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에세이] 왕멍의 ‘4무 철학’

69세의 나이에 발표한 ‘나는 학생이다’라는 자서전 비슷한 글에서 왕멍은 4무의 삶을 소개한다. 무술(無術)·무책(無策)·무공(無功)·무명(無名)이다. 술책과 꾀를 부리지 않음. 소위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적과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
1947년생. 1971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1973년 고려대 사회학 석사. 2002년 고려대 사회학 박사. 1978년 한국리서치 대표(현). 2007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현).



왕멍은 중국인, 1934년생, 지금 80세다. 14세(1948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지하 당원으로 활동했고 22세에 발표한 소설 ‘조직부에서 온 청년’이 우파적이라고 낙인 찍혀 29세에 신장 위구르로 유배당해 작품 활동이 금지됐다. 그 후 3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16년 동안 위구르에서 유배 생활, 1979년(45세) 복권 조치를 받아 50 초반에(1986~1989년) 중국 문화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문학 노벨상 후보자로 매년 거론되기도 한다.

그가 69세의 나이에 발표한 ‘나는 학생이다’라는 자서전 비슷한 글에서 왕멍은 4무의 삶을 소개한다. 무술(無術)·무책(無策)·무공(無功)·무명(無名)이다. 술책과 꾀를 부리지 않음. 소위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적과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한 것이야!”라고 말하지도 않고 그런 생각도 하지 않음이다. “유명해지는 것은 피곤한 일, 내 이름을 알리면 삶이 추해진다”는 신념이다.

사업이나 장사를 하면 그 브랜드를 알려야 한다. 소비자는 유명한 브랜드에 대해 그 품질을 믿고 그만큼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한다. 조직에서 독자적인 기술 개발, 탁월한 영업 확장, 신제품 성공 등의 실적을 낸 사람에게는 그 공적을 인정해 포상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는 왕멍의 무공·무명을 본받으면 어떨까. 아주 작은 일에서도 말이다. 아침에 아파트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니 바닥에 물이 빠지지 않는다. 수채 구멍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고 그 속의 쇳덩어리를 빼 보았더니 머리카락이 잔뜩 뭉쳐 있다. 그것을 덩어리 째 빼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물이 콸콸 빠진다. 아침을 먹는 사이 아내가 화장실에서 “어, 어제는 막혔는데, 물이 잘 빠지네”라고 한다. “그것 내가 들어 올리고 머리카락을 빼서 그래”라고 말할까 아니면 그냥 웃고 말까. 친구가 맥줏집에 휴대전화를 두고 나간다. 그 휴대전화를 갖다 주면서 “야, 휴대전화 놓고 가면 어떻게?” 하고 건네줄까 아니면 휴대전화를 맥줏집 계산대 아가씨에게 맡기고 “찾으러 올 테니 갖고 계세요”라고 할까. 퇴직하고 어려운 삶을 사는 친구가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요새는 항암 치료를 받으러 경기도 광주시 집에서 나와 한참 걸어 수서동 암센터까지 버스를 타고 다닌단다. 법인 대리 회사에 부탁해 한 달에 두 번, 운전사와 작은 승용차를 그 친구 집에 보냈다. 그 친구는 누가 보낸 것인 줄 안다. 5년이 지났지만 그 두 친구는 지금도 누가 누구에게 차를 보내줬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정이 더 두터워진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양반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다. 물론 그 이름을 남기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후손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 때문에 우리 조상은 얼마나 많이 싸웠는가. 명성과 공적이 자기 것이라고 서로 주장하면서 우리는 서로 미워하게 된다. 요즈음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정치판이 그렇다. 명성과 공적 싸움이다.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싸움이다. 우리와 중국은 같은 동양권이다. 같은 한자 문화 속에서 유교를 숭상했다. 중국인도 체면을 중시한다. 체면이 상하면 거래 관계도, 친구 관계도 끝장이 나는 나라가 중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멍을 사랑한다. 그 4무의 사상을 존경한다. 한국에도 4무의 사상을 가진 종교인, 소설가, 일반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것이 알려지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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