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채 문화 등 수용하며 부작용 최소화…직급 호칭 다시 살리고 수당으로 직무급 효과
“저는 헤이그룹 부장 OOO입니다.” 혹은 “저는 헤이그룹 프로젝트 매니저 OOO입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비즈니스 현장에서 자기소개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앞의 ‘부장 OOO’를 강조하고 있다. 단순해 보이지만 한국적 문화와 인사 기준으로서 많은 것을 암시해 주는 사례다.
‘부장’으로 소개하는 대다수는 조직 내에서 자신의 직급을 강조하고 인사 운영에 있어서도 직급 중심의 보상 및 승진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장’이라는 호칭은 대외적 인지도,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 고유의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부장’이라는 호칭을 통해 상대방의 연령대도 유추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비해 ‘프로젝트 매니저’는 조직 내 본인이 수행하는 직무를 강조하고 인사 운영에 있어서도 직무 중심의 보상, 경력 개발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호칭에 대해서는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명확히 알 수 있지만 조직 내 위계나 연령 등에 대해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아! 그러면 차장님? 부장님이신가요?”라고 다시 한 번 물어볼 때도 많다.
앞의 ‘부장’과 ‘프로젝트 매니저’의 차이가 최근 강조되고 있는 ‘직무 중심 인사’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도화된 현대 경제 환경 속에서 조직 내 수행 업무와 역할에 대한 전문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제도적·문화적 측면에서는 아직도 한국 고유 연공서열상의 상대적 우위, 연령, 대외적 호칭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직무 중심 인사의 필요성은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 전문성(Expertise), 고령화 사회(Aged Society) 등 세 가지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국 기업의 글로벌 진출 확대와 현지 특성을 반영한 인사제도 운영의 필요성이다. 삼성전자는 14개 지역 총괄과 37개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 51개 글로벌 판매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다. ‘글로벌 원 컴퍼니(Global One company)’로 성장한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원 HR(Global One HR)’를 구축하기 위한 기본 단위가 바로 직무다.
직무 중심 인사 도입은 선택 아닌 필수
둘째, 조직 내 수행 업무와 역할의 전문성 강화 관점에서의 필요성이다. 한국 기업은 ‘사람’ 중심의 인사 문화가 강했기 때문에 그동안 해외 선진 기업의 ‘직무’ 중심 인사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어려웠었다. 그러나 산업 간 장벽이 무의미해지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경영 환경에서 결국 맡은 바 업무, 역할의 전문성 강화는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의 생존 기반으로 강조되고 있다. ‘부장’으로서의 리더십과 역량이 아닌 프로젝트 매니저로서의 프로젝트 관리, 사업주 관리, 인력 관리 역량 보유 및 육성 관점으로 인사제도 운영 기준의 전환이 필요하다.
셋째, 한국 사회의 급격한 고령화다. 현재와 같이 ‘사람’ 혹은 ‘직급’ 중심 인사 운영 체계는 고령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고직급 인력 규모가 늘어나게 되고 인건비 부담이 가중된다. 또한 경직된 노동시장 특성에 따라 조직 내 신규 인력 유입의 제약, 인력 구조의 불균형 심화에 따른 성장 동력 감소가 예상된다.
국내 주요 기업도 고령사회 준비 차원에서 2010년 전후로 임금 피크제를 도입했지만 이제는 퇴직 대상 인력 중심의 임금 피크제가 아닌 인사 운영 전반의 체제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선제적으로 정년 60세 연장과 임금 피크제 도입을 선언한 것이 좋은 사례다. 특히 기존 직책 단계를 축소하면서 보상제도 운영의 기준을 ‘직무 및 역할’로 전환하면서 기존의 근속 연수 누적에 따른 고임금을 방지하고 난이도·복잡성·책임의 크기에 따라 직책별로 보상 수준을 차등화한 것은 큰 시사점을 던진다. 즉, 이제는 직무 중심 인사가 선진화된 인사 운영의 기준으로서 ‘하나의 대안’이 아닌 기업의 지속 가능 성장의 ‘필수 요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별 DNA 중시하는 뿌리 깊은 공채 문화
직무 중심 인사가 기업의 지속 가능 성장의 필수 요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업들이 도입을 어려워하는 현실적인 한계 요인은 직무 기준 인사 운영, 특히 보상제도 차등화에 대한 구성원의 강한 반대와 공채 중심의 채용 문화 등이다.
