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트렌드] ‘남성 천하’ 이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 찾기

유럽연합, 이사회 다양성 공개 의무화…국내 상장사 여성 임원 2% 불과


기업의 이사회는 기업 전략을 이끌고 경영자의 성과를 모니터링하며 주주들에게 적절한 수익을 보장하고 이해 충돌을 방지하며 회사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요구들의 균형을 맞추는 등 핵심 임무를 부여 받는다. 기업 이사회의 구성은 기업 지배 구조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이사회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기업의 중요한 의사 결정 및 정책이 달라질 수 있고 그 결과에 따라 기업의 성과도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사회는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안건에 자주 접하게 되는데, 이때마다 이사들 간의 의사소통, 의견 조율 등을 반드시 필요로 하게 된다. 여기에서 문제는 이사회를 구성하는 이사들의 특성들에 있다. 가령 이사회가 같은 성향을 가진 이사들로만 구성돼 있다면 이사회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한 명이 의사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것과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백인 남성’ 중심인 애플 이사회에 변화 바람
즉, 편협하고 제한된 생각으로 반대 의견을 내부적으로 갖지 못하게 되며 토론이나 도전 등의 부족으로 혁신적인 사고를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다양성이 부족한 인력 풀에서 이사 후보를 추천하게 되면 주주들은 기업에 적합하지 않은 이사를 선출하게 되며 이렇게 구성된 이사회는 유사한 성향을 갖고 있는 구성원을 지속적으로 선임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기업 경영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이사회가 다양한 능력과 관점을 갖는 것은 기업의 상황과 문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이사회는 경영 의사 결정 시 건설적인 반박이 가능해지고 혁신적인 생각에 대한 수용 능력이 향상되기 때문에 유사한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집단 사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 결과 이사회의 경영 활동 감독 및 관리 기능이 효율화되며 기업 거버넌스 개선이 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들에 대한 이사회의 다양성 확대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지난 10월 LA타임스에 따르면 애플은 내부 문서에 ‘이사회 구성원 후보로 여성과 소수권자를 고려할 계획’이라는 내용을 추가했다. ‘백인 남성’ 비중이 높은 애플 이사회의 다양성 결핍에 대한 주주들의 압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 애플 이사회의 구성원 8명 중 여성 이사는 한 명뿐이다.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 문제로 도마 위에 오른 기업은 애플만이 아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도 기업공개(IPO) 이전 이사회 구성원 중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 때문에 강하게 비난 받은 바 있다.

지난 4월 유럽의회 총회는 기업의 비재무적 정보와 이사회 다양성 정보 공개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본 법안은 2013년 4월 유럽위원회(EU Committee)에서 발표한 ‘2011~2014 CSR에 대한 신전략’ 발표의 후속 조치로 유럽 내 대기업들의 사회·환경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기존 회계 지침에 대한 개정안이다.

본 법안에 따라 유럽에 진출한 기업들은 환경·사회·노동·인권에 대한 존엄성, 부정부패 방지, 뇌물 수수 문제 등과 관련된 정책과 성과 및 리스크 관리 방법 등 비재무 정보와 이사회 구성원의 나이, 성별, 지역적 다양성, 학력, 직업 배경 등 이사회의 다양성에 대한 정보를 사업보고서에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만약 의무 공시 대상에 해당되는 기업이 정보를 공시하지 않으면 공식적으로 설명하거나 해명해야 한다.

