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정말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질투했을까

천재 곁에 등장하기 마련인 범인…정의는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이뤄질 수 없어


1984년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는 정신착란증에 걸린 한 노인(살리에리)이 창문을 열고 빈 시민에게 “모차르트, 나를 용서해 다오. 내가 너를 죽였어”라고 외치는 고백으로 시작된다. 아카데미상을 8개나 휩쓸었던 영화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람했고 연출이나 연기 그리고 네빌 마리너가 지휘하는 아카데미체임버오케스트라의 뛰어난 연주에 필자 역시 흠뻑 빠져 보았던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를 ‘사실’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영화의 바탕은 ‘에쿠우스’의 작가 피터 셰퍼가 모차르트의 삶을 다룬 희곡 ‘아마데우스’다. 이 연극은 1979년 런던 올리비에 극장에서 초연됐고 그 후 브로드웨이로 건너가 토니상을 비롯한 각종 상을 휩쓸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가 1984년 밀로스 포먼 감독이 영화로 만들면서 널리 알려졌다.

영화는 모차르트를 살해한 후 죄책감을 느끼며 수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정신병원에 수감된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가 신부를 불러 고해성사를 하면서 자신의 음악가로서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조명하고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추적하는 듯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천재를 따라잡을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의 고뇌와 아픔을 그려 낸 작품이라는 점에 눈길이 간다. 극중에서 살리에리는 “신이시여, 제가 원했던 것은 오직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는데 주님께선 제게 갈망만 주시고 저를 벙어리로 만드셨으니 어째서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제가 음악으로 찬미하길 원하지 않으셨다면 왜 그런 갈망을 심어 주셨습니까. 욕망을 심으시곤 왜 재능을 주지 않으십니까”라며 절규한다.

모차르트는 음악 외의 일에는 거의 둔재 수준이었지만음악에 있어서는 최고의 천재였다. 오죽하면 ‘모차르트로 시작해 모차르트로 끝난다’고 말할까. 섬광 같이 짧은 삶을 살다 간 그는 끊임없이 분출하는 창조의 에너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소진해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니 굳이 그의 천재성을 부각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킬 까닭이 없다. 오히려 그런 장치가 없는 것이 제대로 천재의 가치를 진솔하게 공감하게 만든다.

예술가 중 가장 불행한 사람은 신으로부터 타고난 재능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당대에 꽤 괜찮은 평가를 받은 음악가였다. 단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지니지 못했을 뿐이다. 아마도 그는 모차르트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치사한 인물은 아니었다. 궁정 음악가였던 당시에 후배 음악가들을 위해 연주회를 열어 주고 그들을 후원하는 등 굉장히 멋진 선배 음악가였다. 또 후배들이 찾아오면 무료 과외를 해줄 정도로 열의를 보였던 대인이었다고 한다.


푸시킨, 림스키-코르사코프, 그리고 피터 셰퍼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리라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바로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데르 푸시킨이다. 1791년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온갖 소문이 난무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살리에리에 의한 독살설도 포함돼 있었다. 천재 음악가를 질투한 평범한 음악가…. 푸시킨은 이 소문을 바탕으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단막극을 썼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은 허구의 작품에서 발휘되는 것이니 그것으로 사실 여부를 가리고 책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천재를 위해 애꿎은 범인(凡人)을 단두대에 올리는 일은 잔인한 일이다. 사실 살리에리가 특별히 범인의 화신이 될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당대의 살리에리는 존경 받는 작곡가였을 뿐만 아니라 숭앙 받는 작곡가였고 모차르트를 경멸하기는커녕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푸시킨의 작품이 발표된 지 반 세기쯤 지나 1898년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를 오페라로 만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살리에리를 질투에 눈멀어 천재 모차르트를 독살하는 인물로 변모시켜 버렸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그치고 과거의 이야기에 머무를 뿐일까. 영웅의 신화를 위해 우리는 피해자와 희생자 만들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성공한 괴짜’의 신화는 자칫 그가 괴짜여서 성공할 수 있었다거나 성공했으니 그가 저지른 허물은 눈감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뒷북치는 관대함’이 비일비재하다. 이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진정한 정의는 타인의, 그것도 아무 상관도 없거나 약한 이의 불행을 담보로 이뤄질 수 없다. 정의란 그런 합리화나 타협 자체를 의연하게 거부하는 데서 이뤄진다.


토머스 페인의 상식과 용기
살리에리와 정반대의 인물을 찾자면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년)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죽었을 때 신문의 부고 기사 일부는 이랬다. “그는 약간의 선행을 하고 아주 많은 해악을 끼치면서 장수했다.” 당대에는 불량배쯤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는 무수한 직업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두 번의 결혼도 실패였다. 페인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그리고 신문의 부고 기사에서 보듯 죽음 이후도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페인은 1776년 1월 ‘상식(Common Sense)’을 출판해 미국의 독립이 가져오는 이익을 설파해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책이 출간되자 아메리카 대륙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페인은 미국의 독립이 상식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이 미워서 갈등하고 싸우고 있었지만 ‘마음의 조국’인 영국과 독립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던 이들에게 그의 책은 혁명이었다. 페인은 군주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왕정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민주적 공화제만이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식의 정치 체제는 오직 특권층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페인의 주장은 오늘날 보면 당연한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도 1770년대 초까지는 독립에 반대했고 벤저민 프랭클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군주제와 공화제를 섞은 영국의 정체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혁명적인 주장을 ‘상식’이라고 말한 그의 발언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1776년 7월 4일 발표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페인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채택했다. 그렇게 그는 미국 독립의 복판에 서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는 학력도 낮았고 성공한 인물도 아니었다.

토머스 페인은 1787년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혁명을 목격하고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를 썼다. 그런데 이성을 강조한 것이 엉뚱하게 무신론이라는 오해와 비판만 뒤집어쓰게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기존의 기득권층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득권층이 된 사람들에게 페인은 불편한 존재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인의 ‘이성의 시대’를 빌미로 그가 무신론자라고 몰아세웠지만 실제로는 재산 소유의 불평등을 공격한 페인의 마지막 책 ‘토지 분배의 정의(Agrarian Justice)’가 기득권층에게는 불편하고 위험한 발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페인은 가난과 몰이해 속에서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

오늘날 페인은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사망 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변모하기 시작했다. 페인이 높은 학력과 성공의 신화를 이끌어 낸 인물이었다면 그에게 수많은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냉대는 그를 철저히 외면하고 폄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페인은 진정한 영웅이었다. 오늘날 미국이 누린 영화가 페인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위대한 천재는 그 자체로 정당하게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것을 억지로 만들어 내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깎아내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유혹을 털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해 바보 같은 신화에 휘둘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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