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알을 삼킨 하후돈…'삼국지'의 엽기남들

아내를 죽여 귀인 대접도, 광기와 혼돈의 시대가 만들어 낸 비극


엽기(獵奇)라는 말은 괴이하고 비정상적인 대상에 관심을 갖고 찾아다닌다는 뜻이다. 엽기문학, 엽기적인 살인마 등 상당히 공포적인 어감을 주던 이 단어가 일본을 거쳐 재수입되면서 단순히 ‘특이한’, ‘그로테스크한’ 정도의 의미로 변질됐다.
엽기라는 단어가 네티즌을 중심으로 하는 젊은 세대의 인터넷 상용어였다가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곽재용 감독의 영화 ‘엽기적인 그녀(2001년)’가 히트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를 계기로 배우 전지현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스 신화는 엽기적인 스토리의 원조다. 예컨대 올림포스신의 주신인 제우스의 아버지는 크로노스인데, 그의 부모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다. 그런데 우라노스가 아들 키클롭스를 지하 세계인 타르타로스에 가둬버리자 화가 난 가이아 여신이 남편 우라노스를 제거하기 위해 자식들을 소집했다.

엽기의 시조, 그리스 신화
아버지를 살해하는 엽기적인 일에 선뜻 나설 아들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이 과제는 막내 크로노스에게 맡겨졌다. 크로노스는 가이아에게 받은 청동 낫으로 땅에 깊숙이 박혀 있던 우라노스의 남근을 잘라버렸다. 이렇게 쫓겨난 우라노스는 아들 크로노스를 저주했다. “네 놈 역시 나처럼 네 아들들에게 크게 당할 것이야!”
아버지의 저주가 실현될까 두려웠던 크로노스는 누나 레아와 결혼해 낳은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집어삼켜버렸다. 자식들을 집어삼키는 남편을 레아도 참지 못했다. 이번에는 여섯째 아들 제우스가 나섰다. 제우스는 신탁의 예언처럼 아버지 크로노스를 폐위하고 자신을 주신으로 하는 올림포스 산의 지배 구조를 확립한다.
신화는 신화니까 그렇다 쳐도 ‘삼국지’ 시대와 같은 고대사회에도 엽기적인 일이 횡행했다. 고대의 형벌 제도는 대표적인 엽기 사례다. 사마천처럼 거세를 당하는 궁형(宮刑)은 물론이고 사람의 목을 베어 저자거리에 효수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도끼로 허리를 자른다든가, 불에 태워 죽인다든가, 사지를 찢어 죽이는 일도 흔했다. 심지어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다시 죽이는 부관참시도 있었다.
부모에게서 받은 신체를 온전히 간수하는 것을 효의 시작으로 봤던 동아시아인들에게 이보다 더한 엽기는 없었을 것이다. 소설 ‘삼국지’ 속 인물 중에서 이런 유교적 관념을 가장 철저하게 그러나 가장 엽기적으로 실천한 이가 하후돈이다. 하후돈은 조조의 최고 심복으로 조조와는 사촌지간이다.
하남의 허도에 자리 잡고 있던 조조는 허도를 둘러싸고 있는 원소와 원술, 여포와 유표, 장수 등의 군벌들이 연합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조조는 이들 사이에 틈부터 냈다. 원소에게는 대장군 태위의 벼슬을 내려 안심시킨 뒤 여포부터 치기로 했다.
소패성에서 여포와 조조의 군대가 맞붙었다. 여포 측은 고순, 조조 측은 하후돈이 선봉장이었다. 고순의 실력으로는 조조 휘하 최고의 맹장 하후돈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후돈에게 쫓겨 달아나던 여포의 부장 조성이 화살을 쏴 하후돈의 왼쪽 눈을 맞혔다. 화살을 뽑자 눈알이 통째로 빠져나왔다. 하후돈은 주저 없이 눈알을 씹어 먹었다. “부모님의 정기와 피를 내 어찌 버리겠는가(父母精血, 不可棄也)!”
‘삼국지’ 초반에 반(反)동탁연합군의 세력이 와해되자 동탁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오만방자하기가 그지없었다. 동탁의 전횡에 분개한 대신들을 대표해 사도 왕윤이 나섰다. 왕윤은 미녀 초선을 동원해 미인계로 동탁과 그의 심복 여포를 이간질했다. 초선과 함께 미오에서 노닐던 동탁은 황제가 자신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소식을 이숙에게 전해 들었다. 기뻐하며 황궁으로 향하던 동탁은 왕윤의 군사에게 포위당했고 여포의 방천화극에 찔려 죽었다. 왕윤을 비롯한 대소 신료들과 군사들이 만세를 불렀다.
엽기적인 상황은 동탁이 죽고 나서 일어났다. 동탁의 시체는 저자거리에 버려졌다. 시체를 발로 짓밟고 머리를 걷어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의 배꼽에 심지를 박아 등불을 만들었다. 동탁이 유달리 비대하고 기름져 며칠 밤을 두고 탔다고 한다.

