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쇼’보다 재정정책 눈여겨보라

가열되는 환율 전쟁…통화정책만으론 경기 부양 한계

에너지 혁명을 바탕으로 한 미국 경제의 독주와 과다 부채에 따른 수요 부진이 다양한 불균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첫째, 미국은 금리 인상을 준비하고 있지만 미국 이외 지역은 기준 금리를 인하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금리 인상을 앞두고 자금 이탈이 걱정된다던 신흥국들마저 금리 인하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둘째, 주변국의 수요를 빼앗아 오기 위해 자국의 통화가치를 더 떨어뜨리려는 환율 전쟁이 곳곳에서 다시 불붙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마저 등장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이자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보관료를 내야 한다는 의미다. 국가 신용 등급 ‘A’등급 이상 27개 국가의 41%인 11개국의 국채 2년 금리가 이미 마이너스권에 진입했다.

셋째, 재정 위기에 봉착한 산유국들의 석유 전쟁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전체 수출의 95%를 석유 수출에 의존하는 베네수엘라는 부도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

넷째, 국제 유가 급락은 중·장기적으로 글로벌 경제에 분명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글로벌 디플레와 경기 둔화 우려를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일본중앙은행(BOJ)이 잠잠하던 사이에 이번엔 유럽중앙은행(ECB)이 포문을 열었다. ECB는 올해 3월부터 매월 600억 유로(약 670억 달러)의 자산을 적어도 내년 9월까지 매입하는 총 1조1400억 유로의 양적 완화(QE)를 단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자산 매입 규모와 기간 측면에서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은 수치다.

바주카포를 앞세운 ECB의 힘으로 달러 대비 유로는 9년 내 최저치인 1.12달러로 폭락했다. 이에 대응해 스위스는 금리 인하와 함께 유로화에 대한 환율 하한을 전격 폐기했고 덴마크·캐나다·노르웨이 등 G10 통화국은 물론 인도·터키·페루 등 신흥국들마저 잇따라 금리 인하에 나서고 있다. 달러 강세와 유가 하락은 미국의 금리 인상 시점 지연 기대를 높이고 있고 꾸준히 금리 인상을 주장하던 영국중앙은행(BOE)의 소수 의견은 사라졌다. 유로가 폭락하는 바람에 작년 10월 말 깜짝 질적·양적 완화(QQE2)의 효과가 반감된 BOJ가 다음 주자로 거론되는 등 환율 전쟁이 다시 확산되는 양상이다.


백기 든 스위스중앙은행
ECB의 여파로 익숙하지 않던 두 군데의 중앙은행이 전면에 등장했다. ECB의 전면적 국채 매입을 앞둔 1월 15일 스위스중앙은행(SNB)이 2011년 9월 이후 유지해 오던 1유로당 1.20프랑의 환율 하한선을 전격 폐기했다. 그 결과 당일 외환시장에서는 패닉성 손절이 속출하며 유로 대비 스위스 프랑(EUR·CHF)은 장중 41%가 절상되기도 했다. 외환 중개 회사들의 거래 중단과 파산 소식도 이어졌다. 스위스의 국채 금리는 10년 만기까지 마이너스권에 진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금융 위기 이후 상대적으로 안전한 스위스로 자금이 몰리면서 스위스 프랑(CHF)의 절상 압력이 강화됐고 환율 하한제를 통해 이를 방어(유로화 매수, 스위스 프랑 매도)하던 SNB의 대차대조표는 양적 완화를 시행했던 나라들보다 더 많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85%까지 급증했다. 유럽사법재판소(ECJ)가 ECB의 무제한 국채 매입(OMT)이 유럽연합(EU) 조약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정하자마자 SNB는 손을 들었다. 유로 약세에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는 환율 전쟁의 첫째 낙오자가 됐다.

같은 날인 1월 15일,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출신의 라구람 라잔 총재가 이끄는 인도중앙은행(RBI)은 임시 회의까지 소집하며 기준 금리를 7.75%로 0.25% 포인트 전격 인하했다. 유가 급락에 따른 물가 하락 압력과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가 배경이다. 한때 ‘취약 5개국(Fragile 5)’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인도다. 아시아는 아니지만 페루중앙은행도 똑같은 이유로 기준 금리를 3.25%로 0.25% 포인트 인하했다.

