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사기 위해 줄 서는 어른들

고가 동물 인형 ‘한사토이’ 인기…키덜트 시장 5000억 원대 급성장


요즘 어른들이 이상하다. ‘무민’이라고 불리는 캐릭터 인형을 사은품으로 받기 위해 도넛 가게에 길게 줄을 선다. 슈퍼마리오 장난감을 받으려고 패스트푸드점에도 줄을 선다. 무려 8만여 명의 어른이 ‘키덜트(kidult) & 하비 엑스포’에 모여 피규어·캐릭터 인형·아트토이 등을 구경하고 구입한다. 정작 아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즉 키덜트족의 입지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형이 더 이상 아이들의 전유물로만 남지 않게 된 지 벌써 30년째다. 키덜트는 1985년에 미국 뉴욕타임스가 기사화하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한 단어다. 아이를 뜻하는 ‘키드(kid)’와 성인을 뜻하는 ‘어덜트(adult)’의 합성어로, 몸은 성인이지만 행동이나 취향은 어린아이 같은 부분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국내 키덜트 시장은 약 5000억 원 규모로 추정되며 매년 20~30%씩 성장하고 있다. 관련 업계에서는 국내 완구 시장 전체의 규모를 약 1조 원으로 보고 있다. 소수의 취미 생활이었던 키덜트 문화가 명실공히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봉제 인형 시장의 변화가 점차 눈길을 끌고 있다.

국내에서는 오로라월드·손오공·영실업 그리고 미국의 브랜드 타이(ty) 등의 봉제 인형 브랜드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내 브랜드인 오로라월드는 1981년 봉제 인형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로 시작했다. 1992년에는 자체 브랜드를 개발해 미국 시장에 뛰어들었고 현재 한국보다 미국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브랜드 타이는 수집 인형 브랜드라고 불릴 만큼 수집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브랜드다. 1986년에 설립됐고 1993년 ‘비니 베이비(Beanie Babies)’를 제작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형의 발과 몸통 부분에 콩알만 한 크기의 알갱이가 들어 있는 비니 베이비가 주력 상품이다. 곰·토끼·강아지 등 일반적으로 아이들에게 사랑받았던 동물뿐만 아니라 도마뱀·악어 등의 파충류에서부터 거미와 같은 벌레까지 다양하게 제작해 어른들의 수집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키덜트 문화와 만난 봉제 인형 시장
1980년대 후반 인건비가 폭등하면서 국내 완구 산업이 사양산업으로 전락했다. 동시에 저렴한 인건비를 자랑하는 중국의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인형들이 전 세계적으로 봉제 인형 시장을 잠식했다. 이에 따라 봉제 인형 브랜드가 점차 콘텐츠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자기만의 색깔을 중시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와 함께 키덜트가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봉제 인형 시장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한다. 고객층이 어린이에서 성인으로 대폭 넓어진 것이다. 키덜트는 성인들이 각박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감성적이고 즐거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심리 상태를 기반으로 한다. 최근에는 ‘오포세대(연애·결혼·출산·인간관계·내 집 마련을 모두 포기한 세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난 젊은층의 힐링을 위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경기의 상황은 여전히 어둡다. 장기 저성장의 길로 들어섰다는 전망도 많다. 그런데 많은 유통 전문가들이 올해 개인의 연간 평균 소비지출이 4만 달러에 육박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으며 특히 ‘작은 사치’와 같은 개인 만족형 소비에 주목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키덜트 문화다. 3040 싱글족이 소비의 주체로 급부상하면서 키덜트 문화가 새삼 주목 받고 있다.

