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가르는 길 ‘다리’

사랑과 증오·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놓였던 다리의 역사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온다는 것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무른다.”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앞부분이다. 고교생 시절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 한 여고생과 연애를 할 때 필자는 국내외 유명 시를 제법 많이 줄줄 외고 다녔다. 섬진강 다리 위를 산책하다가 다리 난간을 붙잡고 흐르는 강물을 보며 이런 시를 아내에게 읊어 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낯이 화끈거리지만 그땐 얼마나 진지했는지 모른다. 하여간 그때 외운 시나 읽은 소설들이 지금 내가 글을 써서 먹고 살아가는 일의 원천이 되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문학에서 다리는 밀회의 공간
“누가누가 놓았나 조그만 돌다리/ 깡충깡충 건너는 징검다리”로 시작되는 동요 ‘돌다리’는 원래 영국 민요 ‘런던브리지’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 서울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만 해도 서른 개나 된다고 한다. 필자도 매일 동작대교와 반포대교를 오간다.

여말선초의 정치가 정도전은 그의 저서 ‘삼봉집(三峰集)’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다리를 놓아 사람들의 왕래가 원활하게 만드는 것이 왕도정치의 일단이다.” 다리는 예나 지금이나 일상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인간의 발명품 중의 하나라는 소리다.

오작교(烏鵲橋)는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씩 만나는 장소였다. 광한루의 오작교는 춘향과 몽룡이 만나던 곳이다. 소설 ‘구운몽(九雲夢)’에서 주인공 성진은 용궁을 다녀오다가 석교(石橋) 위에서 8선녀를 만난다. 로미오와 줄리엣 커플도 필시 이탈리아 베로나 시내 어떤 다리 위에서 밀회를 즐겼을 것이다.

다리 위에서 어찌 희망과 환희와 사랑과 만남의 노래만 불렸을까. 선죽교(善竹橋)는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한 비극의 장소다. 1192년 중국 금나라 때 세워진 노구교(蘆溝橋)는 ‘동방견문록’의 저자가 극찬해 ‘마르코 폴로의 다리’라고도 불리는데, 1937년 중일전쟁의 발단이 되는 ‘노구교 사건’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콰이강의 다리’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리의 건설과 파괴라는 사건을 배경으로 전쟁의 비극을 그린 역작이다.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중국 최초의 다리도 전쟁과 관련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러 가면서 거교(鋸橋)라는 다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의 일이다.

전란이 100년이나 지속된 삼국지 시대에 다리는 전쟁을 치르는 필수 요소 중 하나였다.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고 화용도(華容道)를 통해 도망가던 조조 군대의 모습은 비참했다. 소낙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바람마저 거세게 부는데 진흙탕 길을 통과하려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병사와 말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지친 병사들이 풀을 구해 진흙탕을 메우면서 전진하려니 퇴각 속도가 더욱 느릴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속에 열불이 났다. “산을 만나면 길을 만들고 강을 만나면 다리를 놓아서라도 전진해야 하거늘, 속도가 이리 느려서야 대체 언제 돌아간단 말이냐?”

아무리 조조가 ‘난세의 간웅’이라지만 참혹한 패배를 연출한 장본인이 죽어가는 병사들을 나무라니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조조의 발언을 뒤집어 보면 비행기는커녕 제대로 된 선박이나 육로 운송 수단조차 변변하지 않은 시절이었던 만큼 다리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다리는 장판교(長板橋)가 아닐까 싶다. 유비가 아직 자신의 확실한 세력권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던 시절 이야기다.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유비는 천하 쟁패의 꿈을 안고 제갈량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삼고초려하고 있었다. 유표가 죽자 조조는 형주를 침공한다. 유비는 강남으로 퇴각하고 조조 군대는 지금의 호북성 당양에 있는 장판까지 유비 군대를 추격해 온다.

유비는 장비에게 겨우 20여 명을 주면서 5000명의 조조 군사의 배후를 막으라고 했다. 장비는 꾀를 냈다. 부하들로 하여금 멀리 숲속에서 말 20마리의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먼지를 일으켰다. 많은 수의 병사가 주둔해 있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조조의 군대가 몰려오자 장비는 강에 있는 다리 한쪽에 호랑이 수염에 고리눈을 부릅뜬 채 장팔사모(여덟 길이 되는 세 모가 난 창)를 치켜들었다. 5000 군대를 오직 장비 혼자 막아선 것이다. 추격해 오던 조조가 기선을 제압당했다. “내가 전에 관우에게 들었다. 장비는 100만 군병 속에서도 장수 목 베기를 자유자재로 한다더라!”


전쟁에서 ‘신의 한 수’ 됐던 다리
그때 장비가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바로 장비다. 누가 감히 나와 한판 겨뤄 보겠느냐? 목숨이 아깝거든 썩 비켜라!” 조조 수하의 장수 하후걸이 장비의 대갈일성(大喝一聲)에 놀라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조조도 덜컥 겁을 먹고 말머리를 돌렸다. 보스가 말머리를 돌리자 병사들도 앞다퉈 철수했다. 이 다리가 바로 장판교다.

장판교는 단기필마로 조조 진영에 뛰어들어 유비의 아들 유선을 구해낸 조자룡이 건너온 다리이기도 하다. 훗날 유선이 태자로 책봉되자 사람들은 장판교를 태자교(太子橋)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비가 낙성을 공격할 때의 일이다. 서촉 유장의 부하 장수 장임(張任)이 막아섰다. 용맹하고 똑똑하며 충직하기로 소문난 장임은 매복 전술을 사용해 유비군의 군사(軍師)인 방통을 죽인다. 방통은 유비가 타는 백마를 대신 타고 협곡을 지나가다 매복해 있던 적군의 무수한 화살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방통이 죽은 협곡이 낙봉파(落鳳坡)다. 유비는 구원군으로 온 장비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면했다. 화가 난 제갈량이 직접 나섰다. 그는 장비·조자룡·황충·엄안·위연 등 촉나라 용장들을 모두 이끌고 장임의 군대를 협공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진 장임이 붙잡힌 곳이 바로 금안교(金雁橋)다.

적벽대전 승리 이후 기세등등해진 오나라 손권이 조조 막하의 장료 군대와 합비(合肥)에서 싸우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손권은 1차 침공으로 용장 태사자까지 잃었지만 조조가 한중을 정벌하러 간 사이 재차 합비를 침공했다가 장료의 결사 항전으로 위기에 처했다.

“빨리 소사교(小師橋)로 도망가세요!” 그러나 소사교는 장료가 이미 끊어버린 뒤였다. 손권이 얼마나 놀랐던지 말을 타고 나는 듯이 강을 건너 도망쳤다. 말을 타고 나는 것으로 다리를 대신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이 상황을 비기교(飛騎橋)라고 불렀다.


사족. 원래 다리는 강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지나간다는 뜻에서 ‘통과(passage)’를 상징한다. 새로운 세계와의 ‘연결’을 뜻하기도 하고 ‘이승과 저승’을 이어 주는 가교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뜻에서 조자룡과 손권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리를 건너 이승으로 살아 돌아온 것이고 장임은 저승으로 가는 다리를 건넌 셈이다.

그렇다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국법을 어기고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면서 이탈리아 북부의 루비콘을 건널 때 그때 그 강에는 다리가 있었을까. 사람이 죽으면 간다는 요단강과 삼도천은, ‘그리스 신화’의 저승의 왕 하데스를 만나러 갈 때 건너는 스틱스 강은 또 어떤가. 발칙한 상상의 날개는 끝없이 이어진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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