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황제의 권위는 옥새에서 나온다

‘전국옥새’ 둘러싼 영웅들의 암투…인장은 권위를 보여준 궁극의 상징물


요즘 어지간한 문서는 자필 서명으로 본인 인증을 한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거의 모든 서류에 도장이 필요했다. 지금도 인감도장은 쓰이고 있고 관공서 주변에는 ‘막도장’이라고 불리는 싸구려 도장을 파 주는 곳이 남아 있다.

우리 속담에 “돈은 빌려 줘도 도장은 빌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인장은 굉장히 큰 권위와 신뢰를 상징했다. 인장이 공권력의 권위와 개인의 인격을 표상한 것은 동서고금에 큰 차이가 없었다. 인장은 어떤 권위자가 다른 누군가를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그것을 소유한 이의 신분과 힘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집트 파라오는 요셉을 곡물 담당 주요 관리로 임명하면서 관직에 대한 권위를 상징하는 인장 반지를 끼워 준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벤허(1959년)’에는 로마 사령관 아리우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유대인 유다 벤허를 양자로 삼으면서 역시 인장 반지를 끼워 주는 장면이 나온다.


관인의 매듭 색깔로 계급 구분
중국에선 은나라 시대 유적에서 구리로 만든 옥새가 출토됐다. 인장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나라 시절 관리들은 봉록을 하사 받았는데, 쌀 2000석 이상의 봉록을 받는 고위 관리들의 관인(官印)은 장(章)이라고 하고 하급 관리들의 관인은 인(印)이라고 했다. 이 둘을 합쳐 인장이라고 불렀다.

관인에는 비단으로 만든 수(綬)라고 하는 매듭을 파랑·검정·노랑 등 계급별로 다르게 달아 줬다. 이를 인수(印綬)라고 했다. 인수와 관련해 ‘삼국지’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삼국지’ 초반부에 유비 삼형제는 황건적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논공행상이 엉망이었다. 유비가 받은 벼슬은 보잘것없었다.

유비가 현령으로 있는 현에 상급 기관에서 감사를 나왔다. 독우라는 이름의 감독관은 그렇지 않아도 입이 한 자나 튀어나온 유비 삼형제의 속을 뒤집었다. 뇌물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유비를 탐관오리로 몬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비가 사고를 쳤다. “잘 걸렸다. 네 놈이 감히 우리 큰형님을 중상모략해?” 유비는 장비에게 채찍질을 당해 초주검이 된 독우의 목에 인수를 걸어주고 낙향해 버렸다.

관우는 유비의 생사도 모른 채 한동안 조조에게 의탁했었다. 때가 돼 관우가 조조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하면서 일어난 사건이 유명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다. 관우가 조조 군대의 다섯 관문을 통과하면서 “관인이 찍힌 통행 허가증을 내놓으시오”라는 조조 휘하 6명의 장수를 베어 버린 것이다. 관우를 끔찍하게 좋아했던 조조는 관우를 놓아줬다. 조조는 관우가 자신이 선물한 각종 보물을 쌓아 놓은 창고를 봉하고 자신이 준 관인도 그대로 두고 간 것에도 감격했다.

관우에 대한 조조의 짝사랑을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관우가 동탁 휘하의 장수 안량의 목을 벴다. 조조는 조정에 고해 관우를 수정후로 삼고 수정후인(壽亭侯印)이라고 쓴 관인을 만들어 준다. 그런데 관우가 관인을 받지 않았다. 내용을 ‘한수정후지인(漢壽亭侯之印)’이라고 바꿔 주자 그제야 받았다. “승상이 내 뜻을 아시는군요. 허허!” 이것이 이른바 조조의 관인 개조 사건이다.

후한 말 형주 땅의 맹주는 유표였다. 유표는 장남 유기 대신 후처 채 씨와의 사이에 난 유종을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겁쟁이 유종은 나중에 조조에게 형주 땅을 갖다 바치며 항복했다. 이복 형 유기에게는 제후의 인수를 줬다. 격노한 유기는 인수를 집어 던지고 강남으로 달아났다. 나중에 유비는 유기를 형주자사에 임명한다.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인장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옥새다. 특히 진시황이 만든 전국옥새(傳國玉璽)가 가장 유명하다. 나라에 대대로 전해 온다고 해서 전국옥새라고 불렸다. 중국 형산 지역에서 나는 아름다운 옥을 화씨벽이라고 불렀는데 전국옥새는 이 화씨벽으로 만들었다. 글씨는 당시 진나라의 승상인 이사가 썼다.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영원히 번창하리라(受命於天, 旣壽永昌)!”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황제에 등극하면서 만든 이 옥새의 운명은 기구하다. 진시황은 죽기 전에 장남 부소에게 옥새를 주고 황권을 계승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환관 조고는 유서를 조작해 어수룩한 막내 호해에게 옥새를 넘긴다. 얼마 후 호해마저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옹립한다.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안 자영은 조고를 죽이고 전국옥새를 한고조 유방에게 바치고 항복해 버린다.


원술에게는 독이 된 전국옥새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 소유가 된 전국옥새는 전한을 멸망시키고 황제를 칭한 신나라 왕망(王莽)에게 넘어갔다가 후한 광무제 때 다시 한나라 왕조로 돌아온다. 후한 말년 난세에 감쪽같이 사라진 전국옥새를 발견한 이는 손견이다. 궁중 우물에서 건져 올린 여인의 시체에서 전국옥새가 나온 것이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당시 반동탁 연합군의 실권자 원술에게 전국옥새를 저당 잡히고 군사 수천 명을 빌린다. 손책은 이들을 데리고 강동을 평정하고 오나라의 기반을 다졌다. 반면 전국옥새를 손에 넣게 된 원술은 흥분했다. “전국옥새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은 필시 내게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계시다.” 제 분수도 모르고 황제를 참칭한 원술. 제후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사방에 적을 만든 셈이다. 제후들의 집중 견제를 받던 원술의 최후는 비참했다.

‘삼국지연의’에서 최종적으로 전설의 전국옥새를 손에 넣은 이는 조조였다. 그러나 조조는 노회했다. 함부로 황제를 참칭하다가 비명횡사한 원술과는 격이 달랐다. 황제를 능가하는 실권자 조조는 끝내 자신의 당대에 황제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알다시피 아들 조비가 위나라 초대 황제가 됐다.

전국옥새는 위나라를 거쳐 진(晉)나라·수나라·당나라를 지나면서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다가 오대(五代)시대에 전란에 휩싸여 행방이 묘연해졌다. “아무리 화씨벽과 같은 귀한 옥으로 만들었다지만 사람들이 왜 저리 옥새 하나에 목숨을 걸었을까”하고 의문이 생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옥새는 단순한 궁중 액세서리가 아니었다. 황제의 권위, 왕권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궁극의 상징물이었다. 원술이 전국옥새를 보고 눈이 뒤집힌 것도, 세조가 단종을 강제 퇴위시킬 때 승지 성삼문이 옥새를 세조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족. 최근 개봉된 한국 영화 두 편에 다 관인이나 옥새 이야기가 나온다. 윤종빈 감독의 ‘군도’에는 의정부(議政府) 관인을 위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석훈 감독의 ‘해적’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10년이 지나는 동안 조정에 국새가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만들었다. 고려의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했는데도 명태조 주원장이 질질 끌며 새 국새를 내려 주지 않은 것이다. 조선의 국새에는 정권의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해 강대국에 엎드려야 했던 변방 조공 국가의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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