본 법안은 2015년 7월 20일까지 유럽연합(EU) 내 각 회원국들의 국내법으로 구현돼 회계연도 기준 2017년 혹은 2018년부터 의무 적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도 EU 회원국에 진출했거나 진출할 예정이라면 환경·사회·인권 등 비재무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유가증권 상장사와 ‘코스닥 100’ 등 90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2013년 사업보고서상 자회사 현황을 분석해 본 결과 총 161사가 유럽 내 판매 또는 생산 법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중 고용 인원이 많은 대규모 생산 공장을 보유했거나 자산 규모와 매출액이 큰 기업들이 적용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사회의 다양성이다. 지침에 따르면 해당 기업들은 기업 지배 구조 보고서(corporate governance statement)에 이사회의 다양성에 대한 정책·목적·실행·결과를 보고해야 하는데, 다양성 정책이 없는 기업들은 정책을 새로 만들 의무는 없지만 없는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해야 한다. 국내 기업들은 사업보고서에 성별·경력 등 이사회에 대한 일부 정보를 공시하고 있지만 이사회 내 다양성 수준이 매우 낮기 때문에 이사회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

이사회의 다양성을 측정하는 대상으로 인종이나 민족의 다양성, 다양한 연령대의 분포, 학문의 다양성, 여성 이사의 비율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기업의 이사회와 달리 한국 기업에서는 인종이나 민족의 다양성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상장 기업 등기 임원의 내외국인 구분이나 인종을 공시하는 규정은 없다. 이 때문에 등기 임원의 이름을 통해 내외국인을 추정해 분석한 결과 등기 임원 대부분이 내국인이고 외국인은 약 2%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유럽에 비해 매우 낮은 비중이다. EU 전체 기업들의 이사회 구성원 중 비유럽 출신은 약 17%(기업 당 2명), 영국의 외국인 비율 약 40%, 그 외 국가(폴란드·스페인·독일 등)는 약 10~15%다.

국내에서 고려할 수 있는 이사회의 다양성은 이사들의 나이의 다양성과 출신 지역 또는 출신 대학의 다양성, 직업 배경 또는 전공의 다양성, 성별의 다양성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성별의 다양성 문제는 국제적으로 오랫동안 논의돼 온 주제이고 국내적으로도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문제다. 최근 이사회의 성별 다양성에 보수적이었던 미국과 영국 기업도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의 이사회 참여를 늘리고 있는 추세다. 한국 기업들도 여성 인재의 활용도를 높이고 기업의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해 이사회의 성별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르웨이, 상장사 임원 40% 여성 할당 법으로 강제
남성에 비해 여성은 풀타임으로 일할 확률이 낮고 저임금 직종에 종사할 확률이 높으며 지속적으로 직장 생활을 할 확률이 낮다. 또한 세계적으로 여성의 노동 참여가 증가했지만 여전히 아시아·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성별 격차가 크다. 또한 여전히 시니어급 직무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낮다. 기업의 고위 직급에 포함된 여성 역시 여전히 소수다.

하지만 이사회에 여성 임원 비중이 높을수록 회사의 지배 구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이사회는 임원의 행동을 더욱 강력하게 감시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남성 중심’의 네트워크에서 여성들의 숫자가 지극히 적기 때문에 여성 이사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면 이사회에 좀 더 독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모니터링 기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사회의 구성원 성별이 다양해지면 더 폭넓은 배경·경험·인식·문제해결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의 2010년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보다 여성이 직원 개발, 보상, 롤모델, 영감 부여, 참여적 의사 결정과 같은 리더십 능력을 더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사회에 여성 임원이 많아지면 이해 충돌을 해결할 때 더욱 철저하게 검토한다고 밝혔다.

세계적으로도 여성 임원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영국 런던 증시 FTSE 100에 편입된 기업들을 대상으로 여성 임원 현황을 조사한 결과 여성 임원의 비율은 2011년부터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해 2014년 평균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EU 전체적으로 이사회 여성 구성 비율은 13.7%이며 여성이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곳은 전체 기업의 3%다. 유럽 등 타 국가들에서 여성 등기 임원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 여성의 이사회 진출을 장려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국가들은 기업 지배 구조 규준(Corporate Governance Code)을 통해 이사회 성별의 다양성을 촉구하고 있다. 기업 지배 구조 규준은 전형적으로 상장회사에 적용되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처벌받지는 않지만 해명해야 하는 자발적 규제의 접근 방법이다.