대다수의 노동조합이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을 강조하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을 주장하고 있고 구성원이 담당하는 수행 업무와 역할에 따라 기본급 혹은 수당이 차등화되는 ‘직무 중심 인사·보상제도’의 도입을 적극 반대하는 게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 기업들이 ‘직무’의 정의, 필요 요건, 조직 내 상대적 서열에 대한 객관적인 정의와 평가, 투명한 커뮤니케이션 등을 통해 노동조합과 합리적 대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채 중심 채용 문화도 직무 중심 인사 도입의 주요 제약 요인이다. 4년제 졸업자 기준의 공채로 입사한 인력은 ‘동기’라는 이름 아래 동질감을 공유하게 된다. 구성원들은 조직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동질감뿐만 아니라 보상에 있어서도 동질감을 공유하게 되므로 수행 직무에 따라 기본급 혹은 수당이 차등화되는 부문에 대한 수용력이 낮을 수밖에 없다. 조직 측면에서도 조직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고 기업별 DNA를 강조하는 공채 운영의 효용성이 직무별 수시 채용에 따른 개별 인사제도·보상제도 차등화보다 크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들어 공채 중심 채용이 줄어들고 직무별 수시 채용을 통한 전문가 선발과 육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직무 중심 인사의 도입 환경이 점차 개선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제약 조건 아래서도 국내 대기업과 다국적기업은 직무 중심 인사 도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고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를 기업의 지속 가능 성장을 위한 인력 운영의 기본 구조, 요건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직무 중심 인사제도의 도입 사례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식 직무 중심 인사의 유형을 정의하고 향후 인사 전략의 발전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한국식 직무 중심 인사와 관련해 최근 기업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특징은 ‘직급·호칭 유지와 고직급 대상 직무 기준 인사 운영’이다. 직급과 호칭의 대내외적 의미가 중요시되는 사회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사원~부장의 직급과 호칭을 유지하고 과장 이상 간부급은 직무에 따라 보상을 차등화해 운영하게 된다. 이를 통해 신입 구성원 간의 동질감·소속감을 강조하는 공채 중심 채용의 효용성을 유지하면서 직무 전문성이 요구되는 간부급 구성원에 대해서는 수행 업무와 역할 기반의 인사를 운영할 수 있다.
국내 A기업은 사원·대리·과장급 이상으로 기본급 임금 밴드(Pay Band)를 구분하고 직급과 무관하게 개인별 연간 성과와 역량에 따라 임금 밴드 내에서의 연봉 상승률(Merit Increase)을 차등 적용하고 있다. 임금 밴드 기준으로 승격은 대리에서 과장으로의 승격이고 실질적인 보상 기회 확대도 이에 한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보상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구성원은 사원에서 대리, 과장에서 차장, 차장에서 부장으로의 호칭 승격을 여전히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내외적 위상과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단시간에 변화하기 어렵다는 점을 방증해 주는 사례다. 이에 대해 A기업은 향후 이러한 호칭 상승의 승격 의미를 보다 축소하기 위해 과장급 이상의 직급 폐지와 직무 가치 상승을 기준으로 한 보상 확대를 준비하고 있다. 향후 과장급 이상은 수행 업무와 역할 기준의 직무가 부여되고 해당 직무가 갖는 조직 내의 상대적 가치에 따라 기본급이 차등화된다. 이를 통해 구성원 개인이 맡은 업무와 역할의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보다 큰 업무, 역할 범위를 맡는 것을 진정한 승격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기본급 조정보다 수당 활용해 직무급 효과 내
한국식 직무 중심 인사의 둘째 특징은 ‘직군별 인사제도 분리 운영’이다. 이는 기업 내 다양한 기능이 직군 기준으로 명확히 구분되고 직군별 필요 역량과 경력 개발이 개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경우다.
