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사이트] 경제제재 카드로 푸틴을 꺾을 수 있을까?

상호 의존도 높아 유럽 경제도 타격…원자재 가격 인상 땐 후폭풍


하루가 멀다고 지구 곳곳에서 사건 사고가 터지고 있다. 러시아 개입설이 확대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의 비행기 격추도 그중 하나다. 특히 이번 사건은 이제까지 러시아 제재에 미온적이던 유럽이 러시아 제재를 강화하고 러시아도 이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은 물론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 러시아 제재가 발표되자마자 전 세계 주가가 하락한 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다. 시장에선 제재와 반발이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면 회복세를 보이던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실 유럽연합(EU)은 지난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때부터 미국과 보조를 맞춰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지만 미국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항해 금지와 자산 동결 대상이 되는 개인과 기업의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한 정도였다. 이는 미국이 러시아의 모스크바은행 등 국영 대형 3사와 국유 조선 회사까지 제재 대상에 포함하고 에너지 기업의 개발 및 수출을 제한한 것에 비하면 약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번 비행기 격추로 네덜란드·영국·독일·벨기에 등 유럽인들이 사망하는 등 정치 이슈가 발생하자 이제까지의 미온적 조치와 다르게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다. 8월 1일 실시된 유럽의 러시아 제재는 첫째, 러시아 저축은행·대외무역은행(VTB)·대외경제개발은행(VEB)·가즈프롬은행·러시아농업은행 등 5대 국영 은행이 발행하는 채권과 주식 매수 금지. 둘째, 러시아와의 무기 및 관련품의 수출입 금지. 셋째, 에너지 개발과 생산을 위한 특정 제품 수출 금지로 요약된다. 이는 미국과 유사하게 제재 영역을 은행의 자금 조달, 군수 및 에너지 분야까지 확대한 것이다.


러시아는 유럽의 제2 수출 시장
지금까지 유럽이 러시아 제재에 신중했던 것은 러시아와의 경제 관계가 미국에 비해 워낙 긴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럽은 에너지뿐만 아니라 수출도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유럽에서 러시아는 미국·스위스·중국에 이어 넷째로 큰 시장이다. 러시아에서도 유럽은 중국 다음으로 큰 수출 시장으로, 그 비중은 총 수출의 13%나 된다.

2~3%에 불과한 대미국·대중국 수출과 비교하면 4~5배나 되는 대규모다. 자본과 기술 공여 측면에서도 유럽과 러시아는 상호 의존도가 높다. 대러시아 직접 투자와 러시아의 대외 직접 투자 잔액을 보면 자본의 우회 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지중해의 키프로스가 1위이고 상위 10개 국가 중 네덜란드·룩셈부르크·아일랜드 등까지 포함한 6개 국가가 모두 유럽국들이다. 또한 독일·프랑스의 대러시아 직접 투자 잔액은 미국과 일본의 3배 가까이 되며 국제결제은행(BIS) 통계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대러시아 여신 금액 2091억 달러 중 유럽계 은행을 통한 여신이 1546억 달러, 75%를 차지하고 있다.

