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일벌레’ 마르치오네, 피아트를 구하다

70·80년대 폭스바겐과 유럽 시장 양분…내수·소형차에 안주하다 위기 자초


“2018년까지 판매량을 250만 대 늘리겠다.”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피아트 크라이슬러(FCA: Fiat Chrysler Automobiles)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5월 6일 미국 미시간 주 오번힐스의 크라이슬러 본사에서 열린 ‘인베스터스 데이’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늘 심드렁한 그의 표정이 이 순간만큼은 밝았다. 그는 “연간 자동차 판매량을 지난해 435만 대에서 2018년까지 680만 대로 끌어 올리겠다”며 “중국과 인도에서 새로 출범한 합작사가 연간 70만 대의 판매를 기록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눈을 돌려 아시아 시장을 적극 공략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 “판매 증가와 함께 부채는 줄이기로 했다”며 “100억 유로(14조3000억 원)에 달하는 순부채를 90%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날의 부실을 털어내고 견실한 성장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는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저는 항상 600만 대 판매 목표가 달성되는 그날을 ‘디데이(D-Day)’로 잡고 있습니다.”


크라이슬러 손에 넣으며 화려하게 부활
이탈리아의 국민차 피아트, 북미 빅 3 중 하나인 크라이슬러. 2014년 1월 피아트는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 산하 퇴직자건강보험기금(VEBA)이 보유 중인 크라이슬러의 잔여 지분(41.5%)을 모두 인수하면서 두 회사는 FCA라는 이름 아래 한 식구가 됐다. 인수가는 43억5000만 달러. 향후 4년 동안 7억 달러를 VEBA 연금신탁에 맡기기로 하는 조건도 포함됐다. 기존에 피아트가 보유한 크라이슬러 지분은 58.5%였다. 이 합병으로 FCA는 단숨에 글로벌 7위 제조사로 뛰어올랐다. 피아트는 한때 폭스바겐과 유럽 시장을 놓고 패권을 다투던 115년 역사의 자동차 제조사다. 수많은 인수·합병(M&A)을 통해 많은 이들이 열망하는 페라리와 마세라티, 알파 로메오 등 다양한 브랜드를 거느린 거대 기업이지만 경영진의 무능력과 이탈리아 경기 침체 등을 번갈아 겪으며 부도 위기까지 몰리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회사이기도 하다. 크라이슬러 인수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세계 최대 시장 중 하나인 미국의 판매망을 확보한 FCA는 이제 중국과 인도 등 신흥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경차 피아트 500(친퀘첸토)부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지프, 스포츠카 페라리까지 완벽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갖춘 FCA가 글로벌 톱 5에 위협적인 대상으로 떠오른 이유다.

