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후 구조 개혁 너무 늦지 말아야”

‘대화·긴장 완화’가 통일의 초석…개혁은 정치 지도자의 숙명


오늘날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시기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1990년 통일 이후 ‘유럽의 환자’로 전락했던 독일이 불과 25년 만에 유럽을 이끄는 경제 강국으로 도약한 것이다. ‘정치적 자살’로 평가되던 개혁안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오늘날 독일 번영의 초석을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한국을 찾았다. 제주 해비치호텔에서 지난 5월 21일 열린 제10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특별 세션에 참석한 슈뢰더 전 총리는 권영세 전 주중대사와 ‘통독 이후 구조 개혁과 한반도 통일의 성공 조건’을 주제로 대담에 나섰다.

슈뢰더 전 총리는 기조연설을 통해 독일 통일의 초석으로 ‘대화의 정치’와 ‘긴장 완화’를 꼽았다. 이어 분단 극복을 위해 ‘어젠다 2010’을 관철한 사례를 들며 “통일 후에는 경제 통합, 사회 통합 등 복잡하고 어려운 개혁의 과정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통일 후의 구조 개혁이 너무 늦어져선 안 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슈뢰더 전 총리와 권 전 대사의 대담을 정리했다.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앞둔 우리에게 독일의 사례는 큰 교훈이 된다.
“개혁은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다.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 독일의 산업구조는 이미 중소기업이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대기업의 협력 업체가 아니었다. 이들 스스로 연구·개발을 늦추지 않으며 시장에서 독립적으로 기능했다. 노동자, 즉 노조의 공동 결정권도 큰 몫을 했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노조가 조직을 통해 사측과 공동 결정권을 갖게 하는 것을 법률로 정했다. 위기가 닥치면 노사가 공동으로 결정하는 시스템은 노동자들에게도 회사의 성공을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일깨워 줬다. 이것이 2010년 개혁의 골자였다. 한국도 반드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대기업에 대한 종속성을 낮추고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높여야 한다.”


‘어젠다 2010’을 추진한 배경은 무엇이었나. 기존 서독 사회의 정체 때문이었는지, 통일의 후유증 때문이었는지 궁금하다.
“둘 다이다. 서독은 이미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시장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까지 공공연하게 나왔다. 통일이 되자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통일 직후의 동독 주민은 1800만 명에 달했다. 바꿔 말하면 서독 경제에 새로운 거대 시장이 열린 것이다. 어차피 새로운 상황이라면 개혁은 빠를수록 좋다. 비용 등 리스크가 불거진다고 하더라도 행동에 나서야만 했다.”


통일 과정을 잘 관리했다면 리스크를 피할 수 있었다는 뜻인가.
“후유증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약화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동독 지역의 철도와 도시 건설 등 엄청난 인프라 투자 기회가 있었다. 사회보장제도도 정비해야만 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 마르크화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가겠다’고 외쳤다. 결국 서독 사람들과 똑같은 사회보장제도를 적용해야 했다. 비용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구조 개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는 없다. 다행히 동독의 경제 상황이 최악은 아니었다. 한국은 통일이 된다면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북한 경제는 예전 동독에 비해 훨씬 낙후돼 있다.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한 현실적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 말했듯이 프로젝트를 시작해야만 한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통일이 경제적 이익인 것은 분명하다.”


