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위기를 기회로 바꾼 ‘르노-닛산’ 승부수
입력 2014-06-05 10:14:20
수정 2014-06-05 10:14:20
자신보다 덩치 큰 일본 기업 품고 ‘글로벌 톱4’ 로…카를로스 곤, 닛산 부활 주도
‘지금 이대로, 르노의 미래는 없다.’
1999년 3월 프랑스 파리 교외 비양쿠르의 르노 본사. 루이 슈바이처 르노 회장은 말없이 책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회사의 몸집을 불려야 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 합병(1998년 5월)을 지켜보고 위기감도 들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다른 회사와 손을 잡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1993년부터 1년간 공을 들였던 볼보와의 인수합병도 승인을 눈앞에 두고 볼보 주주들의 반대로 백지화됐다. 그 후 5년째 르노의 성장은 정체돼 있었다.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닛산과 미쓰비시자동차 등 일본 업체들을 접촉해 봤지만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발신인은 일본인 하나와 요시히토. 그는 일본 닛산자동차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였다. 그의 용건은 짧지만 강했고 간단하지만 절실했다. “르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시 닛산은 다임러크라이슬러와 제휴를 추진 중이었다. 하지만 1년여에 걸친 협상은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장기간 적자에 시달리던 닛산엔 회사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그는 독일에서 곧바로 프랑스로 날아갔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르노 본사 회장실에 규모의 경제를 원한 슈바이처 회장, 회사를 살려야 하는 하나와 사장이 마주 앉았다. 절박함은 빠른 합의로 이어졌다. 단 6시간 만에 두 사람은 자본 제휴에 합의했다. 1999년 3월 27일, 양사 간의 자본 제휴 조인식은 그야말로 ‘번개 같은 속도’로 진행됐다. 이렇게 탄생한 르노닛산얼라이언스는 도요타·폭스바겐·제너럴모터스(GM)에 이어 세계 넷째 자동차 제조사로 자리매김했다. 현대·기아자동차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지만 착실히 몸집을 불려가며 추월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와 일본, 2차 세계대전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눴던 두 국가의 기업은 이제 한 지붕 아래서 자동차를 생산, 판매하며 공동의 번영을 꿈꾸고 있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겉보기엔 동서양 기업의 이질적인 결합이지만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걸출한 경영인은 이 속에서 최상의 성과를 이끌어 냈다. 그의 이름은 카를로스 곤이다.
르노와 닛산의 제휴는 당시 자동차 업계는 물론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심지어 회사 규모부터 르노가 닛산보다 작았다. 1999년 르노의 생산 대수는 219만 대, 닛산은 245만 대였다. 프랑스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정부 지분율을 1993년 79%에서 1999년 46%까지 낮춤과 동시에 닛산의 주식 36.8%를 취득하면서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민영화와 몸집 불리기 작업이 같은 해에 이뤄진 셈이다. 지분 인수가는 330억 프랑, 달러와 엔화로 환산하면 각각 54억 달러, 6430억 엔이었다. 그동안 쌓아 온 두둑한 실탄으로 자신보다 덩치가 큰 일본 회사의 최대 주주로 올라선 르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 편중돼 있던 시장을 단숨에 북미를 포함한 세계로 넓히는 데 성공했다. 1999년 기준으로 두 회사의 생산량은 477만 대다. 10위권에서 맴돌던 두 회사는 당시 기준으로 GM·포드·다임러크라이슬러·도요타에 이어 5위로 뛰어올랐다.
르노가 닛산을 인수·합병(M&A)한 것은 아니다. 르노닛산얼라이언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지붕 아래서 각각의 브랜드가 이전처럼 독립성을 갖고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그 대신 연구·개발(R&D) 부문에서 상호협조와 부품 대량 구매를 위한 르노-닛산 구매조직(RNPO) 설립, 판매 영업망 공유 등으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했다.
두 회사의 결속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단단해졌다. 2001년 닛산은 르노 지분을 15%로, 르노는 닛산 지분을 44.4%로 각각 늘리면서 제삼자의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력도 강화했다.
