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임금 부담 늘어나, “사무실 근로자에겐 역차별” 주장도
통근도 근무에 포함해야 한다는 판결이 유럽사법재판소(ECJ)에서 나왔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결정으로 기업들의 부담은 커지겠지만 이동이 잦은 영업 사원을 비롯해 방문 수리공이나 간병인 등 홈 케어 근로자들의 권익이 보호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해당 판결은 정해진 사무실로 출근하는 직장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최근 유럽연합(EU) 최고 법원인 ECJ는 지정된 사무실 없이 일하는 이른바 모바일 근로자(Mobile Workers)들이 출퇴근하기 위해 사용한 시간 역시 근로시간이라고 밝혔다. ECJ의 판결은 EU 회원 28개국의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지는 이 같은 결정이 프랑스의 노동시장을 흔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모바일 근로자들을 고용한 기업들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영국 법률 회사 어윈 미첼의 크리스토퍼 투톤 변호사는 데일리 메일과 가디언 등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영국 내 기업들이 통근에 소요된 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ECJ의 결정에 따라 그동안의 관행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며 “만약 결정을 따르지 않으면 근로자들이 고용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럽사법재판소, 스페인 타이코 근로자 손 들어줘
해당 판결은 스페인 보안 업체 타이코가 2011년 지역 사무소를 대거 폐쇄하면서 장거리 통근을 하게 된 해당 업체 근로자들의 소송에서 비롯됐다.
지역 사무실 대신 전 직원을 마드리드 중앙 사무실 소속으로 배치한 타이코 측은 회사 차량을 지급하고 직원들이 집에서 고객들이 있는 곳으로 바로 출근하도록 지시했다. 휴대전화를 통해 다음날 방문해야 할 고객 리스트와 위치, 업무 내용 등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갑작스레 사무실 없이 일을 하게 된 타이코의 기술자들은 장비를 설치하거나 유지·보수하기 위해 때론 100km가 넘는 거리를 운전하거나 집에서 3시간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기도 했다. 통근에 소요되는 시간이 전보다 훨씬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사 측은 직원이 처음 고객을 만난 시간부터 마지막 작업 현장에 있었던 시간까지만 1일 근무시간으로 계산했고 이동 시간은 휴식 시간으로 처리해 노조의 반발을 샀다.
노동조합 측의 소송을 계기로 스페인 국립 고등법원이 근로자들이 통근에 사용한 시간을 근로시간으로 간주해야 할지 여부를 결정해 달라고 ECJ 측에 요청했고 지난 9월 10일 재판부는 근로자의 손을 들어줬다.
ECJ는 모바일 근로자들이 고용주의 지시를 받고 업무를 보기 위해 이동했다면 그 시간은 근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ECJ는 보도 자료를 통해 “타이코가 지역 사무소를 폐쇄한 것은 근로자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고용주의 결정”이었다며 “근로자들이 작업 현장에 가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자유롭게 시간을 사용할 수 없고 자신의 이익도 추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ECJ는 이번 결정에 대해 EU의 ‘노동시간 규정(The Working Time Directive)’에 명시된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노동시간 규정은 고용주의 착취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EU가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근로자들이 몇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하고 얼마나 쉬어야 하며 사용할 수 있는 휴가는 며칠인지 등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ECJ는 고용주가 모바일 근로자들의 이동 시간을 근무시간에서 제외한다면, 이는 EU의 노동시간 규정을 위반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ECJ의 이번 판결에 대해 유럽 각국의 근로자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EU의 근로시간 규정에 대해 옵트아웃(이탈)을 행사하고 있는 영국 내 근로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영국에서는 340만 명의 근로자가 주당 48시간 이상 근무하고 있는 것(영국노동조합회 조사)으로 알려져 있다.
“8시간 근무 위해 12시간 통근도”
영국 맨체스터에 사는 통신 엔지니어 스티브 캐럴 씨는 “이번 결정은 나와 내 동료들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라고 BBC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캐럴 씨는 “우리는 매일 여러 지역을 방문하는 통신 업체에서 일하는데 만약 집에서 두 시간 거리를 가야 할 때는 통근에만 네 시간이 소요되지만 이에 대한 돈을 받지 못했다”며 “(그동안) 8시간 근무를 위해 12시간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영국 내 3만여 홈 케어 근로자를 대표하는 공공서비스노조 유니슨의 데이브 프렌티스 사무총장도 “이번 판결이 특히 영국 내 홈 케어 근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고용주들이 근로자들의 이동 시간에 대해서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만 명에 달하는 홈 케어 근로자들이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실정에 놓여 있었다”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기업들은 모바일 근로자들이 출퇴근에 사용한 시간에 대해서도 임금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장관이 나서 실질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ECJ의 결정이 기업의 성장을 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많다. 특히 파견 사원
등을 다수 고용한 홈 케어 관련 업체들엔 상당한 타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 보수당의 앤시아 매킨타이어 씨는 “통근 시간을 근무에 포함할지 여부는 순수하게 고용주와 근로자 사이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라며 “(ECJ의 판결이 실제 적용되면) 기업들의 비용이 대폭 늘어나게 될 것이고 전통적인 비즈니스 관행도 방해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역차별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프랑스의 한 법률 전문가는 “모바일 근로자들의 통근 시간만 근무시간으로 인정하게 되면 지정된 사무실에서 일하기 위해 하루 평균 1~2시간 씩 출퇴근에 시간을 쏟는 상당수 근로자들은 상대적으로 불평등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지적했다.
헤이그(네덜란드)=김민주 객원기자 vitamj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