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로 오해된 ‘걸리버 여행기’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담겨…‘오즈의 마법사’도 모험담 아닌 정치 비판


‘프랑켄슈타인’, ‘그림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등과 같은 이야기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많이 읽는 것들이다. 그래서 자칫 동화로 착각하기 쉽다. 심지어 프랑켄슈타인을 그저 괴물로 간단히 치부하기도 하는데, 그 인물은 괴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젊은 과학도의 이름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다. 영국의 낭만파 계관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아내인 메리 셸리는 이 작품을 통해 과학기술이 일으킬 수 있는 사회·윤리적 문제를 다룬 소설을 최초로 썼다. 이 소설의 가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사못이 관자놀이에 박힌 괴물을 먼저 떠올린다. 그래서 그저 공포의 주인공쯤으로만 여긴다.

‘오즈의 마법사’도 사실은 모험담이 아니라 당시 미국의 경제와 정치에 대한 풍자였다. 실제로 ‘오즈(Oz)’라는 낱말은 바로 ‘온스’를 뜻하는 것이다. 이 밖에 동화로 착각하거나 어릴 적 아이들 입맛에 맞게 각색되고 축약된 이야기들이 판을 치는 까닭에, 그리고 정작 자라서는 그게 동화라고 여겨서 다시 읽지 않는 이상한 악순환 구조 때문에 정작 이야기의 본뜻이나 가치 혹은 의도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지나는 것들은 생각보다 꽤 많다.


풍자적 유토피아 소설의 효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도 예외는 아니다. 흔히 거인국과 소인국의 환상적 이야기로 알고 있지만 이 소설은 뛰어난 풍자소설이고 그중에서도 풍자적 유토피아 소설의 효시인 작품이다. ‘여행기’ 특히 배를 타고 떠난 여행기의 양식을 택한 것은 당시(이 작품이 출간된 해는 1726년이다)의 사람들이 멀고 기이한 지역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많았던 때이고 특히 영국이 바다를 통해 세계로 진출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크게 호응을 받을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꼭 영국인들만의 특징일 수는 없다. 누구나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떠나고 싶어 한다. 마음대로 떠날 수 없을 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스위프트가 떠나는 건 단순히 다른 나라 다른 곳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심 혹은 이국 취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내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정의도 아니고 반드시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한 일종의 ‘타자적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서술의 방식이 바로 ‘우화적 풍자’였다.

이 작품은 성인을 위한 풍자소설이지만 워낙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이어서 아이들이 읽기에도 적합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이 소설을 동화의 틀로 각색하고 요약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상상력의 발견과 실현이라는 점에 기여한다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낯설고 신기한 옛날이야기 혹은 어린이 이야기인 동화로만 제한한다면 그것은 매우 그릇된 독서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은 뛰어난 우화이며 풍자문학이다. ‘실락원’이나 ‘로빈슨 크루소’가 그랬고 훗날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같은 맥락에 있다. 이런 유형의 작품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찰을 우화적인 수법으로 묘사한다. 우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시공을 초월해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어렸을 때 요약본 동화로만 읽은 사람은 ‘걸리버 여행기’ 하면 대뜸 대인국과 소인국을 떠올린다. 몸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데에서 오는 신기함이 주된 포인트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찰이고 당대 현실에 대한 풍자와 고발이다. 제1부인 소인국 이야기는 우리가 현실에 갇혀 작은 이해관계에만 매달려 있는 모습이고 제2부의 거인국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모습을 확대해 본 모습이다. 거인국·소인국·대인국의 이야기는 ‘크고 작음의 문제는 비교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제3부는 이성주의를 맹신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4부 말의 나라에서 만나는 야후는 바로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상징한다. 동물로서의 인간의 본성은 어떠한 것인지 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진기한 환상의 이국 이야기나 모험담이 아니라 당대 사회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풍자는 정치적 현실과 세상 풍조, 기타 일반적으로 인간 생활의 결함이나 악습, 불합리와 비정상, 허위 등에 대해 가해지는 기지 넘치는 비판적 혹은 조소적 발언을 의미한다.

풍자는 독자로 하여금 마음껏 조롱하고 비판할 수 있는 쾌감을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어서 많은 작가들이 사용했다. 그러나 풍자의 대상이 주로 기득권력자들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부담을 안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의 눈으로 보면 자연스러울지 모르지만 근대까지만 해도 그것은 자칫하면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풍자문학은 대담한 시대 발언인 셈이다. 우리는 ‘걸리버 여행기’를 그런 점에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도 동화적 관점에서만 이해한다면 이것은 잘못 짚어도 너무나 잘못 짚은 것이다.


풍자문학은 대담한 시대 발언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힘이 있건 없건, 잘났건 못났건 풍자문학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인간들처럼 악한 일을 행한다. 그들은 출세하기 위해 왕에게 아첨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줄타기 솜씨를 왕에게 선보여야 한다. 스위프트는 줄타기라는 상황 설정을 통해 시세에 영합하는 정치인들이나 고위 공직자의 행보를 암시하고 있는데, 줄타기가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되는 비유라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스위프트의 통찰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패거리를 만들고 그 껍데기 속에 숨어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스위프트는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계란의 얇은 쪽을 깨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하는 사람의 수가 반란 때마다 1만1000명을 넘는다고 집계되어 있소. 그런데 두꺼운 쪽 깨기파의 책은 금지된 지 오래되었고 그쪽 사람들은 법률에 의해서 간직을 갖지 못하게 되어 있소.”

이게 무슨 해괴한 발언인가? 내용은 이렇다. 달걀을 먹기 전에 원시적인 방법은 달걀의 큰 모서리 쪽을 깨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왕의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달걀을 먹기 위해 기존 방법에 따라 달걀을 깨려다 손가락을 다치자 그의 아버지가 모든 국민들이 달걀을 깰 때 작은 모서리 쪽으로 깨라고 칙령을 내렸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계란을 깰 때 적절한 쪽의 끝 부분을 깬다’고 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성경에 명시했다. 역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이 법에 몹시 분개해 여섯 번의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으로 한 명의 왕이 목숨을 잃었고 한 명의 왕은 왕관을 잃었다.

결국 이 여파로 이 나라 사람들은 달걀을 깰 때 모서리가 큰 쪽으로 깨느냐 작은 쪽으로 깨느냐에 따라 각각 ‘큰 모서리(Big-Endian)’파와 ‘작은 모서리(Small-Endian)’파로 나눠지게 만들고 이들은 서로 간에 반목과 질시를 하며 서로 화합하지 못하게 됐다고 걸리버는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마침내 걸리버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란을 뾰족한 쪽으로 깨뜨리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사람의 수가 1100명에 이르렀다.”

이 풍자는 그저 계란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일로 다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작품의 전모와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은 곤혹스럽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제대로 읽어야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는데, 정작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때로는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러려면 한 걸음 밖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풍자와 우화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의 토대 위에서 문제의 핵심을 공감할 수 있는 방식이다. 풍자로밖에 현실을 비판하지 못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러나 풍자를 상실한 사회 또한 불우하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초시공간적인 시선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풍자나 우화는 말장난이 아니다. 진정한 가치의 풍자는 사태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인간 보편적 가치 판단 위에 세우는 위대한 작업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단순히 아일랜드 최고 풍자 작가의 대표적 풍자소설에 그치지 않고 여전히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깊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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