닛산은 지난해 연간 493만 대를 판매했다. 도요타(998만 대)·혼다(393만 대)와 함께 일본 3대 자동차 제조사다. 1914년 일본 도쿄의 가이신자동차공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된 닛산의 역사는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타도 포르쉐’를 외치며 슈퍼카 GT-R를 개발해 업계를 놀라게 했고 프리미엄 브랜드 인피니티를 내놓아 독일 명차들과 경쟁하는 등 강한 내공을 지닌 회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계를 1999년으로 돌려보면 오늘날의 닛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체질을 갖고 있었다. 2000년 3월 결산 기준(1999년 4월~2000년 3월)으로 닛산은 6843억 엔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더 큰 문제는 1993년(일본 결산 기준)부터 2000년까지 8년 중 한 해(1997년)만 빼고 모두 적자를 냈다는 것이다. 세계 시장점유율은 1991년 6.6%에서 1999년 5% 밑으로 떨어졌다. 사내에서는 ‘존폐 위기에 몰렸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닛산이 르노에 SOS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존폐 위기 몰린 닛산, 르노에 SOS
닛산은 1980년대까지는 화려한 시절을 누렸다. 이 회사는 창업자인 덴 겐지로, 아오야마 로쿠로, 다케우치 메이타로의 영문 이름 앞 글자를 따 ‘DAT자동차’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주로 군용 트럭을 만들다가 1931년 소형차 ‘닷선(Datsun)’을 만들면서 승용차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이 차는 일본의 제1호 국산차로 불린다. 한국의 포니와 같은 존재다. 이 회사는 1933년 다른 자동차 부품 회사들과 함께 닛산그룹에 인수되면서 오늘날의 닛산자동차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닷선은 1950년대까지 세단과 소형 픽업트럭 등으로 생산되며 미국에 수출되기도 했다. 1959년에는 영국 오스틴사와 기술 제휴, ‘블루버드’를 출시해 인기를 끌었다. 이 차량은 한국GM의 전신인 새나라자동차가 1962년 조립 생산(CKD) 방식으로 한국에서 생산, 판매하기도 했다. 블루버드 출시와 함께 미국에 자회사를 설립한 닛산은 상승 가도를 달렸다. 1966년 일본의 프린스자동차공업을 인수했다. 이 회사가 바로 일본의 세계적인 명차 스카이라인을 개발한 곳이다. 스카이라인은 오늘날 GT-R의 조상이다.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소형차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멕시코·호주·대만·남아프리카공화국 등으로 생산 기지를 넓혀 나갔다. 1975년에는 도요타를 제치고 미국 수입차 판매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미국과 영국에도 공장을 설립했다.
상황은 1980년대 들어 어둡게 변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피니티다. 도요타가 미국 시장에서 프리미엄 렉서스를 성공시킨 데 이어 혼다가 내놓은 어큐라까지 좋은 반응을 얻자 닛산도 서둘러 1989년 인피니티를 출시했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된 인피니티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미국인들에게 낯선 개념인 ‘선(禪)’ 마케팅이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신생 프리미엄 브랜드가 구체적인 정보 없이 이미지만 전달했으니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 리 없었다. 인피니티는 회사 전체에 큰 타격을 입혔다. 여기에 닛산의 안방인 일본은 ‘잃어버린 20년(1991~2011년)’이라고 불리는 장기 불황에 접어들었다. 관료화된 조직의 안일한 업무 방식은 위기의 탈출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1999년 당시 닛산의 회장 겸 CEO를 맡고 있던 하나와 요시히토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다른 업체와의 자본 제휴에 나섰다. 그는 르노는 물론 다임러크라이슬러·포드와도 협상을 진행했다. 결과는 르노였으며 르노가 파견한 카를로스 곤 닛산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단 1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이후 과감한 조직 재정비와 기업 문화 혁신, 신차 개발 추진 등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회사는 다시 상승 곡선을 그렸다. 닛산에 르노는 고마운 해결사였지만 르노에도 닛산은 귀한 존재였다. 볼보와의 제휴가 결렬된 후 극적으로 진행된 닛산과의 제휴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미쉐린 북미 CEO인 카를로스 곤을 주목하다
슈바이처 회장은 닛산과 자본 제휴에 이어 다시 한 번 승부수를 띄웠다. 이번에는 사람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세계 최대 타이어 제조사인 미쉐린 북미법인 총괄 사장을 눈여겨봤다. 그의 이름은 카를로스 곤이었다. 한 차례 그를 면담한 슈바이처 회장은 그 자리에서 닛산의 COO 겸 부사장 자리를 제안했다. 그의 깜짝 인사에 다시 한 번 세계가 놀랐다.
카를로스 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월급쟁이 신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1954년 브라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브라질인,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프랑스의 대표적 기술 대학인 국립고등광업학교를 졸업한 후 타이어 업체 미쉐린에 입사했다. 그리고 1985년 32세의 나이로 브라질 미쉐린의 COO로 임명됐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제어가 어려웠던 브라질 법인을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한 그는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1989년 북미 미쉐린 CEO가 됐다. 브라질 태생(남미)으로 프랑스(유럽)에서 학교를 나와 기업에 입사해 세계 최대 시장 중 하나인 미국·캐나다·멕시코(북미) 지역에서 CEO에까지 오른 것이다. 이공계 출신으로 경영 마인드까지 갖춘 그는 적어도 자동차 기업에서 가장 완벽한 경험과 스펙을 갖춘 인물이었다. 슈바이처 회장이 카를로스 곤을 르노 부사장으로 스카우트한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르노에 새 둥지를 튼 그는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강한 돌파력을 발휘했다. 입사 5개월 만에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을 세워 200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삭감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하자 그에게 ‘코스트 커터’라는 비아냥조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이듬해 닛산은 단숨에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말 그대로 ‘V’자 실적 개선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의 별명은 얼어붙은 상황을 멋지게 타개했다는 의미의 ‘아이스 브레이커’로 바뀌어 있었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