동물 인형 전문 브랜드인 한사토이는 요즘 ‘핫’하다. 국내 1호점이자 공식 직영점인 압구정점뿐만 아니라 N서울타워와 용인 에버랜드, 63스퀘어, 잠실 롯데월드몰에도 단독 매장으로 입점했다.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는 팝업스토어(반짝 매장) 형태로 등장했고 디큐브백화점과 갤러리아타임월드에서는 동물 인형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노보텔 앰배서더 호텔 강남점은 예약 이벤트로 한사토이 제품을 증정한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지하철과 연결된 입구 가까이에 한사토이 팝업 스토어를 마련해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교보문고 팝업 스토어에서 인형을 구경하고 있던 이수정(22) 씨는 “책을 사려고 앞을 지나갔다가 결국 구경하려고 다시 돌아왔다”며 “처음엔 아이들용인가 싶었지만 귀엽고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이·어른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사토이는 1972년 호주의 한스 악슬렘(Hans J. Axthelm)이 만든 동물 인형으로 시작해 현재 전 세계 36개국에 진출한 글로벌 브랜드다. 브랜드명 ‘한사(HANSA)’는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국내에는 오우아스를 통해 2010년 10월 공식 론칭됐다. 진짜같은 동물 인형을 만드는 실사 인형 브랜드로 조금씩 주목받다가 본격적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한사토이의 인형은 절대 ‘착한 가격’이 아니다. 손바닥 하나에 올라갈 정도인 가장 작은 사이즈가 1만8000원부터 시작한다. 두 손에 올라갈 만한 크기의 3만 원대 인형부터 2m 내외의 수백만 원대 거대 인형까지 다양하다. 아이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사주기는 어려운 가격대인 만큼 높은 품질에 반한 어른들이 더 선호한다.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제격
“동물 인형에 둘러싸여 있으면 마음의 안식을 느낀다”는 홍재희(26) 씨는 기회가 날 때마다 한사토이의 제품을 하나씩 구입하는 수집가다. 홍 씨는 “다 큰 동물은 크게, 새끼는 작게 만들어 실제 사이즈와 유사한 인형들을 보니 진짜 동물 같았다”며 “동물을 좋아하는데 키우지 못하는 환경이어서 대리 만족도 되고 수제여서 그런지 인형들마다 생김새가 미묘하게 달라 더 현실적”이라고 구입 이유를 밝혔다.

한사토이의 또 다른 인기 비결은 바로 인테리어 효과다. 한 번의 구매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부쩍 집 꾸미는 재미에 빠졌다는 정인하(43) 씨는 거실의 빈 공간을 채울 만한 인테리어 소품을 찾다가 한사토이를 발견했다. “가구를 빡빡하게 넣는 것보다 커다란 동물 인형을 두는 것이 거실 분위기를 바꾸는 데 가격 대비 효과가 좋다”며 “실제 동물에 가깝게 만들어서인지 유행을 타지도 않고 세련된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인형인 만큼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기본이다. 서울 신사동 압구정 거리에 자리한 압구정점의 지하에는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돌아다닐 수 있는 키즈카페가 마련돼 있다. “직접 만질 수 있는 동물원이라고 생각돼 아이를 데려왔다”는 김지수(35) 씨는 다섯 살짜리 딸보다 더 적극적으로 구경했다. 한사토이 측에서는 “오히려 같이 온 아이는 카페에서 놀도록 잠시 놓아 두고 위층 매장에 올라와 인형을 구경하고 구입하는 어른들도 많다”고 말했다.

한사토이 압구정점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형 ‘베스트 3’ 중 1위는 단연 기린 인형이다. 위아래로 길쭉한 생김새 덕분에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특히 27cm 크기의 인형(2만9000원)이 높은 판매량을 자랑했다. 2위는 18cm의 아기 백호 인형(3만5000원), 3위는 29cm의 하프물범 인형(2만1000원)이다.

한사토이를 국내에 론칭한 오우아스는 2010년부터 매년 2배씩 매출을 끌어올리고 있다. 게다가 오우아스의 전체 매출 가운데 70% 이상(2014년 기준)이 성인·기업 고객의 소비에서 비롯되고 있다. 단순히 동물 인형을 판매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매장의 사파리화, 온라인숍의 활성화, 방송 등을 통해 인테리어 소품으로 적극적으로 마케팅한 결과다.

한사토이를 론칭한 한국의 오우아스는 세계 최초로 한사토이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주력 매장)를 열어 기존의 봉제 인형 시장의 틀을 성공적으로 깼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성진 오우아스 대표는 “OEM이 아닌 철저한 주문 생산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빠르게 변하는 시장의 흐름을 읽어 내는 업체가 늘어난다면 국내 완구 산업도 다시 성장 산업에 합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시경 인턴기자 cky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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