기업 지배 구조 규준에서의 권고 범위는 다양하다. 네덜란드에서는 “이사회는 연령과 성별과 같은 요인들에서 다양한 구성을 목표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대기업은 여성의 비율이 30%가 돼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호주 증권거래소의 기업 지배 구조 규준은 2011년부터 “기업들이 이사회, 임원급, 조직 전체에 걸쳐 여성의 비율을 증가시킬 수 있는 측정 가능한 목표를 설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영국에서는 2011년 초 이사회 성별 다양성에 관한 정부 보고서인 데이비스 보고서(Davies Report)가 발간된 이후 상위 350대 영국 기업(FTSE 350)에 2013~2015년 동안의 이사회 여성 임원 비율 목표를 설정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FTSE 100 이사회는 2015년까지 여성 임원의 비율을 최소 25%까지 달성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기업들이 이사회 등 위원회 구성원 선정 방법이 얼마나 다양성을 고려하고 있는지 밝히도록 요구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기업들이 여성을 이사회에 진출시키기 위해 취한 노력을 공개해야 하며 캐나다 퀘백 지역에서는 이사회에서의 양성 평등을 법적 요건으로 명시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법적으로 여성 등기 임원 비율을 할당한 국가들도 있다. 2006년부터 상장회사의 이사회에서 여성이 40%가 돼야 한다고 명시한 법을 도입한 노르웨이에서는 이사회에서 여성 비중이 2003년 9%에서 2008년 40%로 상승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이러한 할당제를 준수하지 않으면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목표를 맞추지 못한 기업은 상장폐지된다. 이탈리아는 2010년 할당제를 채택했고 그 결과 10개월 만에 여성 등기 임원이 4.8% 증가했고 2011년 할당제를 도입한 프랑스는 모든 대형 상장사의 이사회에 여성 임원이 포함돼 있다.


한국 여성 임원 114명 불과…절반이 최대주주와 특수관계
반면 한국 기업은 이사회 내 여성 임원 비율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상장 기업의 2013년 사업보고서의 등기 임원 총 5679명의 정보를 분석한 결과 총 이사회 구성원 중 여성 임원이 있는 회사는 96개사(약 12%)였고 총 여성임원 수는 114명(약 2%)으로 나타났다. 한 기업 내 가장 많은 여성 등기 임원 수는 최대 3명이고 2명 이상의 여성 이사를 보유한 기업은 16개사에 불과했다. 여성 임원 중 사외 이사는 18명(약 16%)이었고 여성 이사회 의장은 고작 3명에 불과했다. 또한 여성 등기 임원 중 주식을 보유한 최대 주주 및 특수관계인이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적은 수의 여성 등기 임원들 대부분이 내부 승진을 통해 선출된 게 아니라 지배 주주의 권한으로 이사회에 속해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인재 풀, 다양한 경험 및 역량 이용, 소비자 니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등 이사회에 여성 임원의 비중을 높여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와 함께 독립적인 이사회의 역할 제고를 통한 기업 지배 구조 개선에도 이사회의 성별 다양성은 필수적이다.

변화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기업의 자발적인 개선 노력만으로 바꾸기 힘든 이사회 부문에 대해서는 해외 사례에서 봤듯이 정부의 정책적인 노력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공개적 목표를 설정하거나 이사회의 다양성을 높일 수 있도록 상장 기업들의 기업 지배 구조 규준을 개정하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보통 이러한 기업 지배 구조 규준이 상장 요건이 되기도 한다. 또한 ‘준수 또는 설명(Comply or Explain)’으로 대표되는 자발적인 법에서는 이사회 규모나 가용한 여성 이사 인재 풀에 대한 회사별 차이와 니즈를 감안할 수도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이와 함께 여성의 이사회 진출의 장애물을 줄이기 위해 보완적인 제도로 근로조건 탄력성, 직장·가정 균형을 위한 조치 역시 필요할 것이다.


이준희 EFC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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