립했다. 결국 이들은 55%라는 원산지 누적 기준에 최종 합의했다. 앞으로 일본은 자국산 차를 미국에 수출할 때 완성차 부품의 55%를 TPP 가입국 안에서 조달해야 한다. 실제로 자국 생산 기지의 타격을 염려한 태국이 TPP 가입을 고려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섬유산업도 TPP 누적 원산지 규정이 민감한 이슈다. 지금은 한국 등 TPP 비참여국도 섬유 제작에 필요한 원사(原絲)를 베트남(TPP 참여국)에 수출하고 베트남 현지에서 최종재를 만들어 미국(TPP 참여국)에 수출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향후 베트남이 대미 수출 시 TPP 관세 혜택을 보기 위해 원산지 누적 기준의 충족이 어려운 비참여국 대신 일본·말레이시아 등 역내국에서 원사를 조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한국 등 TPP 비참여국은 큰 타격을 받고 일본과 말레이시아가 수혜를 보게 된다.
TPP에 가입하지 않은 한국에 이러한 누적 원산지 규정은 ‘독’으로 비유된다. 한국은 대외 무역의존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중간재 수출 비율이 높다. 경쟁 관계에 있는 일본이 TPP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베트남 등이 섬유와 자동차 부품 분야에서 TPP 비참여국인 한국으로부터의 공급을 줄이고 일본·베트남·말레이시아 등에서 소재와 부품을 조달하게 되면 중간재 수출에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또 한국에 자리하던 기존 기업과 공장들이 TPP 역내국으로 이전하거나 진출하면 국내 일자리 감소라는 2차 피해도 예상된다. 자칫 외국 기업의 투자 유치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한국의 TPP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에는 바로 이러한 누적 원산지 규정이 강하게 작용한다. 아직 TPP 최종 협정문이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알려진 바로는 TPP에 누적 원산지 규정 외에도 부당 규제 철회 요청권, 국영기업 우대 금지, 수산 보조금 금지, 의약품 자료 보존 기간 연장 등 한국 산업을 위협할 수 있는 많은 조항들이 포함돼 있다.
또한 후발 주자로 TPP에 참여한다면 농림축산 분야 등에서 많은 양보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 수출의 효자 역할을 했던 산업군들이 TPP 누적 원산지 규정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TPP 추가 가입에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박정준 서울대 국제대학원 국제통상전략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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