국내에 연구·개발(R&D)과 생산 기반을 갖춘 B기업은 직군별 인사제도 구분을 통해 직무 중심 인사를 구현한 사례다. 그동안 이 기업은 R&D·생산·경영지원 등의 직군 구분 없이 공채 기준으로 채용을 실시해 구성원 간의 동질감·소속감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구성원의 개인별 수행 업무와 역할의 난이도, 중요도, 필요 요건의 차이를 인사 운영상으로 반영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지속적인 직무 수행에 필요한 전문성 개발에 대한 동기부여가 점차 약화되고 기업 경쟁력 수준도 하락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이에 대해 경영진은 공채 제도는 유지하되 채용 단계에서부터 직군별로 인사제도를 분리해 운영한다는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즉, R&D 직군은 직급 단계가 선임·책임·수석연구원의 3단계로 축소되고 승격·보상 등 인사제도는 직급·호칭 기준이 아닌 수행 직무와 역할 기준으로 전환되게 된다. 이에 비해 생산·경영지원 직군은 기존의 사원~부장의 5단계 직급, 호칭이 유지되며 연공서열 기준의 호봉제를 유지하게 된다. R&D 직군에 대해 직무 중심 인사를 선제적으로 도입하기로 한 경영진의 판단은 결국 기업의 지속 가능 성장을 뒷받침하는 경쟁력은 ‘직무 전문성’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식 직무 중심 인사의 셋째 특징은 ‘수당 중심의 직무급 도입’이다. 이는 정년 연장, 통상임금 범위 확대 등의 정책 변화로 계속 늘어나는 인건비 부담을 반영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기본급 자체를 조정함으로써 직무급을 도입할 때 직군별로 기본급을 재산정해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이에 대한 노조의 강한 반발에 부닥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수당을 이용해 직무급의 효과를 내려고 하는 직무급 도입 초기 형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C기업은 본부·팀·파트로 조직 체계를 구성하고 있고 파트장 이상에 대한 직무(직책) 평가를 실시해 수당을 차등 지급한다. 직무 중심 인사의 초기 도입 단계로 파트장·팀장·본부장 직책을 필요 역량, 난이도, 중요도 등을 기준으로 서열화해 수당을 차등 지급한다. 특히 같은 파트장이라도 수행 기능의 특성에 따라 서열화를 적용했다. 예를 들어 인사기획파트장은 인사운영파트장과 동일 직책(파트장)이지만 수행 기능의 차이(인사 기획 vs 인사운영)에 따라 상이한 등급의 수당을 지급받게 된다. 기능 구분 관점의 직무 체계를 유지하되 기능별 특성 기반의 상대 서열화를 수당으로 연계함으로써 기존 인사제도와의 연계 수준을 높이고 순차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형태다. 또한 제반 보상제도에 영향력이 큰 기본급보다 별도 수당을 신설해 추가 지급함으로써 노동조합과의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렇듯 한국의 사회 문화적 배경, 노동시장의 특성, 기업별 특성을 고려한 다양한 한국식 직무 중심 인사 도입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필자는 이를 ‘미국·유럽식 직무 중심 인사’의 과도기적 형태가 아닌 한국 고유의 인사 운영 모델로 해석한다. 결국 인사제도와 운영은 그 기업이 속한 국가와 지역, 구성원의 특성에 맞게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칫 획일화하기 쉬운 인사 방법론과 트렌드를 한국 고유의 환경과 특성에 맞게 개발해 적용하려는 노력이 기업의 지속가능 성장을 위한 경쟁력 확보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준호 헤이그룹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