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독일’ 일으켜 세운 개혁 정치가

통독 이후 ‘유럽의 병자’로 전락…선거 패배 각오하고 ‘어젠다 2010’ 추진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통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진 냉전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패전국 신세가 된 독일은 소련군이 진주한 동독과 서방 연합군이 진주한 서독으로 나뉘어 분할통치됐다. 이후 미소 냉전 체제가 굳어지자 분할통치선은 국경선으로 바뀌었고 1949년부터 서독과 동독에 각각 독립 정부가 들어서며 본격적인 분단의 길에 들어섰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자 세계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가 주도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는 이미 탈냉전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고 이러한 기운은 동독의 시민혁명에도 기름을 부었다. 마침내 1990년 10월 3일 동독의 5개 주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신생 5개 주로 편입됐다.


주경야독으로 변호사 된 견습생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콜 총리는 통일 이후 독일이 안고 가야 할 ‘피·땀·눈물’ 대신 “동독 경제가 3~5년만 지나면 꽃피게 될 것”이란 장밋빛 전망만 던져 줬다. 경쟁력이 없는 구동독 경제와 사회보장제도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칭송받던 독일은 통일 이후 ‘유럽의 병자’라는 비아냥거림에 직면했다.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시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 독일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다. 최장수 총리인 콜의 시대 16년은 그렇게 저물고 말았다.

1989년 치러진 총선에서 승리한 것은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이었다. 독일의 제7대 총리에 오른 슈뢰더는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44년 독일 중부 지역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의 끝인 모젠베르크에서 태어난 슈뢰더는 출생부터 지독한 가난과 맞닥뜨렸다. 슈뢰더의 아버지는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아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전사했다. 빠듯한 생계는 당연했다.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둔 그는 열일곱 살 때부터 견습생으로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주경야독으로 대입 자격시험을 치르고 괴팅겐대에서 법학을 전공해 학위를 받았다. 1976년 변호사 자격증을 딴 슈뢰더는 하노버에서 처음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가난한 노동자계급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이었는지 슈뢰더의 정치 인생은 과격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출발했다. 이미 18세에 ‘청년사회주의자’로 사민당에 입당한 그는 전통적 좌파 이념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언변, 정열적인 활동과 정연한 논리로 무장한 그는 일찍부터 사민당의 젊은 기수로 떠올랐다. 1978년 사민당 청년 조직인 ‘젊은 사회주의’ 의장을 거쳐 1980년 연방하원 의원, 1986년 니더작센주의회 사민당 원내의장, 1990년 니더작센 주 총리까지 승승장구했다.

슈뢰더가 주 총리에 오른 1990년은 독일이 통일된 해였다.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슈뢰더는 스스로 변화의 길을 선택했다. 이념적 편향에서 탈피한 슈뢰더는 온건한 중도 개혁가로 변신해 있었다. 주 총리에 오른 후 그의 핵심 정책은 다른 무엇보다 ‘일자리 창출’이었다. 미국의 영향을 받아 주 정부 차원에서 벤처 기금을 만들어 젊은 창업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니더작센 주의 기업 숫자는 9.5%나 늘어났다. 같은 기간 독일 전체 기업 수가 11%나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실적이었다.

