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KO 재판, 누가 누구에게 사기를 쳤나

‘키코는 무조건 사기다’라는 주장이 사안의 본질을 가려 진짜 억울한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의 재판을 망쳤다.

정지홍 RHT 대표
1973년생. 2000년 미 웨스트버지니아주립대 수학 및 컴퓨터공학 전공. 2006년 시카고대 대학원 금융수학 석사. 2001년 미 필립스그룹 메드퀴스트 근무. 2006년부터 KB국민은행·액센츄어 등에서 근무. 2011년 리스크헷지테크놀러지(RHT) 대표(현).


상공회의소에서 환율 및 원자재 헤지에 대해 강의를 한 적이 있다. 한 분이 질문을 한다. ‘키코(KIKO)는 다 잘못된 사기 아니었나.’ 질문을 받자마자 몇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그분이 박사 학위에 구청장까지 지낸 사업가라는 얘기를 듣고 ‘그런 분까지 키코 상품 자체가 사기라고 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욱하는 마음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키코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을 때 사건을 맡기면 민사뿐만 아니라 사기죄로 형사까지 갈 수 있다고 달려든 변호사들, 자신이 키코 영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키코가 사기라는 증언을 할 테니 기업들에 보상을 해달라고 요구한 은행원, 정의감에 불타는 교수들 등이 나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키코는 헤지에 부적합한 은행만 이익을 보게 돼 있는 사기 상품이다.”

키코는 환율이 내려가면 기업이 ‘제한된 선까지만 이익’을 보고 환율이 오르면 기업이 ‘오른 만큼 제한 폭 없이 손해’를 보는 계약이다. 이 ‘제한이 있고 없는’ 차이에 대한 보상은 기업이 이익을 보기 시작하는 환율 구간과 손해를 보기 시작하는 환율 구간의 조정을 통해 이뤄진다.

이익이 제한되고 손해가 무제한인 점 때문에 거래의 규모가 헤지가 적정하게 이뤄지는지 아닌지의 핵심이 된다. 실제로 100만 달러를 가진 기업이 환율 하락에 대비하기 위해 100만 달러짜리 키코 계약을 하고 환율이 상승하면 거래 자체에서는 손해가 난다. 하지만 보유한 100만 달러의 가치 상승으로 상계가 이뤄져 교과서적인 헤지 거래가 된다. 하지만 100만 달러가 없다면-상계될 자산이 없는- 무제한 손실의 가능성 때문에 헤지가 아닌 은행과 돈 놓고 돈 먹기의 투기가 된다. 그러면 은행이 무조건 이익을 볼 수밖에 없는 사기라는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본질적으로 키코 거래의 손익은 환율에 의해 결정되는데, 환율의 방향은 누구도 100% 정확히 알 수 없다. 심지어 키코를 많이 판매한 외국계 은행들의 음모론까지 주장됐는데, 2008년의 환율 급등은 가장 큰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망하면서 시작됐는데 무슨 음모가 자기부터 망하는 음모가 있을 수 있나.

필자가 들어본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내가 회사를 30 년 하면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환율이 갑자기 2000원까지 가는 것도 봤는데, 회사가 잘되고 있었는데 환율이 1500원만 가도 회사가 망하는 계약을 했겠느냐’였다. 하지만 은행의 위험 고지 여부, 개별 거래의 헤지 적합성 여부 등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다른 주장들이 사기라는 주장에 묻히고 말았다.

또 이 사안에 관해 존경 받을 수 있었던 대법원의 관점은, 계약 규모가 너무 커져 키코 거래가 헤지 거래가 아닌 기업의 존망이 걸릴 정도의 투기 거래가 됐다면 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위험 고지는 충분히 이뤄졌는지, 위험 고지가 충분히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공적 기관의 성격을 지녔는지다. 그뿐만 아니라 금융 지식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은행들이 제조 기업들과 이런 위험한 계약을 하는 것이 옳은지를 따지는 것이 됐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역시 아무 의미 없는 키코 자체의 적합성에 초점을 둔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성인이 초등학생과 동전 던지기를 해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맡겨 놓은 돈을 땄는데, 동전 던지기 자체는 공정하다고 해서 성인이 면죄부를 받은 꼴이다.다 사기라는 주장 때문에 동전던지기의 공정성에만 초점이 주어지고 말았다.

"키코는 기업들은 손해볼 수 밖에 없는 완전 사기다." 본인의 이해에, 공명심에 충실한 사람들의 주장이 키코 피해자들을 두 번 죽였다. 누가 누구에게 사기를 쳤나. 대법원은 무엇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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