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이름’을 불러다오

좋은 별명은 자기 존중감 높여…애칭 부를 때 친근함 싹트기도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무슨 의미일까. 시인 두보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천추만세에 이름이 전해지면 무엇 하랴/ 죽고 나면 적막할 뿐인 걸” 죽은 뒤에 남은 이름은 ‘지금 한잔의 술보다 못하다’는 소리다.

조선 초기 일세를 풍미한 한명회라는 인물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더니 죽어서도 이름이 남았다. 그는 생전에 6명의 임금을 모시고 2명의 임금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며 영의정을 3번이나 지냈다. 한명회가 만든 오가작통법은 지금도 면(面)과 리(里)라는 대한민국 행정구역 체제의 근간이 되고 있다. 일곱 달 만에 태어나 ‘칠삭둥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한명회의 호는 압구정(鴨鷗亭)인데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유교 문화권에선 본명 부르기 꺼려
한명회는 당대에 간신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세조에게 ‘나의 장자방’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탁월한 참모였다. 장자방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특등 공신이다. 이는 조조가 자신의 참모 순욱을 일러 ‘내 장자방’이라고 했던 일화를 연상시킨다. 순욱은 어려서부터 비범해 사람들이 ‘왕좌지재(王佐之才)’라고 했다. 능히 제왕을 보좌할만한 인재라는 뜻이다.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에서는 본명을 부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어려서는 아명(兒名)을, 장가를 가면 자(字)를 사용했다. 이 밖에 호(號)를 지어 본명 대신 많이 사용했다. 본명과 자는 부모나 연장자가 지어 주는데 비해 호는 자신이 직접 짓거나 가까운 친구들이 지어 주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정서나 특징이 반영돼 있다.

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아호(兒號)는 아명(兒名)이다. 고종황제의 아명은 개똥이, 황희의 아명은 도야지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호는 별호(別號)다. 필명이나 별명은 별호라고 할 수 있다. 별호 중에서도 본인을 좀 더 꾸며서 부르는 호칭을 우아할 아(雅)자를 써서 아호(雅號)라고 한다. 이 밖에 택호(宅號)·당호(堂號)·시호(諡號) 등이 있다. 정약용은 자가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철마산인(鐵馬山人) 등이고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추사 김정희는 호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확인된 것만 72개라고 한다.

오늘 우리는 별호 중에서 별명에 한해 얘기하고 있다. 영어의 닉네임(nickname)이라는 개념에 가깝다. 예컨대 셰익스피어는 ‘언어의 창조자’라고 불렸다. 19세기 영국의 국민 화가 윌리엄 터너는 풍경화를 워낙 잘 그려 ‘풍경화의 셰익스피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아돌프는 ‘고귀한 늑대’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친구들이 히틀러를 늑대 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히틀러 막하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웠던 에르빈 로멜은 워낙 전략이 뛰어나 독일군이나 연합군을 막론하고 ‘사막의 여우’라고 불렀다.

9척 장신 공자는 어려서부터 ‘꺽다리’라고 불렸다. 그가 자신의 이상을 정치로 구현해 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할 때 공자의 지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상갓집 개(喪家之狗)’와 같다고 했다. 한편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세도정치하의 서슬 시퍼런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문중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상갓집 개’를 자처하며 흥청망청 아무 생각 없이 지내는 양 사람들을 속였다.

일본 전국시대 무장 오다 노부나가는 어릴 때 별명이 ‘오와리의 팔푼이’였다. 오와리는 노부나가의 고향이다.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전국시대 3인방(戰國三英傑)’으로 불린다. 이들은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노부나가는 때려죽이고 히데요시는 울도록 만들며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의 주인공들이다. ‘오와리의 팔푼이’가 전국시대를 평정할 줄 누가 알았으랴.

전국시대를 통일한 주역 오다 노부나가는 역시 삼국시대를 통일한 주역인 조조를 연상시킨다. ‘난세의 간웅’ 조조의 아명은 아만(阿瞞)과 길리(吉利)였다. 아만은 사람들을 잘 속인다는 뜻이고 길리는 자신의 이득을 잘 챙긴다는 뜻이다. 어렸을 때 자신의 본색을 잘 드러내지 않고 어수룩한 척 숨겼던 오다 노부나가와 달리 조조는 영악하고 이재에 밝은 모습을 일찍부터 노출시켰던 모양이다.


용맹한 사람 호랑이에 비유
사람들이 별명을 지을 때 역시 외모로부터 시작한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답다고 미염공(美髥公)으로 불렸다. 장비는 호랑이 수염이라는 뜻의 호염공(虎髥公)이란 별명이 있다. 장판파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것을 보고 제갈량이 지어 줬다. 조조는 용맹한 자신의 넷째 아들 조창을 황수아(黃鬚兒)라는 닉네임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 ‘금발의 수염을 가진 애’라는 애칭이다.

유비가 발탁한 인재 중 마량이 있다. 마 씨 집안 5형제가 모두 인재인데 그중에도 백미(白眉), 즉 양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마량이 가장 탁월했다고 한다. 여러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백미의 고사가 여기에서 나왔다. 멋진 외모로 뭇사람을 사로잡았던 주유의 별명은 미주랑(美周郞)이다. 마초도 잘생긴 외모로 이름 앞에 비단 금자를 붙여 금마초(錦馬超)라고 불렸다.

동물에 비유한 별명도 많다. 원소는 ‘북방의 효웅’이라고 불렸다. 효(梟)는 올빼미를 가리키는데, 옛날에는 올빼미가 어미를 잡아 먹는다고 해서 나쁜 새로 여겼다. 원소를 ‘나쁜 영웅’으로 비하한 별명이다. 항상 흰 말을 타고 다니며 용맹을 떨쳤던 공손찬과 위나라 방덕의 별명은 백마장군이다. 조자룡 역시 뛰어난 무용으로 ‘상산의 호랑이’라고 불렸다. 손권의 아버지 손견은 ‘강동의 호랑이’였다. 세종 시절 북벌로 유명한 김종서 장군의 별명이 ‘큰 호랑이(大虎)’였던 것처럼 용맹하고 대담한 사람은 호랑이에 곧잘 비유됐다.

사마휘는 유비에게 “복룡과 봉추 중에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얻는다”고 추천했다. 복룡(伏龍) 혹은 와룡(臥龍)은 제갈량이다. 엎드려 있거나 누운 용처럼 세상에 아직 몸을 드러내지 않은 인재를 말한다. 봉추(鳳雛)는 ‘봉황의 새끼’라는 뜻으로 방통의 별명인데 와룡·복룡과 같은 뜻이다. 사마휘의 별명은 수경선생이다. 수경(水鏡), 즉 물과 거울처럼 말고 깨끗한 인품을 높여 붙여졌다.


사족: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리더 한 분이 있다. 그분의 별명이 ‘장비 같은 조조’ 혹은 ‘조조 같은 장비’다. 기자들이 지었다고 한다. 의리도 있고 활달한 장비의 성격과 전략적인 마인드를 가진 조조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그분의 성정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애칭을 불러줄 때 사람들은 친근감을 느낀다고 한다. 좋은 별명은 자기 존중감도 높인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매사에 더욱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성취도도 높을 것은 자명하다. 이왕이면 타인을 부를 때 그들의 특성을 잘 반영한 멋진 별명을 하나씩 지어 불러주는 건 어떨까.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각자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개성 있는 이름 말이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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