슈뢰더는 이때부터 ‘사회복지국가의 현대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기존의 사회 안전망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시켜 누구나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다는 정책이다. 이에 따라 실업수당 지출보다 일자리 창출이 우선시됐다. ‘기회 균등’을 강조하면서 부의 과실을 골고루 나누는 데도 힘을 쏟았다. ‘노사공동결정제도’가 그 정점이었다. 슈뢰더는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면 기업 실적에 관심이 더 높아져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낸다”고 말했다. 슈뢰더는 이렇게 노동과 분배, 복지를 우선시하는 사민당의 전통을 이어 가면서도 강도 높은 개혁을 통해 정치적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거두는 데 성공한 지도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98년의 독일은 통일의 과실은커녕 극심한 불황과 10%대의 높은 실업률로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처지였다. 새로운 리더십은 위기의 시대에 부상하기 마련이다. 당시 야당인 사민당은 국민들 앞에 스스로 가난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슈뢰더를 내세웠다. 그는 사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이었던 노동자·교회 세력뿐만 아니라 교사·지식인 등으로 지지세를 확장해 갔다. 결국 사민당은 콜 총리가 애용해 왔던 ‘중도로의 노선 이동’을 통해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일자리 기적’ 신화 만들어
‘새로운 중도 노선’, ‘좌파 속의 우파’로 상징되는 슈뢰더의 실험은 당시 최악으로 치닫던 독일 경제가 배경이 됐다. 2002년 재선에 성공한 그는 사회·경제 개혁 프로그램인 ‘어젠다 2010’과 ‘하르츠 4’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2003년 개혁 프로그램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슈뢰더는 “독일 자체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분배 중심의 사회주의 정책을 버리고 성장 중심의 시장경제 정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2003년 3월 슈뢰더가 발표한 ‘독일 경제 재생 계획 10개항’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핵심인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위해 해고방지법을 손봤고 연금·의료보험 개혁에도 나섰다. 그때까지 독일 정치권에서 연금제도는 건드려선 안 되는 금기였다. 슈뢰더는 당시 세전 평균임금 대비 53%였던 소득 대체율을 2020년에 46%, 2030년까지 43%로 낮추겠다고 발표했고, 이는 즉각 주요 지지층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게다가 최초 연금 수령 시기는 65세에서 67세로 늦췄다.



개혁 조치 발표 이후 슈뢰더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어젠다 2010’은 의회를 간신히 통과했지만 슈뢰더에겐 ‘정치적 자살’이라는 평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뢰더가 개혁에 올인한 것은 개혁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2~3년 안에 경제가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다음 총선에서도 사민당의 재집권이 가능하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경제적 성과는 단시간에 찾아오지 않았다. 2005년 총선에서 슈뢰더는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에게 패했다.

비록 재집권에는 실패했지만 슈뢰더가 뿌려 놓은 씨앗은 고스란히 메르켈의 몫이 됐다. 그의 개혁 덕에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됐고 무엇보다 ‘단시간 근로(short-time work)’ 제도를 정착시켜 실업률이 크게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독일의 이런 변화를 ‘독일의 일자리 기적(German Job Miracle)’이라고 표현했다.

슈뢰더의 중도 개혁 정책은 통일 후유증에 시달리던 독일 경제가 회생하는 발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비록 지지 세력의 이탈로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게 이후 증명됐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거의 모든 나라의 성장률이 감소하고 실업률이 크게 증가했지만 독일만큼은 2009년 성장률이 마이너스 5.1%인데 비해 실업률은 겨우 0.3% 느는 데 그쳤다.

슈뢰더의 뒤를 이은 메르켈은 2005년 총리 취임 뒤 첫 의회 연설에서 공식적으로 슈뢰더를 찬양했다. “‘어젠다 2010’으로 새 시대를 향하는 문을 열게 한 슈뢰더 전임 총리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는 용기 있고 단호하게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슈뢰더 전 총리가 걸어온 길
1944년 독일 모젠베르크에서 태어난 슈뢰더 독일 전 총리는 지독한 가난에 학교를 중퇴했다.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 끝에 괴팅겐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변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일찍이 18세에 사회민주당 당원으로 입당한 그는 과격한 마르크스주의자를 거쳐 중도 개혁 노선으로 전향했고 오늘날 독일 경제 부흥의 초석이 된 개혁 정책 ‘어젠다 2010’을 추진했다.

1944년 독일 모젠베르크 출생
1971년 괴팅겐대 법학과
1963년 독일 사회민주당
1969년 괴팅겐 청년사민당 의장
1977년 하노버 사민당 의장단 임원
1978년 전국청년사민당 의장
1983년 하노버 사민당 당수
1986년 니더작센 주의회 사민당 원내총무
1990년 니더작센 주 총리
1998~2005년 독일 총리
2003년 ‘어젠다 2010’ 발표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참조 넥스트 리더십(김택환,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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