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13년 전 디폴트 악몽 되살아난 아르헨티나

헤지 펀드 배상 판결로 신용 등급 급락…신흥국 전체로 불안 확산 가능성


한동안 잠잠했던 신흥국과 PIGS(포르투갈·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 등 위기 경험국) 문제가 잇달아 터지고 있다. 올 하반기에 들어서자마자 급부상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블루 달러 위기설과 포르투갈 최대 은행인 방코 에스피리토 산토(BES)의 기술적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 일부 동유럽 국가의 위기 재연 조짐 등이 대표적인 예다.



1990년대 중남미 외채 위기 이후 잠복돼 왔던 아르헨티나 디폴트 우려가 최근 다시 불거진 것은 올해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아르헨티나 정부에 대해 미국계 헤지 펀드에 16억 달러를 배상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판결 즉시 아르헨티나의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 프리미엄이 급등하고 국가 신용 등급이 2단계 강등되는 등 아르헨티나의 디폴트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투자은행들, 디폴트 가능성 열어두고 시나리오
세계 3대 평가사 중의 하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아르헨티나의 국가 신용 등급을 2013년 9월 ‘CCC+’에서 2014년 6월 ‘CCC-’로 2단계 강등하고 신용 등급 전망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 때문에 페소화 가치 하락 압력이 지속되고 있고 자본의 해외 유출 억제를 위한 정부의 시장 개입으로 외환시장 불안정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국가 신용 등급 강등으로 아르헨티나는 S&P가 신용 등급을 부여한 세계 모든 국가 중에서 최저 등급으로 하락했고 1년 내 돌아오는 단기 부채를 갚기에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2001년 디폴트와 관련해 2005년, 2010년 두 차례 채무 재조정에 참여하지 않은 채권자 보상에 대한 미국 법원의 판결 결과에 따라 기술적 디폴트 발생 가능성이 높아졌다.

올해 7월 말이 아르헨티나 채권단과의 채무 조정 기한이지만 아르헨티나의 외화보유액이 280억 달러 수준인 현재로선 채무 상환이 불가능해 보인다. 아르헨티나 채무자 중 93%에 대해서는 채무가 조정됐지만 남은 7%와 채무 조정 분쟁으로 자금 조달 비용이 상승해 국제금융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 정부가 궁극적으로 디폴트를 선언하는 게 판결을 이행하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모든 채권자와 채무 상환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며 헤지 펀드와 재협상에 나서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다양한 시나리오 가운데 아르헨티나는 헤지 펀드와 협상을 통해 부채 스와프에 참여한 기존 채무자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결하는 방안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가 전면적 디폴트를 선언하거나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전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은 낮다.

지금으로서는 헤지 펀드와 협상,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기존 채무자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 때문에 헤지 펀드와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채무 재조정에 참여하지 않은 잔여 채권자들과 추가적인 협상을 해야 하는 부담이 남는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국제 채권단에 미국법 적용 대상인 현 국채를 자국법 적용 대상의 새로운 국채로 교환해 주겠다고 제안할 계획이지만 채권단이 아르헨티나 제안에 응할지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디폴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주요 투자은행(IB)들은 디폴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고 정부의 채무 재조정, 헤지 펀드와 협상 등 여러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미국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향후 취약 채무국들에 불리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이고 채무 조정이 길어진다면 디폴트 우려가 잇달아 제기돼 세계경제와 국제금융 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아르헨티나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옵션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주요 관련자들의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아르헨티나는 미국 법원의 제한에 따라 종전 채권자(교환 채권자)에 대한 지급이 불가능해 이를 회피하기 위한 새로운 채권을 통한 우회 지급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따라 소송인(교환 채권을 거부한 구채권 보유자)과 합의해야 하지만 이 또한 종전 채권자에 비해 유리한 조건이라면 대규모 소송의 문제가 되는 법적 조항으로 쉽지 않다. 현재로서는 소송인과 극적 합의, 여타 채권자들의 유사소송 회피, 미국 법원의 아르헨티나 정부를 위한 호의적 법적 해석 등이 작용해야 디폴트 위험을 모면할 수 있을 것으로 국제금융 시장 참여자들은 보고 있다.


2001년 이후 국제금융 시장서 외면 당해
향후 가능성은 낮지만 아르헨티나가 디폴트에 처한다면 국제금융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자금 흐름 등 직접적인 경로보다 심리적인 경로를 통한 측면이 더 클 전망이다. 아르헨티나는 2001년 디폴트 이후 국제금융 시장 참여자로부터 거의 외면받고 있는 시장인데, 주식시장에선 2009년 모건스탠리 신흥국지수(MSCI)에서 제외돼 관심에서 멀어졌으며 채권시장에선 신흥국 채권지수 내 비중이 과거 1~2위에서 15위 수준으로 크게 낮아졌다.

이 때문에 외국인의 아르헨티나 주식 및 채권 투자 잔액은 각각 42억 달러, 494억 달러 내외로 10여 년 전에 비해 71%, 41% 줄어들어 디폴트에 따른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올해 초 외환시장 개입 중단, 디폴트 우려 등으로 신흥국 전체 불안의 빌미가 됐던 경험과 투자자들이 종전과 달리 최근 아르헨티나 뉴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점 등 때문에 디폴트 시 심리적인 경로를 통한 시장 영향력이 의외로 클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아르헨티나와 관련된 뉴스가 향후 추가적으로 국제금융 시장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모니터링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 정부 및 소송인의 돌발 움직임, 시장에서의 디폴트 우려 확산 여부, 신흥국 전반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시각 변화 등에 유의해야 한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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