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산책] YS식 세계화의 추억

사내 유보금에 세금을 매기든 보유 현금을 투자로 유인하든 결국 정책은 사람이 한다. 기업마다 사정이 다르니‘적정 수준’이 모호할 수밖에 없고 ‘넣어 달라’, ‘빼 달라’ 통사정하다 보면 칼자루 쥔 정책 당국의 권세는 커진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1964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경영학 석사.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 대우그룹. 대통령녹색성장위원회. 2002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현).




투자는 많은 이를 행복하게 한다. 부품 업체와 장비 업체는 주문이 들어오니 숨통이 트이고 교수와 학교는 연구 과제 실험 용역이라도 풀리니 통장에 온기가 돈다. 돈이 돌고 경기가 살아야 표가 나오는 정치권으로선 당연히 반가운 일이다. 대주주에서 사장단까지 수십억 원이 넘는 연봉을 받으며 떵떵거리는 대기업들이 이렇게 좋은 일은 안 하고 돈을 쌓아 놓고 있다니 얄미운 일이다. 그래서 사내 유보금에 세금을 매겨서라도 뭔가 해 보자는 주장이 탄력을 받고 있다.

‘투자 안 하고 돈 쌓아 둔’ 증거는 기업의 ‘보유 현금’이다. 그런데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면 보유 현금은 그리 늘지 않고 있고 오히려 쪼들리는 곳도 많다. 금융시장에는 여전히 ‘XX발 위기설’이 난무하고 있다. 사실 논란이 되는 사내 유보금도 다르지 않아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빼면 그리 대단하지도 않다. 이에 따라 사내 유보금에 과세하든 보유 현금 많은 기업에 투자를 압박하든 대상은 몇몇 대기업에 한정될 수도 있다.

대규모 투자는 기업의 생사를 거는 일이다. 힘센 사람들이 팔 비튼다고 없던 아이디어가 솟아날 리도 없고 글로벌 시장에 신제품을 내놓으려면 수조 원이 들고 공장 설비투자 한 번 하면 그 몇 배가 드는 현실에서 삼성전자·현대차인들 얼마나 여유가 많은지도 알 수 없다. 더구나 세계 금융시장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힘센 사람들의 눈치를 봐서 투자한다? ‘세계화’와 ‘신경제 100일 계획’을 내걸고 막무가내로 국내외 기업 투자를 밀어붙이다가 나라를 거덜 낸 YS 정부의 기억이 떠오른다.

힘센 분들 눈치 봐서 하는 투자는 형편이 어려워 정부 지원이 필요한 곳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고 부실은 더 커지게 된다. 지분이 적은 경영자로선 주주들의 돈으로 회사든 부동산이든 사들이니 권세를 키우는 일이다.

집안 땅, 친구 회사 비싸게 사줘도 투자가 되지만 어느새 까칠한 비판은 슬쩍 사라지고 인센티브를 주자고 한다. 한국 재벌이 적은 지분으로 몸집만 불린다던 비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사내 유보금에 세금을 매기든 보유 현금을 투자로 유인하든 결국 정책은 사람이 한다. 기업마다 사정이 다르니 ‘적정 수준’이 모호할 수밖에 없고 ‘넣어 달라,’ ‘빼 달라’ 통사정하다 보면 칼자루 쥔 정책 당국의 권세는 커진다(그들을 불러 혼내 주는 국회의 권세도 커진다).

임금이나 기자재 값을 후하게 지불해도 유보금은 줄어든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일자리를 늘려도 마찬가지다. 몇 년째 말만 많던 ‘상생 협력’, ‘내수 활성화’와 비슷한 얘기가 되는데, 투자를 통한 경제 활성화와는 각도가 다르다. 결국 유보금 과세는 ‘살기 힘든 사람이 많으니 어떻게든 쌓아 둔 돈 좀 돌게 해보자’는 생각에 투자를 내세우고 세금이란 칼을 장착한 셈이다. 그런데 정책 당국과 정치권의 권세만 키울 수도 있다. 차라리 나눠 먹기로 변질돼 줄줄 새는 곳곳의 정책 지원금부터 다잡는 편이 더 쉽지 않을까. 힘센 분들의 몫이라 어렵다면 결국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정치의 본질이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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