여러 개혁 정책이 사민당의 기조와는 맞지 않았다. 노조의 반대도 심했는데 어떻게 공감을 이끌어 냈나.
“맞다. 사민당도, 노조도 반대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차이였지만 2005년 총선에서도 패배했다. 당도 개혁의 필요성은 공감했지만 결국은 선거에서 지고 말았다. 국가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정치인이 자유롭게 권력을 내놓겠는가. 그러나 국가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면 선거 패배라는 리스크는 감내해야 한다. ‘어젠다 2010’을 관철하기 위해 정치인들을 향해 ‘나와 손을 잡든지, 아니면 내가 총리직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분명한 것은 첫째가 국가라는 점이다. 그다음이 정당이다. 정당은 국가에 비해 부차적이다. 사민당은 기존 체제에 만족해 하는 정당이 아니다. 나도 젊은 시절 당원으로 활동하며 전임자를 엄청나게 비판했다. 누구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통일의 초석으로 대화 정책과 긴장 완화를 꼽았다. 독일의 ‘동방 정책’이 동독 붕괴와 통일을 촉진했다고 보나.
“독일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이슈다. 동방 정책을 설계할 때도 이미 많은 논란을 겪었다. 사민당과 기민당의 견해도 달랐다. 헬무트 콜은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에 반대했지만 막상 총리가 됐을 때는 오히려 이를 충실히 계승했다. 동방 정책이 일정 부분 통일에 기여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과거 동구권 전체에 대한 영향력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공산주의 체제 자체가 스스로 무너진 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내부에서 이미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정치적으로 스스로 붕괴 직전까지 간 것이다. 동방 정책이 이런 붕괴를 가속화했을 수는 있다. 한국은 서독과 동독의 관계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다. 당시 서독과 동독은 오늘날 남북한처럼 서로 적대감을 갖지 않았다. 통일이 된다면 비인간적인 북한 체제 때문에 날마다 엄청난 사건이 터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적으로 조직된 사회가 통일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 북한 주민도 정치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독일 통일은 국제적 제약 때문에 더 어려웠던 측면도 있다. 아데나워의 친서방 정책이 통일의 기초가 됐다고 보나.
“아데나워 정책이 통일까지 예견한 정책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방 동맹국 사이에서 서독의 위치를 확고히 자리 잡게 한 것은 사실이다. 통일 직전 까지 서독의 주권은 상당히 약한 상태였다. 4대 전승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합의가 있어야 독일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서방 전승국과의 문제는 그리 큰 게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소련과의 관계였다.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고르바초프와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 소련이 독일 통일을 지지해 준 배경이다. 콜의 엄청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통일은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이 될 정도로 사회적 갈등이 심한 주제다. 과거 독일도 보혁 간 갈등이 컸다고 들었다.
“당시 서독 정부는 동독 이주민의 체류 자격, 사회보장제도 조건, 단일 국적 조항 등 수많은 이견에 부딪쳐야 했다. 서독의 기본법을 동독의 헌법으로도 적용할 것인지, 아예 통일 독일법을 만들지도 논란이 많았다. 통일의 방식도 문제였다. 결국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고 서독의 기본법을 동독에도 적용하는 것으로 정했지만 회의적인 의견도 여전히 많았다. 현재 한국 상황에 빗대면 북한이 남한의 체제로 들어오는 형태다. 무엇보다 민주사회 형태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미래가 있다. 중요한 것은 동서독이 통일 조약을 만들어 디테일한 내용을 함께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동독 체제가 사라진 지금 당시의 결정이 옳았다는 것이 확인됐다.”


통화 통합 이후 급격한 임금 상승으로 기업이 타격을 입었고 결과적으로 동독 지역이 황폐화되는 등 통일의 부작용도 컸다.
“만약 화폐 통합을 미뤘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구동독의 산업 부분은 10%만 생존했고 나머지는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화폐 통합부터 단행한 배경이다. 당시 2조 유로 이상의 돈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갔다. 그렇지 않았다면 동독 주민의 대량 탈출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의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다. 북한의 대량 이주나 탈출을 막기 위해선 북한 주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도 좋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줘야 한다.”


과거 동독·소련의 관계에 비해 현재 북한·중국의 관계는 어떻게 다른가.
“일직선상에서 비교할 사안이 아니다. 동독은 철저하게 소련의 영향 아래 있었다. 주권국이 아닌 소련의 위성국가였다. 북한과 중국은 완전히 다르다. 개인적 판단이지만 중국은 북한 정부가 유지되는 게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고 본다. 중국으로부터 평화 통일이나 통일 자체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의 사정이 어려워지는 게 중국으로서도 장기적으로는 이롭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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