이쯤 되니 유럽의 이번 러시아 제재 강화는 정치적으론 유럽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지 모르지만 금융시장과 실물경제 차원에선 이런저런 걱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주식과 외환시장이다. 러시아 주식과 루블화는 7월 말 미국과 유럽의 추가 제재 결정으로 3월 크림반도 사태 이후의 회복세가 다시 꺾이고 있고 유럽 주요국의 주가도 약세가 뚜렷하다. 특히 유럽 내 경기 회복을 주도하고 있던 독일·프랑스조차 하락세로 반전된 데는 포르투갈 대형 은행(BES)의 공적자금 이슈도 영향을 끼쳤지만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 우려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뿐만 아니라 실물경제에 대해서도 부담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승승장구하고 있던 독일도 기업경기지수 전망치가 악화되고 제조업 수주도 6월 이후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유럽의 러시아 제재가 강력해졌다곤 하더라도 현 단계가 전면적 제재는 아니기 때문에 시장에 당장 대대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경제에 치명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천연가스 기업 등과의 거래는 허용하고 있는 데다 러시아 은행들의 주식·채권 매수를 금지하긴 해도 러시아 은행의 유럽 현지법인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또한 에너지 및 무기 거래를 금지해도 신규 계약만을 대상으로 하는 등 여지를 남겨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부채비율 등 펀더멘털 탄탄
그러면 이러한 미국·유럽의 러시아 제재 강화에 러시아가 굴복할까. 이를 판단하려면 러시아 경제를 좀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물론 현재 러시아도 자본 유출, 투자 부진, 루블화 약세에 따른 수입 인플레이션 등 제재의 충격이 커지고 있다. 그 여파로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마이너스 1.6%, 금년 전체론 0.5%의 약한 성장세가 예상되고 있다. 경기가 부진하지만 인플레를 잡기 위해 중앙은행이 금년 들어 3차례나 금리를 인상해 정책금리가 8%까지 올라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다른 신흥국보다 펀더멘털이 튼튼한 편이어서 제재에 대한 내성이 꽤 클 것이란 게 일반적인 시장 평가다.

우선 러시아는 세계경제에 필수적인 원유·천연가스 외에 철광석·알루미늄·니켈 등 천연자원이 워낙 풍부하다. 이들 가격을 인상한다면 미국·유럽의 경기 회복은 물론 전 세계경제가 대단히 복잡해질 수 있다. 재정 상태는 어떤가.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중은 작년 기준 13.4%로 G20 중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낮다. 경상수지도 흑자 기조고 외화보유액도 우크라이나 사태로 작년 대비 약 500억 달러 감소하곤 있지만 지난 7월 기준으로 4320억 달러(430조 원)나 확보하고 있다. 취약한 유럽 경제와 비교하면 상호 제재에 대한 내성은 러시아가 더 강할 것 같다는 판단이다.

러시아 경제가 나름 내성을 갖고 있다고 보면 미국·유럽의 제재와 러시아의 반발은 어느 한쪽이 양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자칫 제재와 반발의 반복으로 장기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는 말레이시아 비행기의 격추 책임은 우크라이나에 있다는 방침을 견지하면서 경우에 따라선 유럽의 제재 강화에 대항 수위를 높여 갈 계획도 갖고 있는 것 같다.

8월 6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제재 참가국들의 농산물·원재료·식품 수입을 1년간 금지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고 8월 7일 대상국과 대상 구체 품목을 공표한 바 있다. 유럽의 대러시아 수출구조를 보면 약 90%가 기계·화학 등 제품이고 농산물·원재료·식품은 10% 정도다. 따라서 현재로선 치명적이진 않다. 그러나 폴란드처럼 대러시아 수출에서 농산물 비중이 높은 나라는 치명적일 수 있고 유럽 역내의 농산물과 식품 공급 증가로 이들 가격이 하락해 관련 산업과 농민 등에 타격을 줄 우려가 있다.

또 지난 8월 5일엔 유럽 역내 항공 회사들의 시베리아 상공 비행을 금지할 가능성도 내비쳐 가뜩이나 실적 때문에 고심하던 유럽 주요 항공사들의 주가를 급락시키기도 했다. 에너지 가격 인상까지 포함해 다양한 수단으로 반발수위를 올릴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아무튼 최근 나오기 시작한 애널리스트 보고서들은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유럽과 러시아의 상호 제재가 기업 실적 악화와 경제 동반 약화로 연결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독일 폭스바겐의 상반기 러시아 판매가 작년 동기 대비 8%, 프랑스 르노도 10% 이상 감소했고 스포츠 용품 세계 최대인 독일의 아디다스도 금년 러시아 실적 목표를 하향 조정했다. 따라서 이번 제재 상태가 장기화된다면 유럽 경제는 물론 세계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고 수출 주도인 한국 경제는 또 다른 비상 상황이 올 수 있다. 게다가 한국 경제와 밀접한 중국의 최대 에너지 수입국이 러시아인 것까지 고려하면 이미 다양한 컨틴전시 플랜 마련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정유신 한국벤처투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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