피아트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서쪽으로 200km 떨어진 북부 대도시 토리노를 기반으로 한 회사다. FIAT는 ‘이탈리아 토리노 자동차 공장(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의 영문 앞 글자를 따 만들었다. 피아트그룹은 기업 구조면에서 현대차그룹과 닮은 면이 있다. 승용차와 상용차를 비롯해 농기구 및 건설기계, 야금, 생산 시스템, 항공기, 부품, 출판 및 통신, 보험 등 9개 분야에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현대차처럼 이탈리아 국민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기업이다. 1899년 설립됐으며 1906년 주식회사가 됐다. 1969년 당시 이탈리아 3위 업체인 란치아를 인수했고 페라리의 지분을 취득했다. 1차 오일쇼크를 거친 후 사업 다각화를 위해 1975년 네덜란드에 상용차 브랜드 ‘이베코’를 설립했다. 1987년 알파 로메오, 1993년 마세라티를 인수하며 이탈리아 내 승용차 시장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페라리의 역사는 1929년 엔초 페라리가 ‘스쿠데리아 페라리’라는 이름으로 레이싱 팀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이 회사는 알파 로메오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페라리가 1920년대 알파 로메오 자동차 경주 팀의 드라이버로 활동하면서 만든 회사이기 때문이다. 1939년 알파가 자신의 레이싱 팀 스쿠데리아를 흡수하고 자신을 내쫓으려는 의도를 알아챈 페라리는 알파와 결별했다. 신차 개발에 나선 것도 이때부터였다. 1940년에 공개한 ‘티포 815’가 페라리의 첫 모델이었다. 일반 도로에서 달릴 수 있는 차량은 1947년 ‘페라리(Ferrari S.p.A)’라는 이름으로 생산했다. 차량을 판매한 수익금은 모두 포뮬러원(F1) 레이싱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에 투입됐다. 엔초 페라리의 경영 철학은 ‘레이싱 팀을 운영하기 위해 차를 판매한다’였다. 드라이버 출신인 엔초 페라리다운 이상적인 고집이었지만 이에 따라 페라리는 항상 경영난을 겪었다. 결국 페라리는 1969년 피아트그룹에 인수됐다. 당시 지분 50%를 인수한 피아트는 이후 1985년 이를 85%까지 끌어올리며 페라리를 그룹의 울타리 안으로 갖고 들어왔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1987년 제너럴모터스(GM)와 경합을 벌인 끝에 국영기업이었던 알파 로메오도 그룹으로 편입됐다. 페라리, 마세라티, 알파 로메오 3사의 공통점은 레이싱 DNA다. 1914년 설립된 마세라티는 1937년 이탈리아의 오르시 가문이 인수한 뒤 시트로엥을 거쳐 1993년 피아트로 넘어왔다. 마세라티는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원-트릭 포니(one-trick pony), 한 가지 재능만을 갖고 있는 멍청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피아트그룹을 부도 위기로 몰아넣은 경영전략을 비꼰 말이기도 하다. 피아트 자동차의 사업 부진과 적자 누적으로 피아트그룹은 2003년 초 누적 부채가 66억 달러에 달했다. 피아트는 그동안 추구했던 경영전략에서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1970~1980년대의 피아트는 그 어느 때보다 기세가 등등했다. 폭스바겐과 유럽 자동차 업계의 선두 자리를 넘볼 만큼 거대한 자동차 왕국으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경영진의 그릇된 판단이 조금씩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었다. 피아트는 전통적으로 해외보다 내수를, 중대형차보다 소형 차종 중심의 전략을 고수해 왔다. 1980년대의 우노(Uno)와 1990년대 푼토(Punto)에 의존하면서 시장 수요의 다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전체 유럽 시장점유율도 뒷걸음질쳤다. 1990년만 해도 13.8%로 폭스바겐에 이어 2위였지만 2002년 8%, 2004년 11월에는 5%로 최저점을 기록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GM도 외면
피아트그룹 경영진도 하락하는 판매량을 좌시할 수 없었다.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바로 ‘세계화(internationalization) 계획’이었다. 월드카로 ‘피아트 178’을 신규 개발해 유럽 이외의 시장에서만 100만 대를 생산, 판매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이었다. 피아트는 이 프로젝트에 15억 달러라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했지만 실패했다. 1990년대 말 불어 닥친 중남미 국가들의 재정 위기와 폴란드·터키 등지에서의 판매 저조 때문이었다. 판매량은 당초 목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0만 대를 기록했다. 여기에 1990년 하반기 들어 보험과 전력 에너지, 중장비 기계 등 그룹 차원의 사업 다각화도 악재로 작용했다. 신규 사업 추진으로 자동차 연구·개발(R&D) 투자비용이 제한되는 ‘풍선효과’로 인해 경쟁력을 갉아먹었다. 2002년 피아트는 창업 이후 최악의 경영 위기를 맞았다. 부도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피아트그룹은 피아트 자동차의 경쟁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전면전인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1만2000명의 인력 감축과 공장 폐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강하게 반발했다. 근로시간 단축, 임금 삭감을 통한 고용 유지를 주장했다. 또한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피아트자동차의 국영 기업화를 요구했다.

