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전쟁의 폐허에서 자유가 꽃을 피우다

2차대전 종전 후 파격적인 패션 내놓은 샤넬, 전쟁은 기존 질서에도 균열


나이팅게일은 여성 최초로 전쟁에 정식으로 참전했다. 바로 ‘크림전쟁’이었다. 그녀의 참전과 눈부신 활약은 분명 여성의 역할을 증대시키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남성의 권력과 경제력 독점은 견고했다.

크림전쟁이 시작된 지 거의 100년이 지난 1954년 2월 5일 오후 프랑스 파리 뤼 캉봉 31에 있는 살롱에서 기념비적인 패션쇼가 열렸다. 바로 코코 샤넬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첫 패션쇼였다. 이미 칠순을 넘긴 샤넬의 이날 패션쇼는 실망스러웠다. 1947년 이후 패션계를 좌우한 것은 디올의 ‘뉴룩’이었다. 여성의 몸매를 아름답게 과시하는 그의 패션은 전후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런 상황에서 샤넬의 패션은 진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굴하지 않고 복귀 이후에도 여전히 ‘샤넬 스타일’을 고수했다. “내가 곧 스타일이다”라는 당당함은 평생 그녀의 삶을 지배했다.

오늘날 샤넬은 고가의 명품으로 인식되지만 샤넬의 패션 철학은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하라”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몸을 꽉 조여 억압했던 코르셋과 허리받이인 버슬(bustle)로부터 여성을 해방하고 활동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선물한 사람이 바로 샤넬이었다. 땅에 닿는 긴 치마를 과감하게 잘라내 무릎 근처까지 올라간 치마와 자유로운 활동의 바지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여성의 의상이 우아하고 화려해야 한다는 통념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그녀의 철학은 옷에만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샤넬이라고 하면 옷만 떠올리지만 손가방에 끈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게 해 한 손을 자유롭게 만든, 즉 숄더백을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것은 혁명이자 여성의 해방을 뜻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확대되는 시대에 그녀의 의상 철학은 딱 맞아떨어졌다. 단순하고 편하며 실용적인,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스타일이 바로 그녀 의상의 핵심적 가치였다.

열두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세 자매를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겼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가브리엘 샤넬은 낮에는 보조 양재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연인의 도움으로 옷 만드는 재능을 살려 1913년 도빌에 첫 부티크를 열었다. 도빌은 휴양지여서 해변에서 한가로움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 정장이나 화려한 의상을 입을 까닭이 없다. 그저 편하면 되고 실용적이면 충분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아마도 그런 주변 환경에서 왔을 것이다. “패션은 복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패션은 하늘에도 거리에도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자 늘 새롭게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라는 그녀의 의상 철학은 그렇게 시작됐다.


여성은 남성의 장식품이 아니다
도빌에서 만든 의상, 즉 도빌 룩은 단순히 스타일의 변화만 추구한 게 아니었다. 원단도 파격적이었다. 그녀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운동복용 옷감인 ‘저지(jersey)’를 이용한 여성 의상을 처음으로 디자인해 활동성과 우아함을 동시에 지닌 옷을 창조해 냈다.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의 시작을 알린 옷이었다. 얼마 뒤 선보인 전설적인 블랙 디자인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의 풍만한 라인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남성복의 요소들을 도입, 단순한 편리성을 강조한 샤넬 정장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혁명이었다.

여성은 오로지 남성의 장식에 불과하고 여성의 옷 역시 남성에게 화려함과 우아함으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은 여성을 옷의 감옥에 가뒀다. 하지만 샤넬은 이를 거부했다. 처음에는 파격과 당혹으로 다가왔지만 사람들은 금세 그녀의 옷에 매료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미 당시에도 샤넬의 패션은 럭셔리 대접을 받았다.

억압에 대한 저항과 도전,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게 아니라 넓혀 가는 선구적 정신으로 채워진 샤넬의 정신은 옷을 통해 여성 해방의 가치와 휴머니즘 정신을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은 끔찍하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게 전쟁이다. 굳이 몸소 겪지 않아도 전쟁의 참상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니 전쟁은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 그러나 인류에게 전쟁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가 늘 전쟁을 낳기 때문이다. 전쟁은 꼭 거창한 명분이나 실리 때문에 발발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을 해방시킨 수많은 전쟁들
그러나 전쟁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낳는다. 무엇보다 전쟁이 필연적으로 다양한 교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일찍이 중세의 십자군전쟁은 그 위선과 무지는 차치하고, 교회와 영지 안에 갇혀 평생을 살았던 유럽인들을 새로운 세상과 접촉하게 했다. 또 교회의 위선과 영주의 어리석음을 목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중세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는 단초가 됐다,

크림전쟁이 서방에는 여성의 자유와 해방의 실마리가 됐고 러시아에는 근대화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았던 것처럼 전쟁은 끔찍하지만 그 과정에서 억압과 왜곡의 사슬이 풀어지는 경우도 많다. 미국에서는 링컨의 노예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흑인들이 철저하게 억압됐고 차별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흑인들의 참전을 요구하게 됐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낳았다. 1960년대 들어 시작된 베트남전쟁은 더 이상 흑인들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만 하고 대가가 없는 현실을 묵인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1960년대의 흑인 해방 운동은 몽고메리 보이콧의 발단이 된 로사 파크스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흑인 선수들이 가죽 장갑을 끼고 시상대에서 주먹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저항한 것도 그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전쟁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장 통제되고 억압된 형태로 진행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 억압과 통제의 두려움에 대한 저항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한 지도자와 정부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분출하게 만든다.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이전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한다. 역사에서 모든 전쟁이 다 자유를 낳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전쟁은 자유와 해방을 낳았다.

우리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기존의 질서와 제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됐다. 여전히 체제와 계급은 견고했지만 이전의 복종적 태도는 훨씬 누그러졌다. 문학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나 사설시조가 출현해 기존의 제도를 풍자하고 저항했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을 수습한 이후에는 다시 통제와 억압으로 돌아갔고 사설시조도 사라졌다. 광복 이후 6·25전쟁은 근근이 남아 있던 반상(班常)의 계급제도를 급속히 무너뜨렸다.

대부분의 전쟁은 이렇게 양면성을 띤다. 그것을 읽어 내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천양지차다. 전쟁의 양면성을 읽어 내지 못하면 오로지 전쟁을 공포로만 통제하고 독재를 합리화하며 비인격적이고 불의한 체제를 유지하는 데 사용될 때가 많다.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과다한 전쟁의 공포에만 휘둘려 부정하고 불의한 세력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게 된다. 이런 경향은 비단 과거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시대착오는 지금도 유효하다.

당장 내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는다고, 내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쉽게 판단해 세상에 무관심하면 머지않아 그 값을 치러야 할 때가 온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세계화에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편협한 시선으로 해석된 지식과 정보에만 의존하거나 아예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할 뿐이다. 인문학이라는 게 그저 고전 강독이나 품위 있는 교양 습득은 아니다. 자기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어떤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진짜 인문학, 인문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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