남미나 EMEA(신흥 유럽·중동·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아시아 국가들은 5%대의 높은 성장률과 경상 흑자, 안정적인 외화보유액과 대외 부채를 바탕으로 최근 달러 강세 속에서도 신흥국 위기에서 한발 비켜 가며 안정적인 환율 흐름을 이어 가고 있다. 유가 급락으로 에너지 수입 부담도 감소했다. 물가 하락 압력과 경기 둔화 우려가 겹치며 중국·인도·한국·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금리 인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상과 달러 강세, 신흥국 통화 약세 구도 속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 시점이 늦춰질 것이라는 목소리가 신흥 아시아의 통화 완화 움직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달러 강세와 유가 급락에 따른 물가 하락 압력은 미국의 금리 인상에 걸림돌이 된다. 금리 인상을 반영하며 0.74%까지 급등했던 미 국채 2년 금리도 다시 0.48%까지 하락했다. 유가 하락에 따라 에너지 섹터를 중심으로 기업 이익도 급감하고 있다.

ECB를 포함해 최근 각국의 정책은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예측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산 전략 측면에서 정책을 바라볼 때의 핵심은 심플하다. 각국 정부의 재정 긴축 완화가 동반되는지 혹은 ECB의 국채 매입이 독일의 재정을 기반으로 하는지 여부다.



과다 부채의 여파로 각국 정부는 재정정책을 사용하지 못하고 중앙은행의 비전통적 통화정책에 의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통화정책은 더욱 자극적이어야 하며 서프라이즈를 연출해야 한다. 유로존을 포함해 과다 부채의 축소(디레버리징)가 진행 중인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통화정책 효과가 미약하기 때문이다.


재정 결합해야 펀더멘털 개선 가능
지금처럼 통화정책만 강화될 때는 주가 상승과 금리 하락이 동시에 나타나며 펀더멘털과 자산 가격 간의 괴리가 확대된다. 통화정책의 경기 부양 효과는 미약해졌지만 유동성 공급에 따라 주식과 채권 가격이 모두 상승하기 때문이다. 특히 ECB의 국채 매입 기대나 SNB의 마이너스 예치금 금리 인하 등은 직접적으로 채권 금리를 끌어내린다. 반면 깜짝 통화정책이 경기 부양 효과가 직접적이고 큰 재정정책과 결합될 때는 펀더멘털에 대한 기대가 형성되며 주가와 함께 금리도 반등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재정정책 동반이 없고 통화정책만 서프라이즈하다. 단기적으로 주가 상승과 금리 하락이 동반돼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2014년 말 글로벌 주식은 미국 주식의 주도 하에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현재 일본과 신흥국 주식도 금융 위기 이전 고점을 각각 93%, 85%까지 회복했다. 유럽 주식은 ECB에 힘입어 박스권 상단을 강하게 상향 돌파했다. 2008년 8월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금융 위기 이전 고점의 58% 회복에 불과하다. 바닥을 다지고 있는 유로존 기업 이익 전망치의 반등 기대감도 있다. 중기적으로는 밸류에이션에 대한 부담이 높지만 단기적으로는 유럽의 주식·채권과 함께 미국의 금리 인상 지연 기대로 숨통이 트인 신흥국 자산의 반등이 예상된다.

유럽에는 루이비통(LVMH) 등 유명 브랜드를 가진 기업들이 많다. 최근 가파른 유로 약세는 유럽 수출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강한 브랜드 파워를 지닌 유럽 기업들 중에서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기업들은 지난해 10월 이후 유럽 지수 대비 우월한 성과를 기록 중이다. 특히 올해 실적 증가율 전망치는 지수 평균(매출 4.0%, 주당순이익 11.8%)보다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기업들의 전망치(매출 6.8%, 주당순이익 13.2%)가 우월하다. 에실로(안경)·인디텍스(ZARA) 등에 주목한다.


신동준 하나대투증권 자산분석실장 djshin@hanaf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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