피아트그룹 경영진도 자동차 사업 부문의 공기업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채권단과 자본 제휴 관계에 있었던 GM이 강하게 반대했고 정부 역시 유럽연합(EU)의 시장 경쟁 지침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공기업화는 검토 단계에서 백지화됐다. GM이 공기업화를 반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피아트를 인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2년 5월 일부 언론에 의해 당시 피아트의 지분 20%를 갖고 있던 GM에 매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3년 1월 지오바니 아그넬리 명예회장이 사망하자 투자자들은 피아트가 GM에 풋옵션(2004년부터 시행 가능)을 행사하기를 희망했다. GM이 피아트를 인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봤다. 2000년 피아트는 GM의 주식 5.1%와 자사 주식 20%를 맞교환했다. 이와 함께 2004년 이후 잔여 지분을 GM에 팔 수 있도록 하는 풋옵션 계약을 맺은 바 있다. 같은 해 3월 전임 회장의 동생이자 창업자의 손자인 움베르코 아그넬리 신임 회장이 깜짝 발표를 했다. 그는 “피아트를 GM에 넘길 생각이 없다”며 “아그넬리 가문이 피아트를 재생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GM 역시 피아트를 인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실적이 부진했기 때문이다. 2001년 1억 유로, 2002년 39억 유로, 2003년 19억 유로의 적자를 기록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간 누적 적자는 79억 유로를 넘어섰다. 전체 자산 가치가 20억~25억 유로로 추정되는 데 비해 부채 규모는 40억 유로에 육박하는 등 자본 잠식 상태였다. 부실한 피아트를 인수할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2000년 이후 26억 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는 GM유럽의 운영을 정상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2005년 5월 13일 GM은 20억 달러를 지급하고 풋옵션을 해지하기로 피아트와 합의했다.

새 CEO도 선임했다. 피아트그룹의 부사장으로 재임 중이던 세르지오 마르치오네를 CEO로 영입했다. 재무적 감각이 뛰어난 마르치오네는 취임 직후 50일 동안 보험 부문 자회사를 25억 달러에, 항공우주 부문 자회사를 17억 달러에 매각했다. “지난 10여 년간의 다각화를 접고 자동차 부문에 집중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R&D 투자액을 12억 달러로 늘리고 11억 달러의 비용 절감, 유럽 생산량 연 160만 대로 제한, 새 모델 출시로 유럽 매출 증대 등 경영 정상화를 위한 계획들이 마련됐다.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CEO
이탈리아계 캐나다인인 마르치오네 CEO는 글로벌 자동차 업체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일하는 워커홀릭이다. 1주일에 7일을 일하는 근면함과 회계사 출신다운 뛰어난 재무 감각, 쓴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그룹을 장악해 나갔다. 자신의 혈통처럼 이탈리아와 북미 회사를 하나로 통합해 나가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뤄 내며 그룹 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2004년 말 CEO로 부임하자마자 그가 한 일은 조직 개편이다. 수평적으로 조직을 배치하고 80개 본부의 보고를 직접 받는다. 그는 다섯 대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미국이 휴일이면 이탈리아로 날아가 일하고 이탈리아가 휴일이면 미국에서 일한다. 2009년 비즈니스위크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CEO’로 선정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일벌레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가 CEO 자리에 앉았을 때 책상에는 누적 적자가 120억 달러(14조 원)에 달한다는 재무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2003년 피아트그룹으로 자리를 옮긴 뒤 재무 담당 부사장을 맡아 왔던 그에겐 조속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는 구조조정과 신차 개발에 착수했다. 2005년 피아트의 관리직 간부 2000여 명을 해고했다. 그 대신 젊고 유능한 중간 관리자를 간부도 승진시켰다. 구조조정으로 기업의 체질이 개선됐다. 피아트는 2년 만에 4억 달러 흑자로 돌아섰다. 신차 개발에도 아낌없이 투자했다. 2007년 등장한 ‘피아트 500’의 신형 모델은 유럽 시장 판매량을 회복시켰다. 그리고 2009년 마르치오네 CEO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의 여파로 휘청거리던 크라이슬러를 인수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크라이슬러는 향후 이탈리아 재정 위기로 타격을 입은 피아트가 버틸 수 있었던 버팀목 역할을 했다. SUV와 중대형 세단을 판매하는 크라이슬러의 제품군은 피아트의 부족한 부분을 완벽하게 채웠다. 이제 마르치오네의 손에는 더 많은 카드가 쥐어졌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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