사람 죽여 요리로 만든 폭군 주왕
동한말년 영제 2년에 온 나라에 퍼진 엽기적인 소문이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암탉이 변해 수탉으로 변했다!’ 돌연변이도 아니고 멀쩡하게 잘 자라던 닭이 대명천지에 어찌 성별이 바뀔 수 있으랴.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고대의 루머였을 것이다.
식인 풍습만큼 엽기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중국 사서에 심심치 않게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식인 풍습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났던 모양이다. 은나라 폭군 주왕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죽여 갖가지 요리로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제나라 환공이 진기한 요리를 즐기자 신하 역아가 제 아들을 삶아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유비가 여포에게 패해 허도에 있는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러 가던 시절 이야기다. 조그만 마을에서 하룻밤을 유하게 됐다. 가난한 사냥꾼 유안은 평소 존경하던 유비를 알아봤다. 유감스럽게도 식량과 돈이 다 떨어진 유안은 자신의 아내를 죽여 인육을 대접했다. 뒤늦게 이를 안 유비가 연유를 물었다. “유황숙님과 같은 귀한 분을 차마 굶겨 보내 드릴 수 없었습니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유비가 조조에게 이런 사실을 말했을 때 보인 조조의 반응이다. “유안은 참으로 의로운 자로군요. 내 돈 백 냥을 줄 테니 유안이 새 아내를 맞게 하세요!”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에도 엽기적인 일이 있었다. 당당하게 개선하던 제갈량의 군대가 노수에 이르자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쳐 물을 건널 수 없었다. 현지 사람이 말했다. “승상! 이는 원귀의 소행이옵니다. 우리 풍속대로 49명의 사람 머리를 잘라 제사를 지내면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갈량은 정벌 중에 수많은 인마를 살상해 가책을 느끼던 참이었다. “사람 머리 대신 소와 양을 잡아 고기를 다져 밀가루 속에 넣어 사람 머리 모양으로 만들어 제사를 지내라!” 이렇게 하자 과연 풍랑이 잦아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만두는 여기에서 유래됐다.
사족. 엽기를 소재로 한 영화로는 조너슨 더미 감독의 ‘양들의 침묵(1991년)’이 압권이다. 영화에서 범인은 사람을 죽여 껍질을 벗기고 그것으로 옷을 만든다. 정신과 의사 한니발 렉터(앤서니 홉킨스 분)는 FBI 요원 클라리스(조디 포스터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살인범 버팔로 빌은 선천적인 성도착증 환자가 아니야. 폭력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 때문이야. 타고난 범죄자가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낸 희생양이란 말일세!”
렉터의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인류의 엽기성은 우리 내면의 광기와 혼돈된 사회가 만들어 낸 합작품이므로 이러한 그릇된 조합이 일어나지 않게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경고가 아닐까 한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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